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시에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이라는 제목의 20수로 이루어진 연작시가 있다. 답답한 세상에 가슴을 후련하게 적셔주는 작품이다. 그 가운데 몇 수를 소개한다.
跨月蒸淋積穢雰 | 한 달 남짓 찌는 장마, 퀴퀴한 기운 쌓여 |
四肢無力度朝曛 | 사지(四肢)도 나른하게 아침저녁 보냈는데, |
新秋碧落澄廖廓 | 초가을 푸른 하늘 툭 터져 해맑더니 |
端軸都無一點雲 | 끝까지 바라봐도 구름 한 점 없어라. |
不亦快哉 | 또한 통쾌치 아니한가. |
초가을에 꼭 맞는 시이다. 특히 금년 여름처럼 잔혹한 더위 끝에 맞이하는 초가을 하늘빛은 자못 경이적이다. 지루한 여름 장마와 끈적끈적하고 후덥지근한 공기, 사지는 나른하기만 하고 일할 의욕은 아예 나지 않는다. 그러나 섭리는 어김없어, 어느덧 높아진 가을 하늘은 눈이 시리고, 손톱으로 톡 치면 쨍하고 금이 갈듯 구름 한 점 없다. 이 얼마나 상쾌한 경계인가.
疊石橫堤碧澗隈 | 푸른 시내 굽이친 곳 쌓인 돌이 둑이 되어 |
盈盈滀水鬱盤迴 | 가득히 고인 물이 답답하게 감돌더니, |
長鑱起作囊沙決 | 긴 삽 들고 일어나 막힌 흙을 터뜨리니 |
澎湃奔流勢若雷 | 콸콸 흐르는 물결이 우레 소리 같구나. |
不亦快哉 | 또한 통쾌치 아니한가. |
상류에서 내린 비에 갑작스레 물이 불어 시내 굽이친 곳에 돌과 흙이 쌓여 갑자기 연못이 되고 말았다. 아래로 빠져나가야 할 물이 나가지 못해 제 자리만 감돈다. 답답한 마음에 긴 삽을 들고 나가 막고 있는 흙을 터뜨리니 우레같은 소리를 지르며 봇물 터지듯 콸콸콸 흘러 내려간다. 십년 묵은 체증이 확 가시는 듯하다.
岧嶢絶頂倦游筇 | 높은 산꼭대기에 지팡이 놓고 쉬니 |
雲霧重重下界封 | 구름 안개 겹겹이 하계(下界)를 가로 막네. |
向晩西風吹白日 | 느지막히 서풍이 백일(白日)을 불어가니 |
一時呈露萬千峯 | 만학천봉(萬壑千峯)이 일시에 드러나네. |
不亦快哉 | 또한 통쾌치 아니한가. |
가파른 비탈길을 더위잡고 올라가 산꼭대기에 걸터앉아 한 땀을 거둔다. 굽어보는 ‘믈아래’는 구름 안개 자옥하여 볼 수가 없고, 지금 앉은 봉우리가 어디멘지조차 가늠할 길 없다. 이때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밝은 해를 불어와 구름바다를 가르자, 만학천봉(萬壑千峯)이 일시에 그 자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雲牋闊展醉吟遲 | 활짝 펼친 운전지(雲牋紙)에 취중시(醉中詩)가 더디더니 |
草樹陰濃雨滴時 | 수풀도 잔뜩 흐려 빗방울이 후두둑. |
起把如椽盈握筆 | 서가래 같은 붓을 손에 가득 쥐어 들고 |
沛然揮酒墨淋漓 | 낚아채듯 휘두르니 먹물이 뚝뚝. |
不亦快哉 | 또한 통쾌치 아니한가. |
주흥(酒興)이 도도하여 종이를 펼쳐 놓고 시사(詩思)를 고르는데, 생각과는 달리 말이 이어지질 않는다. 잔뜩 찌푸린 하늘은 툭 치면 장대비가 쏟아질 듯하면서도 빗방울은 좀체 듣질 않는다. 그러다 마침내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니, 막혔던 시상(詩想)도 이와 같이 툭 터져 도도한 시흥(詩興)을 주체할 길 없다. 벌떡 일어나 붓을 움켜쥐고 통쾌하게 휘두르니 붓에선 넘친 먹물이 종이 위로 뚝뚝 떨어진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먹물과 절묘한 호응을 이루었다.
飛雪滿空朔吹寒 | 눈보라 허공 가득 삭풍이 매서운데 |
入林狐兎脚蹣跚 | 여우 토끼 숲에 드니 걸음걸이 비틀비틀. |
長槍大箭紅絨帽 | 긴 창과 큰 화살에 붉은 비단 모자 쓰고 |
手挈生禽側挂鞍 | 손을 당겨 산채로 잡아 안장 곁에 매어다네. |
不亦快哉 |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날, 눈은 내려 쌓여 허리를 묻는다. 먹이 찾아 나선 여우와 토끼는 푹푹 꺼지는 눈길에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제 몸조차 가누질 못한다. 긴 창과 큰 화살, 붉은 비단 모자까지 갖춰 쓰고 있지만, 굳이 창과 활을 재어 먹일 필요도 없다. 비틀거리는 이놈들을 그저 산 채로 움켜잡아, 버둥대는 대로 말 안장에 빗겨 맨다.
다산(茶山)의 이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갈증 끝에 청량음료를 마신듯 마음이 후련하다. 체증이 내려간다. 이러한 경계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흉중에 독만권서(讀萬卷書)의 온축과 행만리로(行萬里路)의 강산지조(江山之助)를 담아 두고서야 가능한 일이다.
호방하기로는 다시 이런 시는 어떨까.
彈指兮崑崙粉碎 | 손가락을 퉁기니 곤륜산이 박살나고 |
噓氣兮大塊紛披 | 입김을 불어대자 땅덩이가 뒤집힌다. |
牢籠宇宙輸毫端 | 우주를 가두어 붓끝에 옮겨오고 |
傾寫瀛海入硯池 | 동해 바다 기울여서 연지(硯池)에 쏟아 붓네. |
장유(張維)의 「대언(大言)」이란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한껏 과장하여 붓을 뽐낸 시이다. 마치 엄청난 거인이 축구공 만한 지구를 손 위에 놓고 공깃돌 놀리듯 장난치는 형국이다.
이와 비슷하게 이백(李白)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 바 있다.
五老峯爲筆 三湘作硯池 | 오노봉(五老峯)을 붓으로 삼고 삼상(三湘)의 물을 연지(硯池) 삼아 |
靑天一張紙 寫我腹中詩 | 푸른 하늘 한 장 종이 위에 내 마음에 품은 시를 써보리라. |
뾰족한 오노봉(五老峯)을 붓 삼고, 그 아래를 넘실대며 흘러가는 삼상(三湘)의 깊은 강물을 연지(硯池) 삼아 푸른 하늘 거대한 종이 위에 가슴 속에 품은 뜻을 휘갈기고 싶다는 것이다. 스케일도 이쯤 되고 보면 범인(凡人)은 범접할 수가 없게 된다.
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 천만 가지 온갖 생각들일랑 붉은 화로 위에 한 점 눈송이로다. |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 진흙 소가 물 위로 걸어가는데 대지와 허공이 찢어지더라. |
위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임종게(臨終偈)」이다. 한 평생 끌고 다닌 천만 가지 생각과 생각들, 이 생각들이 모여 번뇌를 이루고, 번뇌는 끝이 없어 고해(苦海) 속을 헤매이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러나 활연개오(豁然開悟), 한 소식을 얻고 보니, 까짓 번뇌는 붉게 달아 오른 화로 위로 떨어진 한 점 눈송이일 뿐일래라. 진흙으로 빚은 소가 물 위로 저벅저벅 걸어가니 대지가 갈라지고 허공이 찢어진다. 진흙으로 빚은 소가 걸어가는 이치가 어디에 있으며, 더욱이 물속을 걸어갈진대 그 진흙이 온전할 까닭이 있겠는가. 통쾌한 깨달음의 경계를 저벅저벅 물살을 가르고 돌진하는 진흙소의 서슬에 견주고, 천지가 뒤집히고 허공이 갈라지는 경천동지(驚天動地)로 전미개오(轉迷開悟)의 무애경(無碍境)을 표현하였다.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인용
1. 이런 맛을 아는가?
2. 시로 쓴 자기 소개서
4. 강아지만 반기고
5.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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