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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33. 한시의 표절 시비에 대해 본문

연재/한문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33. 한시의 표절 시비에 대해

건방진방랑자 2021. 10. 28.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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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의 표절 시비에 대해

 

 

소화시평권하 33은 지금까지 읽은 소화시평의 내용 중, 아니 어떤 한문 기록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처럼 여러 작품을 쉽게 찾을 수 있고 비교ㆍ대조해볼 수 있는 세상에선 표절을 하게 되면 금방 들통 나고, 조금이라도 비슷한 구석이 있으면 표절 시비가 붙곤 한다. 최근엔 상어가족표절 시비가 붙었을 정도로, 문학작품, 영화, 음악 할 것 없이 광범위하게 원저자에 대한 권위를 인정해주려 한다.

 

하지만 이처럼 자료의 검색이 수월하기 이전엔 표절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졌다. 일례로 우리나라의 70~80년대 대표 만화들은 일본 작품들을 무단으로 표절하여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최초 로봇만화인 태권도 V’마징가Z’의 아류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 말은 곧 20세기까지도 표절에 대한 인식이 매우 약했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기준으로 보다보면 ‘20세기 이전엔 표절에 대한 인식이 아예 없었다고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다. 하긴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수록되면서 유명해진 호질이란 작품을 짓게 된 계기만 살펴보아도 원저자 자체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창작이 더해져 새로운 작품이 나오기도 했었다. 지금으로 보면 리메이크 개념에 부합할 텐데, 저작 개념이 지금처럼 확고히 자리 잡지 못했던 시대엔 어찌 보면 그런 식의 모방이야말로 창작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을 알기 때문에 조선시대엔 더욱이 표절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다고 감히 생각했는데, 이 글을 읽는 순간 그 생각이 얼마나 근거 없는 생각인 줄을 알게 됐다. 홍만종은 이 글에서 표절이란 단어를 아예 쓰고 있으며, 예전 사람들도 많이 했었다며 서두를 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총 7개의 사례를 순차적으로 인용하며 어떤 부분을 어떻게 인용했는지 서술하고 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나라의 한시들이 어떻게 중국의 한시들을 표절했는지 여실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으로 보면 한시 표절 보고서이기 때문에, 그만큼 학술적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엔 한국 최대의 히트곡인 '상어가족'에 표절시비가 붙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무작정 표절이라며 깎아내릴 순 없다는 생각도 든다. 강서시파는 아예 창작의 묘법으로 탈태환골(脫胎換骨)’이나 점철성금(點綴成金)’을 주창하기도 했었다. , 해 아래 새 것은 없기 때문에 이미 쓰여진 시들을 연구하고 공부하여 새롭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시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들을 복고파(復古派)’라고 부르며 비판의 어조로 말하기도 하지만, 분명 이들에겐 한시는 특출 난 재능보단 누구나 노력하는 만큼 쓸 수 있다는 보편주의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홍만종이 이곳에 들어놓은 예 중엔 단순히 중국에서 유명한 시구를 무작정 가져다 쓴 내용만 있진 않고 강서시파의 창작 묘법을 발휘하여 점철성금한 시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홍만종은 송시(宋詩)보다 당시(唐詩)를 더 좋아하는 개인적인 성향에 맞게 송시를 대변하는 강서시파의 창작 방법도 극도로 싫어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표절 보고서를 만들면서까지 그들을 비판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번 편을 읽으면서 과연 어떤 작품을 표절작으로 볼 것인지, 또 어떤 작품은 기존에 있던 정서를 빌려와서 새롭게 점철성금을 한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김형술 교수님은 백악시단으로 석사ㆍ박사 학위를 딴 학자답게 난삽한 강서시파의 시보다, 철리적인 송풍(宋風)의 시보다 있는 그대로의 정감을 표현해내어 핍진(逼眞)하다는 평가를 받는 당시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그 상황이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시를 함께 읽을 땐 교수님도 한껏 해맑아지며 좋다~”라는 느낌을 한껏 전해주기도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번 글을 읽던 도중 임억령의 시가 김노봉의 시를 표절했다는 의혹에 대해선 한 마디 하셨다. 이런 경우는 이미 관습적으로 사용하던 표현을 쓴 정도의 예에 불과하기 때문에 관습적으로 시상을 전개했다는 비판은 가능할지라도 표절했다는 비판은 너무 가혹하다는 것이다. 교수님의 이 말은 이번 글을 무비판적으로 읽을 게 아니라, 분명히 하나 하나 생각해보며 봐야 할 명분을 제시해주고 있다. 아예 누군가가 쓴 것 같은 그래서 얼핏 비슷해 보이는 정서를 담고 있다는 것만으로 표절운운했다가는 너무도 과도한 난도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당풍을 즐겨 쓰던 사람들도 표절 시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그건 당풍이 지닌 시적 미감과 관련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래에 인용된 글을 읽으며 마치도록 하겠다.

 

 

이러한 창작 방법(당시를 추구한 작품에서는 당시와 비슷하게 보이기 위해 주로 당시의 구절을 점화하므로 원작과 매우 흡사한 분위기를 연출함)으로 인하여 당시를 배운 사람들의 시는 청신함을 얻었지만 표절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가 많으며, 시인의 개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권필이 이달의 얼룩진 대나무의 원한[斑竹怨]이라는 시를 두고 이백의 시집에 넣으면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라 칭찬한 것이나, 이수광이 정지승의 시를 당나라의 시집에 넣어 두니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 것은 칭찬이면서 도리어 욕이기도 하다.

-이종묵, 우리 한시를 읽다, 돌베개, 2009,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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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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