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권도(權道)의 경지
子曰: “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者, 言其可與共爲此事也. 程子曰: “可與共學, 知所以求之也.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適道, 知所往也. 可與立者, 篤志固執而不變也.
可與立, 未可與權.”
權, 稱錘也, 所以稱物而知輕重者也. 可與權, 謂能權輕重, 使合義也.”
○ 楊氏曰: “知爲己, 則可與共學矣. 學足以明善, 然後可與適道. 信道篤, 然後可與立. 知時措之宜, 然後可與權.”
洪氏曰: “『易』九卦, 終於巽以行權. 權者, 聖人之大用. 未能立而言權, 猶人未能立而欲行, 鮮不仆矣.”
程子曰: “漢儒以反經合道爲權, 故有權變權術之論, 皆非也. 權只是經也. 自漢以下, 無人識權字.”
愚按: 先儒誤以此章連下文偏其反而爲一章. 故有反經合道之說. 程子非之, 是矣. 然以孟子嫂溺援之以手之義推之, 則權與經亦當有辨.
해석
子曰: “可與共學, 未可與適道;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함께 배울 수는 있지만 함께 도로 나갈 수는 없고
可與者, 言其可與共爲此事也.
가여(可與)는 함께 이 일을 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程子曰: “可與共學, 知所以求之也.
정이천이 말했다. “가여공학(可與共學)은 구할 것을 아는 것이다.
可與適道, 未可與立;
함께 도로 나갈 수는 있지만 함께 설 수는 없고
可與適道, 知所往也.
가여적도(可與適道)는 갈 곳을 아는 것이다.
可與立者, 篤志固執而不變也.
가여립자(可與立者)는 뜻을 독실히 고집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다.
可與立, 未可與權.”
함께 설 수는 있지만 함께 권도(權道)를 할 수는 없다.”
權, 稱錘也, 所以稱物而知輕重者也.
권(權)은 저울이다. 사물을 저울질하여 경중을 아는 것이다.
可與權, 謂能權輕重, 使合義也.”
가여권(可與權)은 경중을 재어 의에 합하도록 한다는 말이다.”
○ 楊氏曰: “知爲己, 則可與共學矣.
양시(楊時)가 말했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알면 함께 배울 수 있다.
學足以明善, 然後可與適道.
배움이 선을 밝히기 충분한 후에 함께 도에 나갈 수 있다.
信道篤, 然後可與立.
도를 믿음이 독실한 후에 함께 설 수 있다.
知時措之宜, 然後可與權.”
때에 따라 조치함이 마땅함을 안 후에 함께 권도를 할 수 있다.
洪氏曰:
홍흥조(洪興祖)가 말했다.
“『易』九卦, 終於巽以行權.
“『주역』의 아홉 개의 궤가 ‘손(巽)으로 권도를 행한다’로 끝냈으니,
權者, 聖人之大用.
권도는 성인의 큰 씀이다.
未能立而言權, 猶人未能立而欲行,
설 수 없는데 권도를 말하면 사람이 서지 못하면서 걸으려 하는 것과 같아
鮮不仆矣.”
넘어지지 않기가 드물다.”
程子曰: “漢儒以反經合道爲權,
정이천이 말했다. “한나라 선비들이 상도(常道)를 뒤집어 도에 합치되는 것을 권도(權道)라 했다.
故有權變權術之論, 皆非也.
그러므로 권변이나 권모술수의 논의가 있지만 모두 잘못된 것이다.
權只是經也. 自漢以下,
권도는 다만 상도(常道)일 뿐이니 한나라 이후로 사람으로
無人識權字.”
‘권(權)’자를 아는 이가 없다.”
愚按: 先儒誤以此章連下文偏其反而爲一章.
내가 생각하기로 선유(先儒)들은 오인하여 이 장을 아래장의 ‘편기반(偏其反)’에 연결지어 한 장으로 삼았다.
故有反經合道之說.
이런 이유 때문에 ‘반경(反經)’과 ‘합도(合道)’의 말이 있게 된 것이다.
程子非之, 是矣.
정자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했으니 옳다.
然以孟子嫂溺援之以手之義推之,
그러나 맹자가 ‘형수님이 물에 빠졌다면 손으로 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그것을 확장한다면
則權與經亦當有辨.
권도와 상도는 또한 마땅히 분별할 수 있다.
○ 공학(共學)이란 말의 출전이 ‘논어’ ‘자한(子罕)’편의 이 장(章)이다. 공자는 배움에서 실천에 이르는 단계를 학(學), 적도(適道), 립(立), 권(權)의 넷으로 설정하고 실천의 융통성을 강조한 권(權)을 궁극에 두었다.
여(與)는 ‘∼와 함께’인데 ‘다른 어떤 사람’이라는 목적어가 생략됐다. 전체 글은 가(可)와 미가(未可)를 교대로 사용해서 ‘∼은 할 수 있어도 ∼은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차츰 고조시켜 나갔다. 적도(適道)의 적(適)은 가다, 나아가다이다. 립(立)은 수립(樹立)으로, 몸을 세워 흔들림이 없고 신념이 굳음을 말한다. 권(權)은 저울의 추인 분동(分銅)이다. 무게에 따라 추를 움직여 적합한 위치를 얻는 데서 사물과 사실을 판정하여 적합한 상태를 얻음을 뜻하게 됐다.
정이(程頤)는 경중(輕重)을 재어 의(義)에 부합시키는 일이라 풀이했고 정약용은 평형(平衡)을 이루어 중도(中道)를 얻는 일이라 풀이했다. 한문문헌에서 권(權)은 흔히 상도(常道)를 가리키는 경(經)과 짝을 이룬다. 한나라 학자들은 경(經)과 어긋나더라도 도리(道理)에 맞으면 된다는 반경합도(反經合道)를 주장했다. 또 어떤 학자들은 경(經)을 중용(中庸), 권(權)을 중용의 반대로 보았다. 하지만 정약용은 권(權)이 곧 중용(中庸)이기에 경(經)에서 벗어난 술수(術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노(魯)나라 선공(宣公)의 딸 백희(伯姬)는 송나라 공공(共公)에게 시집갔다가 10년 만에 홀로 됐다. 궁궐에 불이 났을 때 관리가 피하라고 했으나 부인은 한밤에 보모 없이 집을 나설 수 없다고 고집해서 결국 불속에서 죽었다. 교고(膠固)하여 중도(中道)를 잃은 예이다. 매사(每事)에 평형(平衡)을 이루어나가는 일, 이 지극히 어려운 일을 우리는 스스로 해나가야 한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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