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주체의 혁명
천국(나라)은 천당이 아니요, 주체의 개벽이다
❝예수는 나라(천국)를 선포한 이 땅의 지혜였다. 예수가 선포한 나라를 우리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만드는 최대의 방해꾼들은 바로 우리를 바르게 인도한다고 말하는 자들이다. 예수는 모든 조직과 전도주의를 거부한다. 우리의 인도자들은 항상 말한다. 천국은 저 하늘에 있도다! 그렇게 말하는 모든 인도자들은 사기꾼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본인의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제3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를 이끈다 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보라! 나라(천국)가 하늘에 있도다’ 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2그들이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라는 바다 속에 있도다’ 한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3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4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희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5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희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
1Jesus said, “If those who lead you say to you, ‘Look, the kingdom is in heaven,’ then the birds of heaven will precede you. 2If they say to you, ‘It is in the sea,’ then the fish will precede you. 3Rather, the kingdom is inside you and it is outside you.
4When you know yourselves, then you will be known, and you will understand that you are children of the living father. But if you do not know yourselves, then you dwell in poverty, and it is you who are that poverty.”
도마복음서는 어디까지나 로기온의 무작위적 컬렉션(random collection)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진실로 놀라운 구성력을 과시하고 있다. 제2장에서 천국은 인간의 주체성과 관련하여 간접적으로 암시되었지만 명료하게 그 언어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3장에서는 ‘나라’ 즉 ‘천국’이라는 표현이 과감하게 드러난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상식을 전도시키는, 화려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메타포로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3장에서 드러난 ‘나라’의 테마는 맨 마지막에서 두번째 장 113장에 다시 명료하게 나타난다. 그러니까 제3장은 전체 주제를 나타내는 장(topic chapter)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제3장에서 제113장까지 일관되게 ‘나라’의 현실적 임재성(臨在性)이 보이지 않게 깔려있는 것이다.
제2장의 주제는 우리 ‘주체의 개벽’이었다. ‘개벽(開闢)’이란 말은 우리나라 동학(東學)에서 주된 가르침의 술어로서 활용되었지만, 실제로 그것은 한대(漢代)의 역학(易學)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천지, 즉 하늘[天]과 땅[地]의 새로운 열림(開闢)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세기의 헬라화된 유대인들에게도 천국의 도래, 새로운 천지의 개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는 지혜문학전통에 있어서는 정치적인 새 세상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실존의 주체적 성찰의 문제로서 내면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면화 과정의 심연에서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 그리고 그의 사상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분명 지혜로운 스승이었다. 그의 지혜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든 말든, 그것은 초기교단의 정책에 속하는 문제이다. 도마복음서는 그러한 기독론적ㆍ종말론적 초대교회의 케리그마 이전의 사태이다. 본장은 첫머리에서부터 이미 그런 교단의 조직에 대한 강한 부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교단조직에 대한 후대의 반발로 보아 이 문헌의 성립을 후대로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나타나는 ‘조직의 경계’는 조직이 형성되어 가려고 하는 매우 초기의 조짐에 대한 일갈인 것이다.
‘너희를 인도한다고 하는 자들’은 교단의 조직을 장악하는 자들이다. 항상 타인을 인도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인간의 구원에 가장 방해를 주는 사람들이다. 집사이든 장로이든 목사이든 신부이든, 이들이야말로 조직을 유지하기 위하여 헌신해야 하는 사람들이요, 인간의 구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물론 예수의 시대에는 집사도 없었고 장로도 없었고 목사도 없었고 신부도 없었다. 따라서 여기 살아있는 예수의 말을 이러한 조직의 ‘꾼’들에 대한 이야기로서 해설할 수는 없다. 단지 예수운동의 시대에도 ‘남을 이끈다고 자처하는 자들’은 항상 타인을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어갈 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보라! 나라가 하늘에 있도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길거리 전도사들은 이렇게 외친다: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저 하늘에 있는 천당에 갈 수 있습니다.”
▲ 민수기 20장에 보면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나오게 하는 장면이 있다. 그 생명수가 콸콸 쏟아지는 바위가 바로 이 근처에 지금도 있다(Ain Musa, 모세의 샘). 그 물이 옛날에는 이 협곡을 가득 메우고 흘렀다. 그래서 나바태안왕국의 사람들이 댐을 막고 물길을 돌려 이 협곡지역을 거주지로 만들었다. 대신 절벽을 파 수로를 만들어 식수를 공급하였다. 나바태안왕국 문명의 높은 수준을 말해준다.
그러나 천국은 천당(天堂)이 아니다. 천국은 저 푸른 하늘에 있는 공중누각의 당호(堂號)가 아니다. 천국은 ‘토포스(topos)’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공간개념이 아니며, 지역개념이 아닌 것이다. 천국은 장소적 실체개념이 아닌 것이다. 예수는 천국을 말했을 뿐, 천당을 말한 적이 없다. 천국이란 하나님의 나라이다. ‘나라’는 ‘지배(Reign)’라는 추상적 질서를 뜻하며 공간적 왕국을 지시하지 않는다. 왕국(Kingdom)이나 나라라는 문자상의 개념은 우리의 상상력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문학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 도마복음의 기술방식에 있어서 현저한 사실은 전혀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이라는 말도 거의 쓰지 않는다. 도마의 예수에게 있어서는 ‘하늘’이니 ‘하나님’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이원론적 분별의 대상이며 부정적 함의를 지니는 것이다. 그래서 도마의 예수가 쓰는 표현은 ‘나라’이거나 ‘아버지의 나라(the Kingdom of the father)’이다. 역사적 예수는 전통적 유대인의 관념속의 ‘하나님’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아버지’였을 뿐이다. ‘아버지’는 ‘하늘’이나 ‘하나님’처럼 나로부터 객화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나로부터 객화되지 않는 일체(一體)이며 동시에 나의 현존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다.
예수는 ‘나라’를 아버지의 질서가 지배하는 어떤 ‘상태’로서 해석했다. 그것은 제2장에서는 ‘주체의 개벽’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주체는 집단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개인(individual)이다. 나 개별적 존재의 주체의 개벽이다. 주체의 개벽이란 주체의 혁명이다. 그것은 정치적 전복과도 같은 일시적인 혁명이 아니라 영원한 의식의 혁명이다. 그래서 예수는 ‘끊임없는 추구’를 말했다. 도중에서 포기함이 없는 추구를 말했던 것이다. 추구와 발견, 번민과 경이, 지배와 휴식, 이 세 쌍의 과정이 주체의 개벽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심오한 개벽사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타인을 이끈다고 하는 자들, 타인을 구원하겠다고 떠벌이는 자들이 무어라 말하는가?
‘보라! 나라가 저 푸른 하늘에 있도다!’ 이에 예수는 무어라 대답하는가? “타인을 인도한다고 사기치지 말라! 함부로 구라치지 말라! 나라가 저 하늘에 있다고 한다면, 그 따위 천국일랑 저 하늘의 새가 그대들보다 더 먼저 도달할 것이니라.”
다음 구절의 말씀은 공간적으로 하늘과 대비되어 ‘바다속’으로 되어있다. 옥시린쿠스파편은 하늘의 대척점으로 ‘땅 속에(under the earth)’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천국이 저 바다속에, 저 땅속에 있다고 한다면 바다의 물고기가 우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궁금치 아니한가?
▲ 부시정권이 지구상에서 ‘악의 축’으로서 규정된 두 나라가 있다. 시리아와 북한!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 매우 친근하다. 30년 절대권력을 휘둔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를 계승한 바시르 알 아사드(Bashir al-Assad) 정권의 성격도 북한정권과 비슷하다. 시리아에서 ‘코리안’의 인기는 좋다. 물론 북한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남한에서 왔다고 하면 시리아 사람들은 나에게 이런 충고를 한다: “도대체 왜 남·북한이 갈라져 싸우는지 모르겠군, 대포동미사일을 쏠 줄 아는 북한의 깡다구와 남한의 경제력을 합치면 짱일텐데.” 여기는 아브라함이 살았던 하란지역이다. 땡볕이 쏟아지는 척박한 사막에 토담집 몇 채씩 짓고 옹기종기 산다. 내가 동네를 지나는데 사람들이 날 불러 생명의 물을 주었다. 이들이야말로 천국이 ‘네 밖에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인에게 적대적이라는 가이드의 경고와는 달리 이들은 너무 친절했고 개방적이었다. 우리가 시리아를 사랑할 수 있다면 당연히 북한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은 최근 북한에 대한 적성국가교역법을 종료시켰다. 그리고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뺄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명박정권은 의미없는 이데올로기 덫에 걸려 남북문제의 이니시어티브를 다 상실했다. 한국의 경제소생은 남북문제의 진전없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곳 아브라함의 고향에서 통감했다.
안과 밖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네 밖에 있다
❝도마복음서가 몇백 년 전에만 발견되었더라도 그것은 이단의 불경한 서물로 몰려 불태워졌을 것이다. 기독교 정통주의의 역사는 은폐의 역사였다. 그러나 양식사학으로부터, 나그함마디문서의 발견으로 촉발된 현대신학에 이르는 찬란한 20세기 신학의 성과는 기독교를 2천 년 동안 한번도 경험할 수 없었던 본질적 해부의 시험대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기독교는 이미 되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제3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를 이끈다 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보라! 나라(천국)가 하늘에 있도다’ 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2그들이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라는 바다 속에 있도다’ 한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3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4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희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5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희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
1Jesus said, “If those who lead you say to you, ‘Look, the kingdom is in heaven,’ then the birds of heaven will precede you. 2If they say to you, ‘It is in the sea,’ then the fish will precede you. 3Rather, the kingdom is inside you and it is outside you.
4When you know yourselves, then you will be known, and you will understand that you are children of the living father. 5But if you do not know yourselves, then you dwell in poverty, and it is you who are that poverty.”
천국이 하늘에 있다 하면 새들이 우리보다 먼저 가고, 천국이 땅속에 있다 하면 물고기들이 우리보다 먼저 가리라 하는 이야기는 판에 박힌 기독교 교리 만을 신봉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사실 이런 얘기는 도마복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4복음서에 이미 들어있다. 도마복음서는 생동하는 예수의 말을 생생하게 전했을 뿐이다. 누가복음 17장을 펼쳐보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그리고 ‘하늘 위, 바다속’ 운운하는 수사법도 성서에 이미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다. 지혜문학인 욥기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산들을 뿌리째 파헤쳐도 지혜를 찾을 길 없고, 물속의 용도 이 같이 외친다. ‘이 속에는 없다.’ 바다도 부르짖는다. ‘나에게도 없다’ (욥 28:9~14).
하나님의 계명에 관해서도 모세의 말씀은 이러하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하늘에 올라 가서 그 법을 내려다 주지 않으려나?’라고 말하지 말라. 바다 건너 저쪽에 있는 것도 아니다. ‘누가 이 바다를 건너 가서 그 법을 가져다 주지 않으려나?’라고 말하지도 말라. 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신 30:11~14)
사도 바울도 믿음의 말씀에 관하여 우리에게 이와 같이 증언한다.
믿음을 통해서 얻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누가 저 높은 하늘까지 올라갈까 하고 속으로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기 위해서 하늘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누가 저 깊은 땅속까지 내려갈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죽음의 세계에서 모셔올리기 위하여 땅속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롬 10:6~7, 공동번역, 이후 ‘공역’으로 略, 비슷한 표현들이 바룩서 3:29~32, 35~37, 시라크서 1:1~3에도 있다).
신실하다 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도마복음서와 같은 정경 외의 성서들을 성서로 간주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소위 ‘외경(外經)’에 대한 편견이 아니다. ‘정경(正經)’에 대한 곡해요 왜곡이요 무지인 것이다. 도마복음서의 출현이 정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경이라고 믿고 있는 문헌들의 이해를 풍요롭게 만들고 맥락적으로 더 심오하게 만든다.
가장 결정적인 사태는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이 신약성서 27서조차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일요일날 교회에 나가 들은 성서와 무관한 목사들의 설교로써 자기들의 신앙의 기준을 삼으며, 외부로부터 잡다하게 주입된,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과 말일 뿐인 그러한 가치관을 잣대로 하여 자기를 크리스챤으로 규정하면서, 비록 교회는 나가지 않지만 성서를 깊게 상고하는 경건한 수행자들을 보고 크리스챤이냐고 묻고 따지고 야단을 치는 것이다. 유대교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은 있으나, 신약에 주일을 지키라는 말씀은 없다. 큐자료가설로부터 시작하여 양식사학운동, 역사적 예수의 탐구, 나그함마디 성서와 쿰란 사해문서의 발견, 영지주의의 재해석, 예수세미나운동 등등 20세기 한 세기 동안의 찬란한 신학논쟁사는 2천 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해부하지 못했던 금단의 영역에 걸쳐 있던 금줄을 낱낱이 끊어놓았다는 기적 같은 사실을 이제 우리 조선땅의 기독교인 사람들도 정확히 인지해야 한다.
이미 기독교는 20세기 현대신학의 탐구를 통하여 다시 넘을 수 없는 다리를 넘었다. 프린스턴대학 석좌교수 엘레인 페이겔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도마복음서를 포함한 나그함마디 성서들이 1천 년 전에 발견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이 소중한 성문서들은 이단서로 몰려 확실하게 불태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절묘하게도 이 문헌들은 땅속에서 잠자고 있다가 20세기 중엽에나 빛을 보았다. 바로 인간세의 문화적 진보가 이 문헌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관하여 참신한 시각을 제공할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시절에 발굴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성서들을 다른 눈을 가지고 읽는다. 광기나 불경으로서 내치는 것이 아니라 1세기의 신실한 기독교도들이 경험한 방식대로 읽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여태까지 알고 있었던 정통기독교 전통에 대한 강력한 얼터너티브가 아닐 수 없다.”(The Gnostic Gospels 154-5).
누가복음의 예수의 말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사람들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이해가 쉽다. 즉 세속적 인도자들이 천국을 외재화시키는 데 반하여 철저한 내재화, 내면화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은 ‘내 맘 속에 내 몸속에’ 있을 뿐이다.
▲ 기름 값이 치솟는 한국의 실정에서 시리아는 참 부러운 나라다. 휘발유 1리터 당 70원, 한국 휘발유 값의 27분의 1. 휘발유 값이 싸니까 주변 터키에서도 운전사들이 트럭을 끌고 와서 기름을 넣는다. 시설이 빈곤해서 드럼통으로 붓는다. 주유소는 만원일 수 밖에. 그런데도 코리안인 나에게 먼저 넣게 해주었다. 그리고 자기 집에 가서 밥 같이 먹자고 서로 끌었다. 못사는 것 같지만 풍요로운 삶을 이들은 즐기고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우리의 이러한 상념을 여지없이 깨버리고 만다. ‘진실로,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네 밖에 있다.’ 언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외재화를 반대하여 내재화를 주장했는데 어찌하여 또다시 ‘네 밖에’를 동시에 말하는가? 천국은 내 밖에 있는가? 또다시 저 푸른 하늘 위에 있단 말인가?
도마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일상적 가치관은 또다시 전도된다. 그것은 우리 사고의 근원적 전환을 의미한다. 천국이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줄 안다면 동시에 천국이 바로 내 밖에 있다는 것도 깨달을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우리 동방사상에서는 전관(全觀)이라고 부른다. 일면의 상대적 논리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相對)의 양단(兩端)을 동시에 긍정하는 것이다. 천국은 물론 내 안에 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동시에 내 밖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천국운동은 식탁교제운동이었고, 소외와 빈곤의 극복이었고, 나눔이었고, 율법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이것은 나 밖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천국인 것이다. 천국은 내 ‘안의’ 관념이 아니라, 내 ‘밖의’ 실천이기도 한 것이다.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동시에 네 밖에 있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근원적으로 안과 밖이 없다(Th.22), 안과 밖이 근원적 융합되는 곳에 하나된 자로서의 ‘나’라는 아이덴티티가 엄존하는 것이다.
▲ 유프라테스강과 지중해 사이에 있는 시리아 사막을 하염없이 달리다 보면 사막 한가운데 거대한 오아시스 도시를 만나는데 석조건축들의 장관에 압도되고 만다. AD 2·3세기 때만 해도 4만 명의 거주민이 있었다니 참으로 놀랍다. 팔미라(Palmyra, Tadmor 고대 셈족 말)는 BC 2000년경부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를 연결하는 문명권의 요충지였다. 역사적으로 앗시리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곳을 왕조의 한 중심지로 삼았다. 로마제국이 남쪽의 나바태안왕국을 멸망시키면서(AD 106년) 중국·인도와 유럽을 연결하는 카라반루트가 이곳 중심으로 개발되었고 따라서 상인들의 자치구가 형성되었다. 하드리아누스황제도 AD 130년 이곳을 방문하고 ‘자유도시’임을 선포했다. 3세기 중엽에는 이 지역의 귀족 오다이나트(Odainat)가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고 AD 256년에는 로마의 속국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267년 그가 살해되자 그의 둘째 부인 제노비아(Zenobia)는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독립을 선포하고, 자신에게 아우구스타의 칭호를 부여하고 로마군대와 끝까지 타협 없이 싸웠다. 오늘날 일본이 독도문제로 또다시 우리민족을 모독하고 있다. 제노비아의 주체적 응전을 생각해본다. 1954년 당시 변영태 외무부장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이 독도를 탈취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예수
너 자신을 알라
❝예수와 그리스도는 별개의 관념이다. 그러나 초기기독교의 역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당대의 민중들에게 설득시켜 간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드는 과정에는 반드시 부활이라는 신화가 개입된다. 그 신화는 기독교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죄의 대속(代贖)이라는 의미를 반드시 지녀야 했다. 이런 초기 그리스도 운동의 대표적인 리더가 바울이었다. 그러나 도마복음서는 동시대에 이미 그러한 그리스도운동과는 전혀 종류가 다른, 순결한 예수운동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다.❞
제3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를 이끈다 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보라! 나라(천국)가 하늘에 있도다’ 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2그들이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라는 바다 속에 있도다’ 한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3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4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희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5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희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
1Jesus said, “If those who lead you say to you, ‘Look, the kingdom is in heaven,’ then the birds of heaven will precede you. 2If they say to you, ‘It is in the sea,’ then the fish will precede you. 3Rather, the kingdom is inside you and it is outside you.
4When you know yourselves, then you will be known, and you will understand that you are children of the living father. 5But if you do not know yourselves, then you dwell in poverty, and it is you who are that poverty.”
한자문명권의 대표적인 고전 중의 하나인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의 첫 장을 펼치면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무명(無名)은 천지의 시작이요, 유명(有名)은 만물의 어미다[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그리고 또 말한다: “무욕(無欲)하면 묘(妙)의 세계를 보고, 유욕(有欲)하면 교(徼: 형체화되는 가장자리)의 세계를 본다[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 그런데 그 다음에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 둘은 실상 같은 것이다. 그 같은 것을 일컬어 현(玄)하다 한다[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이것은 과연 무슨 이야기일까?
유명과 무명은 분명 명(名: 이름, 분별)이 있음과 없음으로 구별되는 세계며, 유욕과 무욕은 분명 욕(欲: 욕심, 집착)이 있음과 없음으로 구별되는 세계이다. 그러나 노자는 이 양자를 완전히 분리해서 대립적으로 보는 것을 경계한다. 그것을 대립적으로 보는 우리의 인식세계가 더 큰 죄악을 낳는다는 것이다. 결국 무명과 유명이 동일한 하나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하늘과 땅, 천국과 속세, 하나님과 인간, 빛과 어둠, 결국 이것이 하나가 아닐까? 도마복음은 놀랍게도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이 이러한 같음[同]의 세계, 그래서 현묘한 현(玄)의 세계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설파한다. 무욕(無欲)의 세계는 빛이다. 유욕(有欲)의 세계는 어둠이다. 그러나 빛과 어둠은 결국 다 우리 몸의 세계라는 것이다. 같음의 현묘한 세계를 전관(全觀)하라! 놀라웁게도 이것이 살아있는 예수가 하는 말이다.
‘빛과 어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이 사라지면 곧 어둠이니라’(도마복음 제24장), ‘나라는 존재가 온전한 무분별상태에 있으면 곧 빛으로 가득차고, 나라는 존재가 분별되고 분열되면 곧 어둠으로 가득차리라’(도마복음 제61장).
여기 요한복음의 로고스기독론적 2원론은 찾아볼 길이 없다. 천국에 대해서도 우리는 현묘한 전관의 시각을 잃지 말아야 한다.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동시에 네 밖에 있다. 무욕(無欲)의 천국을 네 안에 이루었다면 동시에 너는 유욕(有欲)의 천국을 네 밖에 이루어야 한다. 예수의 천국운동은 주체의 변혁과 동시에 사회의 변혁이었다. 내면의 개벽인 동시에 인간관계의 개벽이었다.
그 전관(全觀)의 오메가 포인트는 무엇인가?: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 때만이 너는 천국을 네 안에, 네 밖에 성취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친숙한 언어를 접하게 된다. ‘너 자신을 알라!(gnōthi seauton)’,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좌우명이자, 델피 아폴로신전의 현관의 기둥에 새겨져 있는 희랍어 명문(銘文)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신탁의 명문을 인간의 자기탐구로 심화시켰다. 그것은 결국 ‘무지의 자각’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모든 문답의 변증법이 도달하고자 했던 구극적 목표가 바로 이 무지의 자각이었다. 보리수 아래서 명상하던 싯달타의 연기적 사유의 궁극도 ‘무지의 자각’이었고, ‘무명(無明), avidyā의 발견’이었다.
예수는 물론 헬레니즘의 보편주의적 문화권에서 살면서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 예수에게 발견되는 견유학파적 측면은 본시 소크라테스의 삶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놀라운 자제력과 극기력의 소유자였다. 소크라테스는 평생을 맨발로 다녔으며 항상 홑겹의 낡은 누더기만 걸치고 살았다. 더위, 추위, 굶주림, 목마름에 무관심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괴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군복무 생활(펠레폰네소스 전쟁 종군)이 그의 친구의 입을 통해 『향연』에 자세히 묘사되고 있는데, 그는 행군할 때 혹독한 추위 속에서 맨발로 걸으면서도 군화를 신은 병정들보다 훨씬 앞장서서 씩씩하게 걸어갔다는 것이다. 병사들은 그가 자기들을 깔보는 것이 아닌가 오해하고 그를 쏘아보곤 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인내심과 집중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동구 밖 느티나무에서 사색에 잠기면 몇날 며칠을 부동자세로 서있었다. 강직증성 황홀경(cataleptic trances)에 빠지곤 했던 것이다. 그는 평소 술은 마시지 않았으나, 마시면 주량이 누구보다 많았고, 아무도 그가 취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여자의 유혹에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올페우스교의 완벽한 성자였던 것이다.
인간 예수의 모습과 인간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많은 부분이 겹친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예수가 그리스도로 신화화되어가는 과정에서 당대의 헬라화된 모든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는 거의 완벽한 그리스도 모델을 제공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지만 헬라인들에게는 부엌의 콩기름을 뒤집어쓰는 것처럼만 생각되는, 전혀 그 함의가 와닿지 않는 생소한 말이었다. 그리고 예수의 천국운동은 전혀 ‘그리스도’라는 이미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도마복음에도 예수는 살아있을 뿐이며 죽을 필요가 없다.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죽어야만 하는 필연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왜 죽는가?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란 누구인가? 최초의 크리스챤 회중이다. 이 회중은 예수의 사후에 형성된 후대의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이들을 위하여 죽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 자체가 하나의 ‘구속사건(saving event)’이 될 때만이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대속의 희생은 이스라엘전통에는 없는 것이었다. 대속의 인간희생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번제에 쓰려했던 이삭을 야훼가 구출해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희랍전통은 고귀한 죽음(noble death)을 찬양했다. 폴리스는 모든 문화와 교육이 전사(warrior)를 기르기 위한 것이었으며, 전사는 폴리스를 위하여, 그 법과 인민을 위하여 고귀한 영웅적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영예로운 일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자기의 철학적 신념 때문에 자기를 우롱하고 저주하는 폴리스를 위하여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그레코ㆍ로만시대에 있어서 도덕적 고귀함의 가장 전범이 되는 모형이었다. 예수의 죽음에 소크라테스의 이미지가 겹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에는 부활이라는 장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부활의 관념은 당시 이성적 사유를 신봉하는 헬라인들의 감성에는 영 뜰뜨름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들기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해야만 했던 복음서작가들은 그 부활의 신화적 논리를 당시의 묵시론적 성향을 보였던 유대교의 지혜문학전통에서 빌려왔던 것이다(Burton L. Mack, The Lost Gospel 216~7).
그러나 지금 우리의 도마복음은 이러한 그리스도 신화, 즉 후대의 케리그마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천국은 오로지 자아의 발견(Discovery of the Self)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 제노비아는 시리아 500파운드권 지폐에 새겨져 있고 시리아의 주체성의 상징이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기번은 제노비아를 이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시키지만 순결과 용기에 있어서는 클레오파트라를 한참 뛰어넘는다. 검은 피부에 이빨은 백진주 같았고 검은 눈은 정열의 불꽃이 유순한 매력과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녀의 남성다운 오성은 끊임없는 학구열로 세련된 것이다.” 외교에 있어서는 주체적 자신감만이 우리에게 이득을 불러온다.
아가페와 그노시스
네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인간이 하나님인가 아닌가? 이러한 문제에 관한 대답은, 인간을 하나님과 동차원에서 바라볼 수 없는 비열한 존재로 파악하거나, 인간에게 부분적인 신성의 족보를 허락하거나, 인간에게 완벽한 신성을 부여하거나, 이 세 가지로 요약될 것이다. 과연 어느 것이 정답일까? 물론 정답은 없다. 시·공의 다양한 가치관에 따라 끊임없는 해석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논의를 끊임없이 개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제3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를 이끈다 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보라! 나라(천국)가 하늘에 있도다’ 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2그들이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라는 바다 속에 있도다’ 한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3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4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희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5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희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
1Jesus said, “If those who lead you say to you, ‘Look, the kingdom is in heaven,’ then the birds of heaven will precede you. 2If they say to you, ‘It is in the sea,’ then the fish will precede you. 3Rather, the kingdom is inside you and it is outside you.
4When you know yourselves, then you will be known, and you will understand that you are children of the living father. 5But if you do not know yourselves, then you dwell in poverty, and it is you who are that poverty.”
도마복음서와 같은 코우덱스에 들어있는 도마서(The Book of Thomas)에는 예수가 그의 쌍둥이 도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나와 일상적으로 걷고 있을 때는 비록 깊은 이해를 결하고 있지만, 너는 이미 앎을 획득하였도다. 그래서 너는 진실로 ‘자기 자신을 아는 자’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알지 못하는 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자기를 아는 자는 이미 우주의 심오한 진리를 획득하는도다” (138, 14~19).
도마복음서의 논리가 좀 더 번잡하게 발전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도마서는 변자도마서(The Book of Thomas the Contender)라고도 불리는데 예수와 쌍둥이 도마가 둘이서 변론하는 것을 마타이아스(사도 마태?)가 기록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변자도마서도 도마복음서의 추구와 발견, 그리고 지배와 휴식의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도마복음서보다 후대의 작품이 분명하며 도마행전에는 선행한다. 도마복음서의 내용을 다양하게 편집하면서 발전시킨 흔적이 엿보이는데 이것은 초기기독교운동이 끊임없이 새로운 텍스트들을 요구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상기의 논리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 강조되었다. 자기에 대한 앎(Self-Knowledge)이야말로 지식의 전부이며, 그 앎이 곧 전 우주의 심오한 진리라는 것이다.
‘네가 너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는 좀 수수께끼 같은 구문이다. 그러나 ‘안다 - 알려진다’의 문장 패턴은 바울서한에서도 나타난다. 바울서한 중에서도 저작성이 가장 확실한 갈라디아서에 이와 같은 표현이 있다: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상속자니라. 전에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신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 (now that you have come to know God, or rather to be known by God)”(갈 4:7~9).
고린도전서에도 이와 같이 쓰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 8:3).
그 유명한 바울의 사랑장에도 이와 같은 표현이 있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 우르파박물관의 뜨락에서 초기 도마기독교 교회의 한 부분인 듯이 보이는 조각을 찾아냈다(AD 2세기). 현재 우르파에는 단위면적당 고색창연한 모스크가 제일 많다고 하는데 그것은 모두 기독교 교회를 리모델링한 것이다. 사자 머리 위로 십자가가 있고 돔 옆으로는 새끼양이 새겨져 있으며 기둥은 코린트양식이다. 세례성소의 조각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바울의 표현으로 미루어볼 때, 도마복음의 ‘알려진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알려진다’는 것을 뜻함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 알려지는 조건이 무엇인가? 바로 너 자신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도마와 바울은 크게 갈린다.
바울은 하나님께 알려지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의 아들인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사랑이란 암암리 지식, 즉 그노시스를 경계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그치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지식 즉 그노시스는 사람을 자고(自高)케 만든다는 것이다. 너무 인간이란 존재에게 본질적인 자만심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인간의 자기탐구에 대하여 한계를 지으려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알려지는 진정한 길은 인격화된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철저히 탐구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인간은 진정으로 알 때만이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덕을 축적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자기를 제어한다는 뜻이다. 자기를 지배한다는 뜻이다. 내가 나에게 왕이 된다는 뜻이다.
“네가 너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는 네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여기서 논리적으로 전제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임을 선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되돌아보게 유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임을 자각케 만드는 지혜로운 스승일 뿐이다.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은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매우 미묘한 입장을 취한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평범한 인간도 모두 하나님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아들이 된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진 사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 자신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 인간이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이 두 사태가 근원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또 내가 하나님의 아신 바 된다는 것은 결국 나와 하나님의 궁극적 합일(合一)을 암시하는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 ”(요 10:14~15).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이러한 요한복음의 상호내재(mutual indwelling)의 언사도 결국 하나님과 예수와 인간이 하나로 합일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발전은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허락하지 않았다. 바울도 유대화파나 영지주의적 온갖 분파와의 싸움에서, 확고한 자기의 헬라적 이념체계와 그것에 기초한 교회 공동체조직에 모든 것을 복속시켜야 했기에, 평범한 인간에게 그리스도와 동등한 신성을 부여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바울신학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가 유대인의 민족적 체험의 배경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들’은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이었고, 그 이스라엘을 이방인에게 확대시키기 위하여 부활사건을 도입한 것이다.
도마복음은 이와 같이 확언한다: “네가 네 스스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아니 네 존재는 빈곤 그 자체가 되고 말 뿐이다!” 여기 ‘너(you)’가 단수라는 사실도 주목을 요한다.
인간이 부처가 될 수 있는가? 인간이 예수가 될 수 있는가?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너의 대답은 무엇이냐? AD 1세기의 초기기독교세계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아무런 금기 없이 논의되고 있었던 것이다.
▲ 팔미라의 영웅, 기번이 이 지구상에 여성으로서 태어난 가장 영웅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라고 극찬한 제노비아는 용전(勇戰)을 거듭했으나 결국 로마로 잡혀가고 말았다(AD 272), 제노비아는 바로 예수가 썼던 아람어를 말한 여인이었다. 제노비아는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곡기를 끊고 죽었다, 제노비아는 클레오파트라를 숭배했고, 죽음도 클레오파트라의 선례를 따른 것이다. 그녀의 영웅적 패배로부터 팔미라는 영화를 되찾지 못했다. 팔미라는 모래와 티끌 속에 묻혀 있었다가 1678년에나 알렙포에 살았던 두 영국 상인에 의하여 재발굴되기에 이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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