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주제를 담아낸 권필의 시
雨後濃雲重復重 | 비 갠 뒤 짙은 구름 뭉게뭉게 |
捲簾晴曉看奇容 | 발 걷으니 갠 새벽의 기이한 풍경이 이네. |
須臾日出無踪跡 | 잠깐 사이에 해가 나와 종적조차 없어져 |
始見東南兩三峯 | 비로소 동남의 두세 봉우리 보이네【삼각산의 비 갠 구름[右三角晴雲]】. |
『소화시평』 권상 99번에 두 번째로 소개된 권필의 「호정팔경(湖亭八景)」 중 ‘삼각청운(三角晴雲)’이라는 시다. 이 시는 그냥 읽으면 너무도 일상을 잘 담아낸 시처럼 보인다. 비 갠 아침에 안개가 자욱이 껴 있고 구름도 뭉게뭉게 피어올라 있다. 그러니 늘 보이던 삼각산의 경치는 눈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질 않는 것이다. 그런데 잠시 후 해가 뜨고 나니 구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환하게 삼각산의 경치가 보인다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이라면 ‘자연현상을 시로 잘 포착해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를 단지 이런 느낌으로만 보면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여기엔 성리학적 심상이 아주 깊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성리학의 기본서라고 할 수 있는 『대학』을 보면 아주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사람의 본성은 지극히 선한 것이어서 모든 이치가 구비되어 있다고 전제를 깐다. 그런데 왜 지극히 선한 본성이 있음에도 왜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고 선하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일까? 그건 욕심이나 기질(氣質, 감정)이 수시로 일어나 본성을 가리기 때문이다. 욕심에 흔들리면 사람은 자신이 선한 본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잊고 감정에 휘둘리며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수신(修身)을 하여 기질이나 욕심에 휘둘리지 않도록 단속해야 하고, 그렇게 될 때 욕심은 눈 녹은 듯 사라지고 본성은 환히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성리학에 대해 말하고 보니, 권필이 읊었던 시와 어떤 부분이 동일한지 명확히 보일 것이다.
권필의 시 | 성리학 |
구름濃雲 | 욕심 or 기질 |
삼각산 봉우리兩三峯 | 본성 |
일출日出 | 修身 |
이처럼 권필은 단순히 자연환경의 변화를 읊은 게 아니라, 자연의 모습을 통해 성리학의 본원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홍만종은 권필의 이 시를 읽고서 ‘매우 도를 깨친 사람의 말에 흡사하다[極似悟道者之語].’라는 평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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