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로 쓴 자기 소개서
‘문여기인(文如其人)’, 즉 글은 그 사람과 같다는 말이 있다. 무심히 내뱉는 말속에는 이미 그의 인생관이나 처세의 방식이 드러나 있어,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
遠客坐長夜 雨聲孤寺秋 | 나그네는 긴 밤을 앉아 새우고 외로운 절, 빗소리 듣는 가을 밤. |
請量東海水 看取淺深愁 | 동해물의 깊이를 재어 봅시다 내 근심과 어느 것이 깊고 얕은지. |
당나라 때 시인 이군옥(李群玉)의 시이다. ‘원객(遠客)’은 그가 고향을 떠나 먼 타관 땅을 전전하는 고단한 신세임을 말해 주고, ‘긴 밤을 앉아 있다’는 말은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어 아예 잠자리를 차고 나와 앉아 있음을 뜻한다. 2구는 우성(雨聲)과 고사(孤寺), 추(秋)라는 세 개의 명사를 서술어 없이 그저 잇대어 놓았다. 가을 밤 창밖엔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청운(靑雲)의 꿈을 품고 고향을 떠나왔을 그는 여태도 이렇다 할 공명(功名)을 이루지 못하고, 가을 밤 외로이 절에 투숙해 있는 처량한 신세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의 탄식을 금할 길 없다. 지붕을 때리며 천지를 압도할 듯 내리는 가을비는 나를 마치 거대한 심연(深淵)의 나락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힐 것만 같다. 마침내 시인은 자신의 이러한 근심의 깊이와 동해 바다의 깊이 중 어느 것이 깊은지 재어 보자고 제의하기에 이른다. 주체할 수 없는 시름 속에 한없이 침몰해 가는 그의 안간힘이 가슴에 저며오는 작품이다. 모두 16구의 긴 시이다.
窮愁重于山 終年壓人頭 | 궁한 근심은 산 보다 무거운데, 세밑은 머리를 짓누르누나. |
朱顔與芳景 暗附東波流 | 꽃답던 얼굴 아름다운 광경, 아스라한 물결 속에 흘려 보냈네. |
鱗翼俟風水 靑雲方阻修 | 비늘 날개로 바람과 물 기다리지만, 청운(靑雲)은 뜻 펼칠 길 막고 서 있고, |
孤燈冷素焰 蟲響寒房幽 | 외론 등불 흰 불꽃 서늘하온데, 벌레 소리 찬 방에 메아리치네. |
借問陶淵明 何物可忘懷 | 묻노니 도연명(陶淵明) 그대여, 어찌하면 마음을 비울 수 있던가. |
無因一酩酊 高枕萬情休 | 한 잔 술 거나히 취할 길도 없어, 베게를 높이 베고 마음 달래네. |
이어지는 내용 또한 궁상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다만 앞 4구에서 이미 전편(全篇)에서 할 말을 다해 버렸으므로 이 아래의 구절들은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된다.
이 시의 제목은 「우야정장관(雨夜呈長官)」이다. 아마도 실의의 낙담 끝에 그는 옹색한 대로 자신의 시재(詩才)를 담아 장관(長官)에게 보냄으로써 그의 환심을 사, 벼슬이라도 한 자리 얻어 보려 결심했던 듯하다. 처량하기 그지없는 자기소개서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이렇다 할 벼슬도 못했다.
한 번은 상수(湘水) 강가를 지나다가 순(舜) 임금을 따라 죽어 상수(湘水)의 여신(女神)이 된 이비(二妃)의 사당에 시를 써놓았는데, 그날 밤 꿈에 이비(二妃), 즉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나타나 “그대의 아름다운 시구를 받자옵고, 장차 아득한 곳에서 노닐며 원컨대 서로 좇고자 합니다.” 하더니 사라져 버렸다. 이로부터 가슴이 답답한 증세를 얻은 그는 한 해 남짓 뒤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한다. 『당재자전(唐才子傳)』에 나온다.
뒤에 위장(韋莊)이, 뛰어난 문사로 당대에 널리 회자되었으나 현달하지는 못한 사람에게 진사(進士) 급제(及第)를 추증(追贈)해 주자고 주청하여, 이군옥(李群玉)은 죽은 뒤에야 겨우 보궐습유(補闕拾遺)에 증직(贈職)되었다. 이덕무(李德懋)의 『앙엽기(盎葉記)』에 보인다.
당당할손 정습명
고려 예종 때 정습명(鄭襲明)도 기이한 재주와 웅위(雄偉)한 도량을 지녔으되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므로 「석죽화(石竹花)」란 작품을 지어 자신의 심경을 기탁하였다.
世愛牧丹紅 栽培滿園中 |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사랑하여 동산에 가득히 심어 기르네. |
誰知荒草野 亦有好花叢 | 뉘라 알리 황량한 들판 위에도 또한 좋은 꽃 떨기 있음을. |
色透村塘月 香傳壟樹風 | 시골 방죽 달빛이 스민 듯 고운 빛깔 언덕 나무 바람결에 풍기는 향기 |
地偏公子少 嬌態屬田翁 | 땅이 후져 공자님네 있지를 않아 아리따운 자태를 농부에게 맡기누나. |
모란은 부귀(富貴)를 상징하는 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란을 사랑함은 꽃을 사랑함이기보다 부귀(富貴)를 붙좇음이다. 붉고 농염한 자태, 동산 가득 대접을 받으며 호사롭게 피어난 모란. 부러울 것이 없는 당당한 모습이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황량한 들판 가운데에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꽃떨기가 있는 줄을. 그 빛깔은 마치 시골 방죽 위에 뜬 달빛이 스민 듯 애연히 고운 색조를 띠고 있고, 언덕 너머로 바람은 은은한 향기를 불어간다. 애호하는 이 하나 없고, 눈길 주는 이 하나 없는 ‘황량한 벌판’에서 바람에 하늘거리는 석죽화(石竹花). 이 아름다운 자태를 보기만 하면 공자님네들도 다투어 자신의 동산 가운데 심어 놓자 하련만, 이 황량한 벌판을 그들이 왜 찾겠는가. 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길 가는 농부의 무심한 눈길에 답할 뿐이다.
시엔 그 사람의 기상이 담긴다
이 시 또한 이군옥(李群玉)의 「우야정장관(雨夜呈長官)」라는 시와 마찬가지로 자기추천서의 성격을 띤 작품이다. 그러나 정습명(鄭襲明)은, 머리를 짓누르는 동해물보다 깊을 성 싶은 삶의 찌든 근심을 말하는 대신, 황량한 들판에서 알아주는 이 없어도 제 빛깔 제 향기를 바람결에 실어 나르는 석죽화(石竹花)의 고결한 자태를 이야기 할뿐이다. 모란을 시샘하지도, 공자(公子)의 안목 없음을 탓하지도 않았다. ‘애이불원(哀而不怨)’, 즉 슬퍼하되 원망하지는 않는다는 말이 바로 이를 이름이다. 이군옥(李群玉)이 궁상맞은 데 반해 정습명(鄭襲明)은 격조가 있다. 이군옥(李群玉)가 장관(長官)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하는 형국이라면, 정습명(鄭襲明)은 의연 군자풍의 늠연(凜然)함이 있다. 뒤에 이 시를 읽게 된 예종은 “여태도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있었더란 말이냐?”하고, 그를 즉각 옥당(玉堂)으로 불러 올렸다 한다. 『파한집(破閑集)』에 보인다.
비슷한 처지, 비슷한 의도로 쓰여진 작품이 어찌 이리 판이할 수 있는가? 바로 그 사람이 지닌 바 기상(氣像)의 차이에서 말미암는다. 인간은 삶의 외형적 조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고 곤궁과 좌절 등의 외부 조건에 찌들어 시인의 기상마저 함몰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한시 비평에서 말하는 기상론(氣像論)이란 시인의 기질과 삶의 자세는 바로 그의 시에 거울처럼 비쳐진다는 생각을 말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
인용
1. 이런 맛을 아는가?
2. 시로 쓴 자기 소개서
4. 강아지만 반기고
5.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책 > 한시(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시미학, 12. 시인과 시: 기상론 - 4. 강아지만 반기고 (0) | 2021.12.06 |
---|---|
한시미학, 12. 시인과 시: 기상론 - 3.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0) | 2021.12.06 |
한시미학, 12. 시인과 시: 기상론 - 1. 이런 맛을 아는가? (0) | 2021.12.06 |
한시미학, 11. 시인과 궁핍 : ‘시궁이후공’론 - 7. 탄탈로스의 갈증 (0) | 2021.12.06 |
한시미학, 11. 시인과 궁핍 : ‘시궁이후공’론 - 6. 시는 사람을 궁하게 만든다 (0) | 2021.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