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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이연순 - 의승기의 주제의식 고찰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이연순 - 의승기의 주제의식 고찰

건방진방랑자 2022. 10. 2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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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승기(義勝記)의 주제 의식 고찰

이 연 순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사

 

 

국문초록

 

 

본고는 창계(滄溪) 임영(林泳, 1649~1696)의 작품 의승기에 드러난 주제의식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먼저 의승기의 창작 배경으로 17세기 중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창계의 생애와 학문에 대해 살피고, 의승기의 주제의식에 대해 두 가지 점을 밝혔다.

 

의승기가 창작된 17세기 중반 조선 사회에서는 병자호란을 겪은 사대부들이 벼슬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문단에서는 산문이 유행하며 문학의 향유층이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시대에 창계는 어려서 누이들에게 언문 소설을 듣고, 조부께 궁리수심(窮理修心)의 학문에 힘쓸 것을 가학(家學)으로 전수받으며 의승기창작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창작된 의승기16세기의 천군전과 다르게 지상(地上)에 국한한 공간을 설정해 천군을 지상의 존재로서, 도적은 바다의 주인으로 제시하며, 환해(宦海)를 도적의 제일 요해처로 강조하였다. 그리고 천군을 돕는 충신으로 경()을 대변하는 성성옹과 의()를 대변하는 맹호연의 인물 형상을 조화롭게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창계의 의승기는 벼슬[]을 경계하며, ()과 의()를 조화롭게 추구한 주제의식을 드러냄으로써, 당시 병자호란 직후 오랑캐의 무력적 침입에 의해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며 아울러 정신적 불균형 상태를 조화롭게 만들려는 유자들 의 정신적 회복 의지를 보여준 작품이라 파악된다.

 

주제어 : 滄溪, 林泳, 義勝記, 주제의식, 17세기, 天君, 心性, 孟浩然, , ,

 

 

 

1. 서론

 

 

본고는 17세기에 창계(滄溪) 임영(林泳, 1649~1696)이 마음을 의인화하여 창작한 의승기(義勝記)의 창작 배경과 그 주제의식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의승기는 창계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이자 천군소설의 계보를 잇는 17세기 작품의 하나이다.

 

 

기존 논문의 방향

 

기존에 의승기는 소설사와 천군소설 연구에서 다른 작품들과 함께 종종 언급되었다김광순, 천군소설연구, 형설출판사. 1980; 안병설, 천군계 우언의 형성과정과 특성, 中國學論叢7, 國民大學校中國問題硏究所, 1991; 윤주필, 우언소설의 양식사적 검토, 고소설연구, 5, 한국고소설학회. 1998; 許元基, 天君小說心性論的 意味, 古小說硏 究11, 韓國古小說學會, 2001; 강혜규, 천군계 작품의 사적 고찰, 정신문화연구, 31권 제1,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

 

특히 의승기는 임란 직후에 나온 작품으로, 임란 이전에 나온 천군전, 수성지와 임란을 전후해 나온 천군연의등과 함께 초기 소설사의 공백기를 메워준 점에서 주목되었다김광순 역주, 천군소설, 해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96, p.9..

 

의승기를 단독으로 연구한 업적은 김광순(1986)창계의 생애와 문학이 유일하다. 김광순은 창계의 의승기저작 배경으로 당시 중국 소설과 영웅소설의 영향을 들었다. 곧 창계의 의승기가 당시 유입된 중국소설과 임란 이후 나온 영웅소설 등의 주인공 묘사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김광순, 창계의 생애와 문학, 퇴계학과 한국문화, 14, 경북대 퇴계학연구소, 1986, p.52. 그러나 실제 작품에서는 천군에 대해 행동만 기술되고 묘사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을 뿐, 이러한 영향관계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이라 추측한 것이다. 그리고 최재남이 창계의 삶과 시세계를 살피면서 창계가 14세에 조부께 궁리수심(窮理修心)의 학문을 전수받고 16세에 의승기를 창작한 것에 대해 맹자(孟子)의 사상과 연결될 수 있는 심리(心理)에 바탕을 둔 것이라 정리한 바최재남, 창계 임영의 삶과 시 세계, 한국한시작가연구12, 한국한시학회, 2008, pp.376~377. 있다.

 

이러한 선행 연구에서 부여한 소설사적, 문학사적 의의 외에도 의승기는 도적의 요해처(要害處)()’을 제시하고 있으며, ‘()’을 대변하는 인물인 성성옹(惺惺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를 드러내는 맹호연(孟浩然)에 대해서도 인물 묘사를 상세하게 다루는 등 작품 내적으로 여느 천군전과 다른 점이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논문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

 

이에 본고에서는 창계의 작품 의승기에 관해 당대 사회와 문화와의 영향관계를 고려하여 그 창작 배경과 주제의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의승기창작에 배경이 된 17세기 중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창계의 생애와 문학 성향에 대해 살펴본 후, 작품을 분석하며 창작배경과 관련지어 주제의식을 도출하고 그 문학사적 의의를 밝히겠다.

 

본고에서 대상으로 하는 자료는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펴낸 창계집한국문집총간 159과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나온 창계집(1994)이다. 의승기를 본문에서 인용할 때는 전자를 주 자료로 하여 작가 이름을 제외하고 제목과 권수만을 제시하며, 그 외에 후자를 부분적으로 인용할 때도 적용함을 밝힌다.

 

 

 

 

2. 의승기창작의 배경

 

 

1) 17세기 중반의 사회ㆍ문화적 배경

 

 

병자호란이 미친 지식인의 은둔

 

창계가 태어나기 전 조선 사회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병자호란이었다. 특히 병자호란 이듬해인 1637(인조 15) 인조가 청에 항복한 일은 당시 문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어서 그들의 출사(出仕)에도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으로 윤휴(1617~1680), 유형원(1622~1673), 윤증(1629~1714) 등이 그러한 삶을 보여주었다이경구, 17세기 조선지식인 지도, 푸른 역사, 2009, pp.134~135; pp.160~162.. 자신의 신념에 따라 출사거부를 선택하는 것이 당대 사회에 대한 문인들의 현실 대응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는 병자호란뿐만 아니라 붕당의 세력 형성 등 외부 상황에 따라 출사에 대한 선택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창계의 외종숙으로 창계와 서간(書簡)을 주고받으며 토론했던 조성기(1638~1689)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당대 정치 현실과 정치인을 비판적으로 대했다. 이러한 태도의 저변에는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의 지배 하에서 벼슬을 한다는 것은 오랑캐의 배신(陪臣)에 다름 아니라는 현실인식이 깔려 있었던 것최재남, 앞의 논문, 2008, pp.375~377.이라 보는 시각도 같은 맥락이다.

 

 

의승기에 영향을 끼친 심학(心學)과 신명사기(神明舍記)

 

그렇다면 의승기가 창작되기까지 영향 받은 사상과 문학의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자. 먼저 사상적 배경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중심과제는 마음의 근원과 구조를 밝히는 이론적 관심에서 나온 심성론과, 마음의 표준을 확인하고 이상적 실현을 추구하는 실천적 관심을 보인 수양론의 두 영역에서 전개되었다금장태, 한국유학의 心說, 서울대 출판부, 2002, pp.85~86.. 특히 15세기에 우리나라에 전해진 심경부주(心經附註)16세기 퇴계에서부터 존중되어 유학자들 사이에서 활발히 읽히면서 당시 심성론과 수양론 등의 논의가 심경부주의 독서와 토론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났고, 이후 퇴계의 제자들에 의해 심경부주 주석서의 저술이 다수 이루어졌다홍원식 외, 심경부주와 조선유학, 예문서원, 2008, p.13; 홍원식 외, 조선시대 심경부주 주석서 해제, 예문서원, 2007, p.15..

 

이러한 심경부주의 독서와 그 주석서 저술은 당시 문단에도 영향을 미쳐, 도회(圖會)제작과 문학창작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남명의 신명사도(神明舍圖)나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와 같은 도회가 제작되고, 이는 동강의 천군전(天君傳)과 이정(李楨)신명사부(神明舍賦)등과 같은 문학 창작으로 이어진 것이다.

 

동강의 천군전은 당시 심경을 읽고 실제 경연에서도 강의한 동강이 스승 남명의 명()을 받아 지은 작품으로, 16세기 당대 조선의 사상적 경향을 작품 속에 반영하고 있다신명사도를 제작한 남명이 여기에 더하여 을 짓고, 그 제자인 동강에게 천군전을 짓게 명한 이후로, 사대부들은 신명사를 제목이나 작품 속에서 차용하여 조선시대 心學을 잇는 한편, ‘천군을 등장인물로 하여 마음을 의인화한 작품들을 계보를 이어가며 창작하였다. 17세기 이후에 나온 대표적인 작품은 계곡 장유의 神明舍記, 한사 강대수의 신명사기, 태계 하진의 신명사기, 그리고 19세기 면우 곽종석의 神明舍賦등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강혜규(2008)의 연구와 전병철, 지리산권 지식인의 마음 공부 : 신명사 도명관련 남명학파 문학작품에 나타난 재해석의 면모와 시대적 의미, 남명학연구, 28, 경북대 퇴계학연구소, 2009, pp.315~360 참고..

 

 

고려 말 이어져온 가전(假傳)의 전통 계승

 

또한 문학적으로 마음을 의인화한 점에서 고려말 사대부 문인들이 사물에 대한 관심으로 사물을 의인화해 작품화한 가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는 한편 16세기 기록문학이 번성하던 시대와 문단의 경향과 관련하여서도 해석된다. 곧 조선 전기에 잦은 사화(士禍)를 겪은 사림들이 자칫 사라질 수도 있는 인물이나 사건의 사실기록을 활발히 남기면서 16세기에는 일기문학의 번성기를 맞게 되는데, 이 같은 기록문학으로 다 담을 수 없는 당시 정치와 사상의 실제를, 마음을 의인화한 문학작품으로 드러낸 것이라 여겨진다.

 

17세기 중반에 창작된 창계의 의승기는 이러한 16세기 천군전의 뒤를 잇는 작품으로, 사상적으로 심학풍(心學風)이 형성조성산, 낙론계 학풍의 형성과 전개, 지식산업사, 2007, p.70.되는 17세기의 사상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창계가 수학한 이단상, 그와 교유한 조성기, 김창협 등이 ()’과 관련해 깊은 관심을 보이며 글을 남긴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문학에서는 당시 임병 양란을 거치며 사건과 인물에 대해 기록하는 전대의 정신이 이어져 쇄미록, 병자일기등이 나왔고, 전대보다 소설이 유행하여 그에 따라 문학 담당층과 향유층이 확대된 17세기 문단의 경향을 반영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영향

 

특히 17세기는 양란 이후 소설사적으로도 변모된 양상을 보이는데, 특히 문학 향유층이 확대된 상황은 당시 부녀자들 사이에서 언문소설을 즐겨 읽은 풍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만부가 1632년에서 1634년 사이의 일로 기록한 자료에 따르면, 사대부 부녀자가 언문소설을 소리 내서 읽다가 나무람을 당한 일이 있다권태을, 息山 李萬敷 文學 硏究, 오성문화사, 1990; 조동일, 한국문학통사4, 3, 지식산업사, 2005, p.123, p.129 미주 재인용. 한다. 이 부분은 국문소설사에서 17세기 초 허균의 소설 다음에 17세기 말 김만중 소설로 건너뛸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밝히는 데서 언급된 것이지만, 이와 동시대를 살았던 창계 당시 소설의 유행과 문학 향유층의 확대를 알려주기도 한다. 창계 또한 실제로 여덟 살 때, 누이들과 함께 소설을 가까이 접하다임형택, 17세기 규방소설의 성립과 창선감의록, 동방학지, 57, 연세대 국학연구원, 1988, pp.118~119. 16세에 스스로 의승기를 창작하기에 이른 것이라 여겨진다.

 

 

 

 

2) 창계의 생애와 문학 성향

 

 

창계의 가계와 영향

 

창계 임영은 나주를 본관으로 하고, 1649년 서울 외가에서 출생하여, 17세에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 1628~1669)에게 수학하기 시작한 후,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1~1695),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과 평생을 가까운 사이로 보냈고,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 1638~1689),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 등과 교유하였다. 창계의 선대에는 비록 직계는 아니지만 임제(林悌, 1549~1587)와 같은 유명한 문인이 있고, 외가에는 외증조부 조희일과 그 동생인 조희진의 손자 조성기와 같은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이종범, 滄溪 林泳學問政論, 韓國人物史硏究9, 한국인물사학회, 2008, pp.185~186.. 조성기에게는 앞서 언급한 대로 창계가 사상적으로 직접 영향 받은 점이 보이나, 임제와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창계가 의승기와 같은 작품을 짓는 데는 화사(花史)수성지(愁城志)와 같은 작품을 지은 임제에게서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한다.

 

 

일찍이 소설을 접한 창계

 

어린 시절 창계의 행적에 대해서는 17세기 소설사에서 일찍이 주목한 바 있다. 임형택이 창계의 연보에서, 창계가 여덟 살 때 누이들에게 여사고담을 읽어달라고 하여 듣다가 누이들이 귀찮아하며 스스로 읽지 못한다고 책망하자, 반절을 써달라고 하여 반나절 만에 언문을 깨쳤다는 기록을 인용하고, 당시 소설이 사대부의 규방에서 읽혔고 그것을 여사고담이라 불렀던 사실과, 이러한 여사고담, 곧 규방소설이 17세기 중반 이미 유행하고 있었던 현상을 밝힌 것이다임형택, 앞의 논문, 1988, pp.118~119..

 

 

16세까지의 근기학문(根基學問)과 심학에 눈뜸

 

창계는 생애를 통해 두 차례 수학기를 거쳤다. 1차는 8세에서 16세까지로 주로 부친의 임소(任所)를 따라 다니며 그곳 스승에게 배우거나 고향에서 조부께 가학(家學)을 전수받는 시기이다. 먼저 8세부터 13세 가을까지 부친의 임소인 은진에서 지내면서, 8세에는 과독(課讀)을 실행하며 사략(史略)을 읽어나갔고, 그 여가에 위와 같이 누이들에게 여사고담을 즐겨 들었다. 9세에는 소학, 사서등을 읽었고, 10세에는 나주 회진을 왕래하며 계부(季父)의 자효당(慈孝堂)이라는 서당에서 거하기도 했고, 11세에 대학을 읽으며 그 여가에 사문유취(事文類聚)한 질()을 다 읽었다. 12세에는 은진에 유배 와 있던 이흥록(李興祿)에게 서전(書傳)시전(詩傳)을 배웠고, 그 해 여름에는 백씨(白氏)와 서울에 올라가 조현소(趙見素, 1610~1677)에게 독송(讀誦)과 제술(製述)을 배우기도 하였다.

 

13세 가을에 부친의 임기가 끝나 나주로 돌아와서부터 창계는 가학(家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숙조(叔祖)인 동리(東里) 임위(林㙔)에게 주역(周易)을 배우고, 14세에는 조부(祖父)가 회산 별업에 종형 임호(林濩)와 그를 불러 겨울동안 독서하게 한다.

 

이때 조부는 궁리수심(窮理修心)하는 학문을 깊이 할 것을 둘에게 바랐다. 창계는 그 후 여러 해 심리(心理)의 설()에 마음을 두었는데, 자신이 힘써 행하지는 않아 실천할 수 없었지만, 뜻이 없다고는 이를 수 없을 것이라 하였다. 이는 10여년이 지나 창계가 집안의 책을 보다가 그때 조부가 내려준 시를 보고는 회상하는 대목에서 나오는 고백이다蓋昔壬寅之歲, 王考在回山別業, 實召孫濩, 泳以侍, 仍使之讀書一冬. (중략) 方讀書時, 王考嘗下示一絶, 深以窮理修心之學, 有望於吾二人. (중략) 泳偶竊有意於心理之說, 雖行之不力, 不能實有諸己, 抑不可謂全無志焉. (중략) 今日適閱家中舊書, 忽得奉覩遺墨, 捧玩悲愴, 怳然不知涕之流落也.” 창계집1, 敬次王考下示韻呈次韶濩從兄, 幷序..

 

그 시에 대해서는 선행 연구에서 살핀 최재남이 다루었다최재남, 앞의 논문, 2008, p.376.. 이러한 창계의 회상과 고백을 통해 그가 조부로부터 권면 받은 궁리수심의 학문에 깊이 마음을 두고 공부하다가 그를 바탕으로 마음에 대해 문학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것이 16세에 의승기창작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 보인다. 그 후 15세에는 역사서를 읽어가며 역사(歷史)와 인물(人物)과 사리(事理)에 대해 깊이 생각해가며 식견과 의취를 넓혀 갔다이상 1차 수학기에 대해서는 창계집, 滄溪先生年譜草,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94, 附錄補, pp.633~635와 한국문집총간 159, 1995, 해제 참조.고 한다. 이 또한 의승기창작에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19세에 문학에 대한 관점이 변하여 공부에 힘쓰다

 

2차는 17세에서 20세까지로 서울에 올라와 정관재에게 수학하며 독서차록일록등을 기록하며 도문학(導問學) 공부에 집중하는 시기이다.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예기, 춘추등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점 등을 정리해 상세히 기록하며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간다. 또한 박세채, 김창협 등과 활발히 교유하며 토론하였다.

 

이 시기 창계가 독서기록을 남긴 일록에 보면 18세에 계곡집을 접하였는데, 특히 그 속에 신명사기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한 후, 계곡이 신명씨가 성품이 교분하다고 한 점에 대해 지적하며 그렇지 않다谿有一文記神明舍, 以神明氏主人翁分爲二, 又曰神明氏性驕憤, 未是.” 창계집25,고 언급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 의승기창작 즈음의 상황을 볼 수 있다. 창계는 사장학에 매료되어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천군이나 신명사에 대한 기록을 다른 문인들의 문집을 볼 때 찾아 읽으며 계속해서 생각을 개진해 간 것이다.

 

그러나 창계는 19세 이후로는 문학에 대한 관점이 변화하는데, 이는 정관재에게 본격적인 수학기에 접어들면서 접하는 독서물이 달라진 데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일록을 보면, “우연히 주자어류 논문을 교감하다가 당송문(唐宋文)을 취해보고는 마음에서 긴절히 힘쓸 일이 아님을 알았다[“偶閱語類論文卷, 仍取唐宋文觀之, 心知其非切務.” 창계집25, 日錄, 丁未.].”라고 고백하는 대목이 나온다. 주자학 관련 저술을 보는 것이 당송문과 같은 문학에 빠져 있는 것보다 더 힘써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듯 창계가 정관재에게 수학하던 19세 이후부터는 문학에 대한 관점이 바뀌어, 문학을 멀리하기 시작하며 학문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졸수재의 색욕(色欲)을 경계하란 가르침

 

그러다 창계가 26세에는 학문이 더 나아가지 않는 것에 한탄하기에 이르고, 그 즈음 졸수재 조성기를 방문하였다가 색욕을 경계하는 것을 학문하는 제일 급선무로 삼고, 명리에 명예를 훼손하는데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입신하는 제 일의로 삼으라는 이야기를 듣는다訪趙成卿叔語終晷, 以痛懲色欲, 爲爲學第一急務, 不動於名利毀譽, 爲立身第一義.” 창계 집25, 日錄, 甲寅.. 평소 존경하던 졸수재에게 이러한 얘기를 들은 창계는 당시 학문과 입신에 관해 고민하던 자신의 뜻을 더욱 굳히게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32세에 벼슬에 나가며 갈등을 느끼다

 

창계 생애 중 16세에 의승기를 통해 드러냈던 마음[]의 중요함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때는 37세 이후이다.

 

그 사이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은 창계 32세 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숙종 6)으로 남인이 몰각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창계도 기회를 얻어 벼슬길에 나서게 되는 일이다. 창계는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처음에는 사양하였다가이우성, 한국고전의 발견, 한길사, 2000, p.306. 결국 정언을 거쳐 부수찬, 이조 좌랑, 35세에 이조정랑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그해 모친상을 당하고,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면서 부여 용담 소림촌으로 이주하고 더 이상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길을 택하게 된다.

 

이처럼 창계는 사환기(仕宦期)에 실제 벼슬을 거부한 행적을 남겼다김광순, 앞의 논문, 1986, pp.44~45;숙종실록, 숙종 22년 병자(1696,강희 35), 26(임진), 전 참판 임영의 졸기 참고.. 창계가 관직에 진출하여 조정에서 활동할 시기에는 남인과 서인, 또 노론과 소론이 대립, 분열하는 당쟁의 와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노소간의 대립이 심하였음은 창계 사후 문집 간행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이다최윤정, 서계 박세당 문학의 연구, 혜안, 2011, p.56 참조..

 

이상을 통해 창계가 16세에 의승기를 창작하고 수학할 당시는 병자호란 직후 벼슬을 거부하였고, 이후에는 당쟁의 여파로 벼슬을 꺼리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어 창계 또한 그러한 삶을 선택했음을 볼 수 있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깊게 빠져든 심학

 

벼슬에서 물러난 후 창계는 다시 일록을 작성하며 독서하는 일에 전념한다. 이때 계곡이 음부경해서(陰符經解序)를 지은 것을 검토하며 음부경을 다시 읽어보고 그 의의를 평가하면서 마지막에 잡서(雜書)로 취급하고 경계해야 함을 강조하였다因檢谿谷集陰符經解序遂, 取架上陰符, 再三披閱而默誦之.(중략) 又必取雜書, 亦可戒也.” 창계집25, 日錄, 乙丑..

 

창계는 이보다 앞서 계곡의 신명사기에서 신명사를 정의하는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계곡의 신명사기음부경해서등에 대해 반응한 흔적을 보인 것은 이들이 창계가 관심 갖고 있던 마음()과 관련 있는 저술이기 때문인 듯하다. 그리고 지난날을 돌아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일록에 남겼다.

 

 

귀와 눈이 보고 들음, 손발이 운용함, 입이 말하고 침묵함, 몸의 동정이 모두 마음이 하는 바이니 모두 마땅히 그 비고 비지 않음을 살펴야 한다. 비었으면 본심이 있는 것이요, 비지 않았으면 비록 모두 마음이 하는 바라고 말하더라도 또한 본심의 작용을 회복하지 않은 것이다.

耳目之視聽, 手足之運用, 口之語默, 身之動靜, 皆心所爲. 皆當察其虛與不虛, 虛則本心存也, 不虛則雖曰皆心所爲, 亦非復本心之作用矣. 창계집25, 日錄, 丁卯.

 

 

벼슬에서 물러나 2년이 지난 39세에 기록한 일록의 한 부분이다. 이목구비의 움직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본심을 회복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창계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며 16세에 의승기를 지을 때의 의식과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창계의 생애 정리와 의승기를 짓게 된 연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고에서는 창계의 의승기병자호란을 겪으며 17세기 중반 벼슬을 거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16세기 심경부주의 영향으로 심학(心學)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그로 인해 문학창작이 이루어져 17세기까지 이어지는 문단의 경향을 반영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또한 창계가 정관재에게 수학하면서 문학에 대한 관점이 바뀌기 시작하는 19세 이전의 시기, 8세에 누이들과 언문 소설을 즐겨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고, 14세에 조부께 궁리수심지학(窮理修心之學)의 글을 깨치며 심리(心理)에 관심을 갖게 되고 사장학에 매료된 시기에 의승기를 창작한 점도 고려한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다음 장에서 의승기작품 분석을 통해 드러난 주제의식의 특징적인 면을 살피고 그 의의를 밝혀보겠다.

 

 

 

 

3. 주제 의식

 

 

1) 매우 간단한 천군 묘사

 

 

의승기는 천군(天君)이 즉위한 지 3년이 지나면서 덕이 쇠해 盜賊이 침입하자 천군이 황야로 피해 10년간 방황하다 성성옹에 의해 다시 왕위에 오르고 맹호연을 뽑아 도적을 퇴치하는 일련의 사건들로 전개된다.

 

그런데 의승기에는 천상의 공간이 작품 속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으며, 의식상에서도 전혀 설정되어 있지 않다. 천군은 처음부터 천상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지상에서 가장 이상적이었던 시대인 요순임금이 계셨던 영대(靈臺)에서 어거하며, 태평세월을 구현하다 도적의 침입을 받고 방황하다 맹호연의 도움으로 도적을 퇴치하고 성성옹의 간언을 받아들여 남은 도적까지 교화시키는데, 그 후에도 천상으로 돌아갔다는 언급이 없는 것이다.

 

 

소략한 천군에 대한 묘사

 

천군이 즉위하던 때로부터 시작하는 부분을 보면, 천군에 대한 묘사는 간략하고, 바로 3년이 지나 도적이 침범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천군이 즉위하던 원년에 영대(靈臺)에 올라 명당(明堂)에 어거하였는데, 마음이 담박하여 하는 일 없이도 스스로 지켰고, 덕이 넓고 넓어 일컬을 수도 없었다. 천군의 백성은 배를 두드리며 태평을 노래하면서 노닐었다. 다 말하기를 한결같구나, 우리 천군이여.”하였다.

삼 년이 지나 천군의 덕이 점차 처음보다 능할 수 없었다. 도적이 그 틈을 타서 침범하고 능멸하기도 하고 해롭게 하기도 하고 붙잡아두기도 하고, 자르고 죽이기도 하여 해마다 도적이 날로 불어나니, 천군의 나라는 거의 떨치지 못했다.

天君卽大位元年, 登靈臺御明堂, 泊乎無爲, 澹乎自持, 蕩蕩乎無能名焉, 君之民鼓腹而遊, 咸曰一哉吾君.

越三年, 君之德漸不克于初, 有盜乘其釁, 侵凌我, 殘害我, 梏亡我, 翦劉我. 年年而賊日滋, 君之國幾不振.

 

 

천군은 즉위하자마자 영대에 올라 정사를 보는데, 여기서 천군에 대한 묘사는 무위지치(無爲之治)를 이룰 정도로 덕이 넓었고, 백성들이 그 태평세월을 노래하였다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천군이 정사를 보는 공간과 그 덕만이 제시된 앞부분은 양적으로도 매우 소략해, 서두가 장황한 천군전이나 수성지등과 현저히 비교된다.

 

이 태평하던 세월은 3년 만에 끝나고, 덕이 쇠한 천군에게 도적이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천군을 침입하는 도적에 대해서도 이름이나 묘사가 없다. 단지 천군의 나라에 피해를 끼친 행동을 통해 사건을 직접 기술하였을 뿐이다.

 

그래서 천군은 할 수 없이 황야로 달아나 온 세상을 방황하는데, 이때는 역사상 구체적인 인물에 비유하며, 지상의 시간과 공간으로서 제시하였다.

 

 

천군이 마침내 황야로 달아나 온 세상을 돌아다니니 마치 진공자(重耳)가 외국에서 있었던 것이 십여년인 것과 같았다.

君遂遯于荒, 周流四海, 若晉公子之在外者十餘年.

 

 

위에서 천군이 온 세상을 방황한 것을 진헌공(晉獻公)의 아들 중이가 진나라를 떠나 외국으로 떠돌아다니며 망명 생활을 한 것에 비유해 구체화하였다. 실제 중이가 여희(驪姬) 사건으로 외국에 머문 시기는 도합 19년간 인데 위에서는 10여년이라 하였다. 이는 천군의 방황 시절을 중이의 경우에 비유하여 그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음을 드러낸 것이다. 또 한 중이에 비유한 것은 그 이름에 마음이 작용하는 이목구비(耳目口鼻) 가운데 하나인 이()가 들어 있어서가 아닐까 한다. 이는 앞서 창계 39세 되던 기록에서 보았듯이, 신체의 부분들에는 마음이 깃들어 있기에, 비워두어야 본심의 작용을 회복하는데, 다른 마음이 들어가거나 생기면 본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 할 수 없다는 것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위에서 천군이 방랑한 10여년의 시간은 도적이 침범해서 욕심, 분노 등으로 가득 채운 마음을 비워내고,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기에 필요한 시간으로 설정된 것이라 보인다.

 

 

전대 천군소설의 자세한 천군묘사

 

이처럼 의승기의 천군이 등장하는 첫 부분은 전대 천군소설들과 비교하면 사뭇 다르다. 곧 천군이 천상에서 내려오기까지 과정과 그 인물묘사가 장황하고, 충신들이 등장해 천군으로서 갖추어진 모습을 보이는 천군전이나 수성지등과 달리 의승기의 천군은 처음부터 지상에서 자리 잡은 인물로 나오고 그에 대한 자세한 묘사도 없다.

 

동강의 천군전에서는 천군의 이름이 처음에 였다가 인간세계로 내려오면서 ()’으로 고쳤다하고, ‘신명전에서 조회할 때 태재 경과 백규 의에게 명하는 등, 인간세계에서 천군이 자리 잡는 데 필요한 요소인 이름과 공간, 그리고 충신까지 함께 장황하게 소개하며 시작하는 것과는 대조된다.

 

또 백호의 수성지에서도 천군이 영대에서 즉위하는 장면이 상세하고 그 뒤 2년이 되어 주인옹(主人翁)이 상소하자 연호를 복초(复初)라 고쳤다 하여, 적어도 도적이 침입하기 전에 충신의 말에 따라 나라를 새롭게 정비하는 최소한의 방비 태세를 보이는 것과도 비교된다.

 

 

의승기의 천군은 단지 덕만 갖춘 존재

 

의승기에서 천군은 처음부터 천상의 존재도 아니었고, 충신도 없이 홀로 등장해 덕을 펴다가 도적을 맞는다. 10년 방황 끝에 충신인 성성옹의 도움으로 왕위에 다시 올라 나라의 체제를 갖추게 된다. 결국 도적의 침입을 받고 나서야 천군에게 필요한 요소가 갖추어지는 의승기의 천군은, 처음부터 천상의 존재로서 이름과 연호, 충신 등을 갖추어 장황하게 묘사되는 천군과는 달리 단지 덕만을 갖춘 지상의 인물인 것이다.

 

 

(), 도둑이 사는 공간에 대한 묘사

 

그 후 맹호연이 남은 도적을 공격하러 도적의 세계에 들어가면서, 그제야 도적이 사는 공간과 그 정체를 소개하는 부분이 자세히 묘사된다.

 

 

큰 바다가 있는데, 그 남쪽의 환()이라는 데를 지나가니 이는 도적의 제일 요해처이다. 파도가 세차게 솟아올라 세상에 넘쳐 날 듯하였다. 앞의 배가 이미 뒤집어지고 뒤에 오는 것도 그치지 않아서, 돛대는 꺾어지고 노는 부러져 몇 천 개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도적을 치러 온 병사는 왕왕 이곳에 이르러 회군하였다. 관문을 명리(名利)라 하고, 산은 분심(忿心)이라 하며 골짜기는 욕심(慾心)이라 하니 모두 도적이 의지하여 험한 것으로 여겼다.

有大海經其南曰宦, 乃賊第一要害處, 波濤洶湧, 沃日滔天, 前船旣覆, 後來者不止, 崩檣敗楫, 曾不知幾千, 而討罪之師, 往往至此而回軍. 有關曰名利, 有山曰忿, 有壑曰慾, 皆賊之倚以爲險者也.

 

 

위에서 도적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상의 자연공간들과 그곳에 깃든 인간심리로 구체화되었다. 남쪽의 큰 바다에 도적의 제일 요해처인 환해가 있고, 그 관문에 명리가 있다고 하여, 멀리 있지만 언제든 다가가고자 하는 벼슬과 명리를 마음에서 제일 먼저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제시하였다. 지상의 공간에서 도적의 제일 요해처로 환해(宦海)가 제시된 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창계가 의승기를 저작할 당시(1664)병자호란 직후로 출사를 거부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 보인다.

 

또 도적이 사는 곳은 산과 골짜기로, 우리와 가까이 위치한 여기에 분심과 욕심이 깃들어 있어 늘 경계해야 할 마음으로 제시했다. 이렇게 인간 마음의 여러 곳에 여러 형태로 자리하고 있으면서 언제든 인간 마음을 부추기려고 도사리고 있는 도적과 같은 우리의 마음 한 부분을 경계한 것이다. 특히 도적의 제일 요해처로서 환()을 지목한 것은 창계가 가장 경계하고자 한 지점이라 하겠다.

 

 

 

 

2) 인물 형상을 통한 경()과 의()의 조화 추구

 

 

()을 대변하는 성성옹

 

의승기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는 맹호연의 묘사가 가장 많고, 성성옹의 묘사는 그에 비하면 소략하다. 먼저 성성옹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겠다. 성성옹은 처음 도적을 없애고 천군을 다시 왕위에 올리는 인물로서 등장한다.

 

 

마침 한 사람이 스스로 성성옹(惺惺翁)이라 하며 나라의 도적을 제거하고 임금을 불러 돌아와 대위(大位)에 다시 나아가게 하니, 마치 항량이 초왕을 얻은 고사와 같이 구하여 얻었다. 왕의 이름이 또 초왕과 같아 마침내 의제(義帝)라 호하고 화덕(火德)으로 임금노릇하며 하나라의 역수(曆數)를 썼다.

適有一人自稱惺惺翁, 稍除國賊, 喚君而歸, 復卽于大位, 以其求而得之, 如項梁得楚王故事, 王之名又與楚王同, 遂號義帝, 火德王, 行夏之時.

 

 

위에서 성성옹은 경()의 다른 이름으로, 거경(居敬)하는데 성성법(惺惺法)을 썼던 데에서 연유한다. 천군전에서는 성성옹에 해당하는 태재(太宰) ()이 나올 때 백규(百揆) ()도 동시에 나와 천군을 보필하는데, 의승기에서는 성성옹만 단독으로 먼저 나온다. 그에 대한 묘사도 없이 이름만 나온 뒤 도적을 제거한 행적만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천군은 그제야 호()의제(義帝)라 짓는데, 의제 이름에 심()이 들어가기 때문에, 천군이 심(), 곧 마음을 가리킴을 환기한 것이다.

 

마지막에 하나라의 역수를 썼다[行夏之時]’는 것은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안연이 공자께 나라를 위하는 것을 묻자(顔淵問爲邦) 공자가 답한 데서 나왔다. 곧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위하는 정사를 펴야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이로써 천군의 호가 지어지고, 충신 성성옹이 보필하며 하나라의 역수를 쓰는 등 나라로서 갖추어야 할 많은 부분이 정비된다.

 

 

()의 대변자 맹호연

 

이어서 천군은 성성옹을 총재에 임명하여 왕사를 행할 것을 명하나 남은 도적이 다 죽지 않아 안 좋을 때를 타서 쳐들어왔기 때문에 남은 도적을 퇴치할 용사를 모집하자遂下敎曰, 朕頃者德不有終, 大盜肆虐, 周流八紘, 莫適所從. 賴天之靈, 返于安宅, 繼自今 七正九官其交正予, 毋令否德再致向來之亂. 且我家家法, 尊賢爲大, 其令惺惺翁位冢宰行王事, 百官總已以聽, 於是益明習國家事, 民莫不悅, 然而餘寇未殄, 間或乘時而至, 常以此爲腹心之憂, 君於是募於國中曰, 有能恭行王罰, 殄滅餘賊, 吾將位以上將, 與之分閫. 드디어 맹호연이 등장한다.

 

 

맹호연(孟浩然)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됨이 지극히 강하고 큰 기운이 있었다. 일찍이 맹자에게 길러졌으므로 성을 맹씨로 하였다. 이에 드디어 응모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천만 사람이라도 내가 갈 것이다.”라 하였다. 천군이 이에 그를 원수(元帥)로 삼아 높이고 기르기를 지극히 하며 그와 더불어 국사를 모의하였다. 이로부터 뒤에 도적이 이르면 문득 깨트리고 달려가니 이년이 지나자 장차 크게 병사를 일으켜 남은 적을 토벌하였다. 맹호연이 왕명을 계승하여 군중에게 맹세하기를 , 너 여섯 군대여, 모두 내 말을 들어라. 도적이 하늘의 떳떳한 도를 업신여기고 어지럽히며, ()와 예()를 해치는구나. 예부터 그 나라가 망하는 데는 그 집을 패하고 그 몸을 죽이니 반드시 이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었다. 어찌 마음 아프지 않으리오. 더하여 최근에 내 나라가 새로 만들어진 것을 틈타서 감히 그 독을 방사하여 나라가 기울고 쓰러지며 주상이 도망가는 데에 이르렀으니, 무릇 혈기 있는 자 누가 분개하고 한탄하지 않으리오. (중략).” 맹세가 끝나고 드디어 행군하였다. 맹호연은 의마(意馬)를 타고 충신 갑옷[忠信甲]을 입고 인의의 방패[仁義楯]를 들고 앞에는 물자기(勿字旗)를 세워 큰 길을 따라 가고 출사는 규율로써 하였다. 보는 사람들이 찬탄하며 이 사람은 참으로 장군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험한 곳에 깊이 들어가 도적의 세계에 이르렀다.

有孟浩然者, 其爲人也有至剛至大之氣. 嘗爲孟子所養, 故冒姓孟氏. 於是遂應募自言千萬 人吾往, 君乃以爲元帥, 尊之至養之至, 與謀國事. 自是後有寇至則輒破走之, 越二年, 將大 擧兵以討餘賊, 浩然承王命誓于衆曰, 嗟汝六師, 咸聽予言, 惟賊侮亂天常, 敗度敗禮. 自古 亡其國敗其家戕其身, 未必不由此焉, 寧不痛心. 加以頃乘我國之新造, 敢肆其毒, 以至邦國 傾覆, 主上播越, 凡有血氣者孰不憤惋. (중략) 誓罷, 遂行軍, 浩然乘意馬, 披忠信甲, 擁仁義 楯, 前豎勿字旗, 遵大路而行, 出師以律, 觀者嘆曰, 此眞將軍. 遂深入其阻, 至賊界.

 

 

맹호연에 관해서는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 그 인물됨에 관해 직간접 서술을 동원하며 상세히 소개하였다. 먼저 맹호연의 됨됨이를 지극히 강하고 큰 기운이 있었다.’고 직접 서술하고 이어서 맹호연의 이름인 호연의 출처를 맹자라 하여, 성을 맹으로 한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왕명으로 도적을 소탕하러 가기 전에 하는 맹세를 통해서도 맹호연의 사람됨은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나라를 잃는 일에 마음 아파하며 그동안 천군의 나라를 잃었다 다시 찾기까지의 길고 험했던 과정을 한탄하는 지사(志士)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여러 천군소설에 나타난 의마(意馬)

 

또한 도적을 소탕하러 가기 전 맹호연의 맹세가 끝난 뒤 의마(意馬)’, ‘충신갑(忠信甲)’, ‘인의순(仁義楯)’, ‘물자기(勿字旗)’ 등 주변의 사물들이 소개되는데, 이는 의물화되어 그의 됨됨이에 덧붙여 맹세의 각오를 담아내는 데 한몫한다. 의마는 본래 유마경에 나오는 불교 용어로, ‘심원의마(心猿意馬)’에서 취한 것이다. 여기서는 사람의 마음이 흘러 산란해진 상태를 마치 원숭이와 말이 제어하기 어려운 것에 비유하였다.

 

그러나 의승기에서는 충신인 맹호연이 천군을 대신해 도적의 세계에 타고 들어가는 말[]로 나왔다. 의마는 백호의 수성지와 후대 정기화의 천군본기에도 등장한다. 수성지에서는 천군이 의마를 타고 팔극(八極)을 두루 다니며 주목왕의 고사를 들으려고 하다가 주인옹에 의해 만류 당해, 결국 타지 못하였다. 이때 의마는 천군의 뜻[]을 의물화(擬物化)한 표현이라 풀이되었다김광순, 천군소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96, pp.36~37..

 

그러나 의승기의 의마는 맹호연이 도적을 소탕할 목적으로 타고 가는 사물로 등장하여, 적을 향해 돌진하는 맹호연의 용맹함을 보조하는 한편, 도적의 침입으로 근심하는 천군의 마음을 해소하고 대리 충족해주는 역할까지 한다.

 

 

인의(仁義)는 호연지기의 기본이 된다

 

다음에 나오는 충신갑(忠信甲)’, ‘인의순(仁義楯)’, ‘물자기(勿字旗)’ 등의 사물들은 맹호연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형성하여 도적을 소탕할 수 있게 하는 도구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인의순(仁義楯)’물자기(勿字旗)’에서는 창계가 의()뿐만 아니라 인()을 함께 존중한 뜻이 드러난다. ‘인의순(仁義楯)’은 인의로 무장한 방패요, ‘물자기(勿字旗)’사물(四勿)의 글자를 새긴 깃발’,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의 네 가지 금할 내용을 쓴 깃발이다. 사물(四勿)은 안연이 공자께 인()을 묻자 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인()이 된다.”고 하고, 그 실천 조목으로 답해준 행동들이다. 따라서 이 사물들은 맹호연의 맹세가 단지 말로만 끝나지 않고 맹호연이 철저한 준비를 갖추어 도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창계 또한 훗날 맹자에 관한 독서차록에서 사람이 만약 인의(仁義)를 행하는 것을 배워 의()가 정밀해지고 인()이 익숙해지는 데에 이른다면, ()는 자연히 생길 것이다.”라고 하여 인의(仁義)가 함께 의 바탕이 됨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맹자가 이 기()를 호연(浩然)이라 하고, 주자는 호연을 풀어 성대하게 유행하는 모양人若學爲仁義, 到義精仁熟則氣自然生矣. (중략) 孟子命此氣曰浩然, 朱子釋浩然曰盛大流行之貌.” 창계집22, 讀書箚錄, 孟子.이라 한 언급도 덧붙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형성하는 데 인의가 중요함을 제시하였다.

 

 

맹호연의 강조는 무()에 대한 강조

 

이처럼 맹호연은 천군의 나라에 침입한 도적을 퇴치하는데 결정적이고 실제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로 묘사되며 그 주변 사물들까지 의물화되어, 그보다 묘사가 소략한 성성옹에 비해 더욱 부각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맹호연의 용맹함을 강조하여 묘사한 것은 당시 청나라의 무력적 침입으로 무너진 조선 사회에서 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들어간 것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부분에서 당시 유자로서 병자호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정신의 회복의지가 보이는 것이다.

 

한편 앞서 살펴본 성성옹의 묘사는 소략한 대신, 그 행적에는 의미가 부여되는데, 이는 마지막에 성성옹이 잔존하는 도적을 천군이 문교로 교화할 것을 간하는 언행에서 볼 수 있다.

 

 

성성옹이 간하여 말하기를 선왕은 덕을 빛내어 병사를 돌보지 않으셨습니다. 황제께서는 잘 생각하소서. 문덕을 편지 칠십 일이 안 되어, 순임금의 조정에 완고한 묘족을 이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니, 천군이 의인이다.” 하셨다. 드디어 병사를 파하고 가르침을 폈다. 두 계단에서 방패와 깃춤을 추며 순임금의 옛 일을 본받으니 남은 적이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

惺惺翁諫曰, 先王耀德不觀兵, 惟帝念哉, 誕敷文德, 不七旬, 可格虞廷之頑苗矣. 君曰義人也. 遂罷兵而敷敎, 舞干戚于兩階, 效虞帝故事, 餘賊皆來服.

 

 

맹호연이 도적을 완전히 평정하고 나서도 한 구석에서 도적이 또다시 침범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맹호연은 계속해서 로써 다스릴 것을 주장한다浩然命將士超其海透其關, 摧其山塡其壑, 人莫有禦之者, 於是其賊悉平. 其後醜虜變詐百 出. 又屈彊於一隅, 議更擧兵以勦之..

 

 

()보단 선정(善政)으로

 

그러나 위에서처럼 성성옹은 순임금이 행한 방법대로 덕으로 교화를 펼 것을 권해, 같은 충신이지만 다른 방법을 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도적을 없애는 과정에서 무사로서 맹호연의 공격적인 자세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지만, 끝까지 남은 도적을 모두 이러한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었다. 이에, 천군이 성성옹이 권한 교화의 방법을 따르면서, ()의 실천을 보인 성성옹의 행적이 부각되는 것이다.

 

순임금은 완고한 묘족을 복종시킬 때 무력이 아닌 문덕을 펴 교화했다고 한다. 묘족은 남방의 오랑캐인데,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이들 묘족을 정벌하라고 명하자 우임금이 군대를 가지고 30일을 기다렸지만 완악하여 복종하지 않았다. 이에 익이 우임금에게 덕으로 감화시킬 것을 권하자 우임금이 그 말을 듣고 회군하여 군대를 거두자 순임금이 문덕을 펴 방패와 깃으로 춤을 추었는데 이때 회군한 지 70일 만에 묘족이 와서 복종하였다帝曰: “咨禹, 惟時有苗弗率, 汝徂征.” 禹乃會羣后, 誓于師曰: “濟濟有衆, 咸聽朕命. 蠢玆有苗, 昏迷不恭, 侮慢自賢, 反道敗德. 君子在野, 小人在位, 民棄不保, 天降之咎, 肆予以爾衆士, 奉辭罰罪. 爾尙一乃心力, 其克有勳.” 三旬, 苗民逆命. 益贊于禹曰: “惟德動天, 無遠弗届, 滿招損, 謙受益, 時乃天道. 帝初于歷山, 往于田. 日號泣于昊天, 于父母. 負罪引慝, 祗載見瞽瞍, 虁虁齋慄, 瞽亦允若. 至誠感神, 矧玆有苗.” 禹拜昌言曰: “,” 班師振旅. 帝乃誕敷文德, 舞干羽于兩階, 七旬有苗格.” 書經, 虞書 大禹謨..

 

위에서 성성옹이 문덕을 편지 칠십 일이 안 되어, 순임금의 조정에 완고한 묘족을 이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한 것은 이러한 고사를 바탕으로 한 말이다. 천군도 최종적으로 순임금이 쓴 덕화를 따르자, 감화를 받은 도적이 복종하였다. 이처럼 의승기에서는 성성옹이 천군에게 순임금의 행적을 모범삼아 교화를 통해 도적을 복종시킬 것을 간하여 천군이 그에 따름으로써 완전한 갈등의 해소를 이룬다. 이는 천상에서 하강한 천군이 적을 소탕한 뒤 국가가 무사해지자 천상으로 다시 상승하는各恭其職, 國家無事, 上在位一百年, 乘六龍朝帝庭不還.” 김우옹, 동강집16, 天君傳 南冥先生作神明舍圖, 命先生作傳, 蓋先生年少時也. 이전의 천군전과는 다른 방식을 취한 것이다.

 

 

주제는 경()과 의()의 조화다

 

이상 의승기의 인물 형상에서 경()을 대변하는 성성옹의 묘사가 적은 대신 행적을 통해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고, ()를 대변하는 맹호연에 대해서는 그 자체의 형상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사물들에도 의미를 부여하여 의()와 인()을 함께 존중하고 부각한 면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경과 의 중 어느 한 쪽에만 치중하지 않고 둘을 조화롭게 추구한 작품의 주제 의식이 드러난다.

 

의승기는 제목에서도 경과 의의 조화를 꾀하고 있다. ‘의승이라는 말은 원래 태공단서(太公丹書)’, 곧 강태공이 지은 단서에 나오는데, 현재 대대례기(大戴禮記)6 무왕천조제59(武王踐阼第五十九)에 전해진다. 이의 전체 문장은 공경이 태만을 이기면 길하고, 태만이 공경을 이기면 멸망하게 되며, 의가 욕심을 이기면 뜻대로 되고, 욕심이 의를 이기면 흉하게 된다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義勝欲者從, 欲勝義者 凶..”이다순자(荀子)』 「의병(議兵)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발견된다. , ‘에 대한 구절은 똑같지만, ‘에 대한 부분은 로 바뀌어 있다. , 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計勝欲者從, 欲勝計 者凶.(계책이 욕심보다 뛰어나면 잘 될 수 있지만, 욕심이 계책보다 뛰어나면 안 좋은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로 되어 있다. 김학주 역주, 荀子, 을유문화사, 2001, 참고.. 여기서 창계가 의승(義勝)’을 따서 제목으로 삼고 ()’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지은 것이라 보인다.

 

이전에 지어진 동강의 천군전에도 이 대목은 인용되어 나온다. 천군전앞부분에서 건원제가 맏아들을 하토에 내려 보내 관리들을 거느리게 하면서 태사에게 내린 칙령 마지막에 , 공경함이 승하면 길하고, 게으름이 승하면 망한다[嗚呼, 敬勝則吉, 怠勝則滅].’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경()에 대한 부분만 인용하였고, 뒤에 따르는 의()에 대한 부분은 인용하지 않았다. 천군전에 나타난 심성론의 특징을 고구한 이기대(2009)는 이 부분에 대해 경 자체만을 강조한 것이기보다는, 경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경계를 중시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곧 경을 강조한 것은 인간의 심성 수양에 경이 다른 것보다 중요하다는 의미이고, 경의 약화가 인간 심성의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경계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이기대, 心性論의 역사적 전개와 金宇顒天君傳」」, 한국학연구, 30, 고려대 한 국학연구소, 2009, pp.113~114.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출처가 되는 문장에서는 ()’()’가 대()가 되어서 나오는데, 동강은 만을 언급하였기에, 이에 대해 창계가 제목에서뿐만 아니라 본문 속에서도 을 대변하는 성성옹과 함께 를 대변하는 맹호연의 활약을 부각함으로써, ‘에 비해 소홀했던 를 강조하며 조화를 꾀하고자 한 것이라 여겨진다.

 

 

 

 

4. 의의와 결론

 

 

이상으로 의승기의 창작 배경과 주제 의식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본문에서 의승기의 창작 배경인 17세기 중반의 사회 분위기와 문단의 경향을 살피고, 창계의 생애와 학문에서 작품과 관련이 있는 부분을 파악한 후, 작품 속의 공간 설정과 인물들의 형상화, 그리고 제목의 의미 등을 통해 주제의식을 드러낸 면모를 연관하여 살필 수 있었다.

 

 

창계의 생애를 통해 의승기를 읽어야 한다

 

이를 통해 의승기는 지상에 국한한 공간을 설정하여 천군 또한 지상의 존재로서 처음에 덕을 지닌 점만이 소개되었다가 도적의 침입을 겪고 나서야 성성옹의 도움을 받으며 호()와 역수(曆數) 등을 정하는 것으로 나오는 점이 전대 천군소설들과 다른 점임을 밝혔다. 천군이 즉위한 지 3년이 지나 도적이 나타나나, 이때 등장하는 도적에 대해서도 자세한 묘사나 구체적인 이름도 없이 천군의 나라를 해한 행적만 기술되다가 맹호연이 남은 도적을 퇴치하러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면서 환, 명리, 욕심, 분심 등으로 구체화되어 묘사되었다. 도적의 여러 공간 가운데 특히 환해를 제일 요해처로 제시한 것은 17세기 벼슬을 거부하는 사회 분위기와 일생을 통해 벼슬을 꺼려한 창계의 생애와 맞물려 해석될 수 있다고 보았다.

 

 

경과 의의 조화를 중시하다

 

또한 의승기는 경()을 강조한 기존 작품들에 비해 의()를 중시하여 충신인 맹호연(孟浩然)의 활약을 부각해 다룬 점에서 독특한 작품임을 발견하였다. 제목에서도 표방하고 있듯이 의승기는 의를 더욱 강조하며 작품 속에서 맹호연의 활약을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성성옹이 천군에게 순임금의 옛일을 본받아 문교를 통해 남은 도적을 교화하도록 간하는 데서 경을 대변하는 성성옹의 면모 또한 간과하지 않고 있다. 이는 병자호란으로 인해 벼슬을 거부하는 사회 분위기가 지배적이던 17세기 중반의 풍조 속에서 성성옹과 맹호연이 대변하는 경과 의의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당시 오랑캐의 무력적 침입에 의해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며 아울러 정신적 불균형 상태를 조화롭게 만들려는 작가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 보인다. 이러한 데서 당시 사대부의 정신적 회복의지를 찾을 수 있다.

 

 

봉해진 나라를 떠나지 않는 천군의 모습을 그리다

 

맹호연에 의해서도 굴복되지 않는 남은 도적을 성성옹이 천군에게 간하여 교화로써 복종시키는 의승기의 결말 부분은, 전대의 천군전과 비교할 때 차이가 발견된다. 천군전은 천군이 천상에서 인간세계로 하강하였다가 다시 천상으로 상승하는 공간 이동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는데, 이러한 방식은 서두와 결말이 호응되도록 마무리 짓는 방법으로, 신화나 적강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원환적 시간구성법이라는 점이강엽, 토의문학의 전통과 우리소설, 태학사, 1997, pp.221~222. , 천군전의 방식 은 사람의 몸에 해지기 이전의 원초적인 모습으로 회귀함으로써 양끝을 맞추는 방법을 쓴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천군전心學에 해당하는 사실들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그 설명이 끝나면 원상으로 회복시키는 사상적 지향이 강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에서 비현실적이며 비소설적김광순, 앞의 책, 1980, p.109.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천군전이후 작품들에서는 원환적인 시간관(時間觀)이 나타나지 않고 한 번 봉()해진 나라를 떠나지 않는 점에서 이런 속성에서 벗어났다이강엽, 앞의 책, 1997, p.222.고 평해지는데, 이러한 점을 의승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동시대에 지어진 천군연의에서 도적을 귀양 보내거나, 후대 천군본기에서는 천군이 의원의 말을 좇아 자강(自强)해가고, 천군실록에서 도적을 물리친 후 마음의 평정 상태를 누리는 등, 갈등 해소 방식이 더욱 인간적인 방식으로 발전되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다만 본고에서 의승기창작과 관련한 배경만을 다루면서 창계의 문학과 학문전반에 관한 특징을 자세히 살피지 못한 한계가 있다. 17세기 변화한 문단과 학문 풍토 속에서 창계의 문학과 학문이 가지는 의의가 분명히 있을 것이므로, 이는 앞으로 창계의 문집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함께 관련 문헌들의 조사를 통해 추후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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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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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study on subject consciousness of

Ui-Seung-Gi(義勝記)

 

Lee Yeon-Soon

 

 

This paper looked at the subject of consciousness exposed to Ui- Seung-Gi(1664 works) written by Chang-Gyega Lim-Young(滄溪 林泳, 1649~1696). The first, I examined the creative background of the mid-17th century social and cultural backgrounds and then the life and learning of Chang-Gyega. The second, I analyzed the text of Ui-Seung-Giand clari- fied the theme of Ui-Seung-Giin two ways.

As a result, I identified that Ui-Seung-Giof Chang-Gyega is restoring self-esteem destroyed by barbarians invading and reveals the spiritual resto- ration by persuating harmonious state of mental imbalance.

 

key words : subject consciousness, Ui-Seung-Gi(義勝記), Chang-Gyega(滄 溪), Lim-Young(林泳), the mid-17th century, the spiritual res- toration.

 

 

 

 

인용

목차 /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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