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에 담은 문인의 가치와 문학의 위대성
그렇다면 『소화시평』 권하 28번에 나온 이 시는 과연 정말 그렇게까지 추앙을 받을 만한 작품일까?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이 시를 짓게 된 모티프는 물가에 잠긴 소나무에 있다. 과연 이런 광경을 보고 홍만식은 어떤 시를 썼을까?
高直千年幹 臨溪學老龍 | 고상하고 곧은 천년의 가지, 시내를 굽어보며 늙은 용을 배웠구나. |
蟠根帶流水 似欲洗秦封 | 서린 뿌리를 흐르는 물로 둘렀으니 진나라에 봉해진 소나무 씻겨주려는 듯. |
1구 자체는 매우 평범하다. 물가에 잠긴 소나무를 칭송하는 말로 포문을 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2구에선 확 전환되어 소나무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투영한다. 소나무가 물을 굽어보며 ‘노룡을 배웠구나’라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니 말이다. 갑자기 등장한 노룡이란 소재는 얼핏 보면 너무나 생뚱맞아 ‘도대체 뭘 얘기하고 싶은 거지?’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하지만 그 해답은 바로 3구에 나온다. 물속에 엉겨 있는 뿌리의 모습이 마치 용이 똬리를 튼 것처럼 보였기에 그런 과감한 묘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상 그 뿌리는 물속에 잠겨 있는 것임에도 홍만식은 관점을 바꾼다. 바로 뿌리를 물이 애써서 에워싸고 있는 것처럼 묘사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문학작품에서 흔히 등장하는 과장법인데 이럴 때 분명한 건 ‘사실이 뭐냐?’라는 게 아니라, ‘그런 과장법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어냐?’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바로 4구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물은 이 소나무가 진시황이 봉해준 소나무로 생각하여 그 더러운 오욕을 이 물로 씻어 내기 위해 둘렀다’고 본 것이다. 진나라 당시에 봉선제(封禪祭)를 지낼 때 갑자기 비가 내려 진시황은 소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고, 그래서 소나무에게 작위를 내려줬다는 이야기를 끌어온 것이다. 그 당시엔 진시황에 봉해진 소나무는 영예스러운 것이었겠지만, 지금의 진시황은 폭군이자 분서갱유를 일으킨 ‘문화말살의 대표주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 봉해졌으니 그것이야말로 치욕 중에 상 치욕이니 소나무를 에워싼 물은 그런 소나무의 치욕스런 역사를 씻어 내주기 위해서라고 본 것이다.
20글자의 한시에 이런 역사적인 맥락, 그리고 소나무에 담은 문화의 가치와 보존에 대한 항변을 그 자리에 함께 참여한 시인들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다른 말을 덧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붓을 던지고 ‘내가 졌소’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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