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권도(權道)의 경지
9-29.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더불어 함께 배울 수는 있으나, 더불어 함께 도(道)로 나아갈 수는 없다. 더불어 함께 도로 나아갈 수는 있으나, 더불어 함께 우뚝설 수는 없다. 더불어 함께 우뚝 설 수는 있으나, 더불어 함께 권(權)의 경지에 이를 수는 없다.” 9-29. 子曰: “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 |
인간의 호학의 경지의 상달(上達)의 차서를 말한 것이다.
4 | 권(權) | 자유로운 상황적 실천(Free Situational Applic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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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입(立) | 주관의 정립(Establishment of Thought Syste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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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도(道) | 바른 방향을 잡음(Right Direc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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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학(學) | 기초의 습득(Basic Learning) |
‘귄(權)’이란 ‘경(經)’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상황적인 적용을 말하는 것이다. 자유자재로운 응용이며 대처이며 실천이며 상황의 타개이다. ‘권(權)’이라는 개념 역시 ‘서자여사부(逝者如斯夫)’적 세계관의 논리적 귀결이다. 우주 전체가 순간적으로 역동적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진리가 고정적일 수 없다. 따라서 경상적(經常的)인 진리는 입(立)의 단계에 해당되지만 인간은 입(立)의 단계를 또 다시 초월하여 권(權)의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아니 된다. 권이란 막대저울에서 추를 움직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이 올라오든지간에 추를 기민하게 움직여서 그 밸런스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동방사상은 이데아나 천국의 진리를 말하지 아니 하고, 항상 권(權)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진리에서 항변성(恒變性, changeability), 상황성(situationality), 동적 평형성(dynamic equilibrium)을 배제할 수 없다.
‘가여(可與)’라는 것은 더불어 함께 이 일을 하는 것이다. 정이천이 말하였다: “‘가여공학(可與共學)’이란 더불어 함께 추구해나가는 것을 아는 것이다. 가여적도(可與適道)란 가야할 방향을 아는 것이다. ‘가여립(可與立)’이란 그 뜻을 돈독히 하여 어떤 주관을 확고히 잡고 함부로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권(權)’이란 저울의 추이니, 그것으로써 물건을 달아 그 경중을 아는 것이다. ‘가여권(可與權)’이라는 것은 경중을 저울질하여 의(義)에 합하도록 하는 것이다.”
可與者, 言其可與共爲此事也. 程子曰: “可與共學, 知所以求之也. 可與適道, 知所往也. 可與立者, 篤志固執而不變也. 權, 稱錘也, 所以稱物而知輕重者也. 可與權, 謂能權輕重, 使合義也.”
○ 양중립이 말하였다: “자기를 계발하기 위한 학문을 할 줄 안다면 가히 더불어 함께 배울 수 있다. 배워서 족히 선(善)을 밝힌 후에 도(道)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도(道)를 신험하는 것이 돈독하면, 그 후에 더불어 함께 설 수가 있다[可與立]. 그리고 상황에 따라 마땅한 조치를 취할 줄 알면 그 후에 더불어 함께 권(權)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 楊氏曰: “知爲己, 則可與共學矣. 學足以明善, 然後可與適道. 信道篤, 然後可與立. 知時措之宜, 然後可與權.”
홍홍조가 말하였다: “『주역(周易)』 「계사」 제7장에, 64괘 중에서 특별히 우환(憂患)을 방지하는 도로써 아홉 괘를 집어 말하였는데【리(履)ㆍ겸(謙)ㆍ복(復)ㆍ항(恆)ㆍ손(損)ㆍ익(益)ㆍ곤(困)ㆍ정(井)ㆍ손(巽)】 그 마지막을 ‘손(巽)으로써 권(權)을 행한다’는 말로써 끝내었다. ‘권(權)’이라는 것은 성인의 대용(大用)이다. 아직 입(立)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자가 권(權)을 말한다면 걸음마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 뛰려는 것과도 같아 자빠지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洪氏曰: “『易』九卦, 終於巽以行權. 權者, 聖人之大用. 未能立而言權, 猶人未能立而欲行, 鮮不仆矣.”
정이천이 말하였다: “한유(漢儒)들은 경(經)에 반(反)하여 오히려 도(道)에 합(合)하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권변(權變)이니 권술(權術)이니 하는 따위의 논리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엉터리다. 권(權)이라는 것이 경(經) 그 자체일 뿐이요, 이 양자가 대립되거나 분리될 수가 없다. 한 대 이래로 이 권(權)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자가 없었다. 애석하다.”
程子曰: “漢儒以反經合道爲權, 故有權變權術之論, 皆非也. 權只是經也. 自漢以下, 無人識權字.”
여기 정이천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도학자이기 때문에 임시 변통을 싫어하고 원칙과 불변의 진리 같은 것을 흠모하는 그 무엇이 마음에 있다. 그래서 가치서열상 경(經) 위에 권(權)이 올라가는 것이 싫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학은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권력(權力)이니, 권모(權謀)니, 권세(權勢)니, 권병(權柄)이니, 권리(權利)니 하는 말이 모두 이 ‘권(權)’의 개념에서 파생된 것으로, 모두 임기응변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정이천은 ‘권(權)’을 어디까지나 경(經), 즉 항상된 원칙 속에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정이천이 제시하는 문제도 분명히 고려해야 할 측면이지만 권(權)의 고차원적 의미는 그 나름대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권(權)은 동방적 가치와 서방적 가치가 갈리는 하나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국화된 대승 불학은 방편반야(方便般若)를 강하게 말하는 것이다.
나 주희는 말한다. 선유(先儒)들이 이 장을 오해하여, 다음 장의 ‘편기반(偏其反)’이라는 구문을 권(權)의 주제와 연결시켜 한 장으로 만들었다(고주의 입장). 그래서 ‘경에 반하여 도에 합한다’는 어거지 설이 생겨났는데 정자는 그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정자(이천)의 입장이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맹자』 「이루(離婁)」 하17에 보면, 남녀간에 육체적 접촉을 안 하는 것이 예이긴 하나, 제수씨가 물에 빠졌는데 손을 잡아 구해내는 것은 예의 문제를 넘어서는 당연한 권(權)의 문제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권(權)과 경(經)은 또한 당연히 구분이 있어야 한다.
愚按: 先儒誤以此章連下文偏其反而爲一章. 故有反經合道之說. 程子非之, 是矣. 然以孟子嫂溺援之以手之義推之, 則權與經亦當有辨.
주희는 정이천의 말을 수긍하는 척하면서 실상은 권(權)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여튼 권(權)과 경(經)의 문제에 관하여 충분한 토의가 되었으리라고 본다. 권과 경을 인생에서 여하히 사용할 것인가는 『논어』를 읽는 사람들 각자의 몫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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