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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성서라는 문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우리는 성서라는 문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막연한 공포감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 그 공포감이란 그것이 성령의 계시에 의한 절대적인 말씀이라서 일점일획도 건드릴 수 없는 성스러운 것이라는, 전혀 검증되지 않은 일방적 세뇌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성서는 한 글자도 변동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의 신앙 세계를 우리는 존경해야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성서는 절대불가침의 신성한 말씀이며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 절대불가침의 성서는 어디에 있는가? 물론 교보나 동네책방, 대한기독교서회나 분도출판사책방 같은 곳에 가면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책방에 꽂혀있는 성서는 한두 종류가 아니다. 이..
제14장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아타나시우스 이후 우선 이 기구한 운명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만 한번 생각해보자! 아무리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가 권위가 있다고 해도 그가 부활절에서 발한 메시지 하나로 전 로마기독교세계가 27서성경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기실 아타나시우스는 단지 목록만을 확정했을 뿐이다. 그는 평생의 에너지를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데 다 써버렸기 때문에 그의 저작도 이단에 대한 아폴로지apology, 변호)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는 엄밀한 서지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서라는 텍스트를 크리틱(Critique, 비평)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질 않았다. 그는 27서정경을 물리적으로 만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27서를 확정 지을 수 있을 정도의 ..
카논의 의미 그러니까 기독교의 정경화과정(canonization process)은 4세기에 걸쳐 꾸준하게 진행되어 온 것이며 그것은 오로지 이단을 배제하려는 배척의 과정이었으며, 결집(結集)이 아닌 전집(專集)의 과정이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의 367년 부활절 메시지에 최초로 명료하게 나타난 ‘정경적(canonical)인 것과 외경적(apocryphal)인 것’의 분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서 367년 이전의 초기기독교 문헌에 대해서는 우리는 ‘외경’(Apocrypha)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외경은 오직 정경이 있기 때문에만 생겨나는 규정이다. 정경이 확정되는 순간 이전에는 그것은 모두 동일한 경전이었다. 올림픽에서 메달이 확정..
경전편집에 관한 불교ㆍ기독교의 입장차이 만약 기독교가 이러한 경전편집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기독교의 경전 역시 대장경 이상의 분량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 당대까지 3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축적된 경서의 양은 불교의 아가마(āgama) 전승 못지않은 것이었다. 예를 들면, 유다서 같은 것은 편지 제일 첫머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나 유다가 이 편지를 씁니다’(유 1:1)라는 한마디 때문에 27서에 편입된 것이다. 유다는 물론 12사도 중의 한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누구인가? ‘야고보의 동생’으로서 유다의 이름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예수의 동생밖에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 편지는 ‘예수의 동생’이 썼다는 이유 하나로, 즉..
27서와 경ㆍ율ㆍ논 삼장 나는 평소 불교대장경을 읽으면서 왜 불교는 이토록 많은 경전을 다 성경으로 존중하고 불교신앙의 자료로 삼고 있는데 왜 기독교는 겨우 달랑 27서 쬐끄만 책 하나만 바이블로서 강요하는가 하고 의구심을 품어왔다. 복음서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는 불교 경장 중에서 아가마(āgama) 즉 사아함경(四阿含經)만 해도 4복음서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분량이다. ‘아가마’란 ‘전승되어 내려온 불타의 가르침’이라는 뜻인데 그것의 한역말이 아함(阿含)이다. 이것은 역사적 불타 즉 싯달타(Siddhartha)의 직설(直說) 내용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 아함경은 장아함(長阿含), 중아함(中阿含), 잡아함(雜阿含), 증일아함(增一阿含)의 4종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그 한 종 속에 엄청나게 많..
아타나시우스의 화려한 입성: 부활절 메시지(27서 정경안 발표) 율리아누스 황제가 시도한 것은 그리스ㆍ로마신전에 기독교에 대항할 수 있는 전문사제직을 형성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복안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근원적 전통과 관습이 다른 상황에서 어떠한 인센티브를 주어도 그러한 계급의 형성은 쉽게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율리아누스 황제가 죽고 난 후 그의 뒤를 이어 요비아누스(Flavius Claudius Jovianus)가 황제로 취임했다. 요비아누스는 기독교도였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는 다시 득세했다. 그러나 요비아누스는 7개월 만에 죽는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여행하던 중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그 뒤에 동방의 황제가 된 발렌스(Flavius Ju..
삼위일체논쟁의 이권실속 항상 모든 조직은 외부로부터 탄압을 받을 때는 내부는 하나로 결속된다. 그러나 박해와 탄압이 사라지고 억압되었던 조직이 지배조직으로 둔갑하면 내부갈등이 격렬해지게 마련이다. 일제강점시대 때는 우리민족은 독립을 위해 하나로 싸웠다. 그런데 해방이 이루어진 공간에서는 공동의 목적을 향해 한마음으로 싸우던 한 민족이 좌ㆍ우로 갈라져 서로 물고뜯고 싸웠다. 그리고 그것은 6ㆍ25라는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으로까지 치달았다. 바로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의 삼위일체논쟁이라는 것은 외면적 명목에 그치는 것이었고 그 실상은 새로 개편되어가는 교구를 놓고 주교들끼리 벌인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 동ㆍ서로마 황제들까지도 가담했어야 했다. 300여 년 동안 재야생활을 해온 기독교가 이제 집권여당이 ..
그리스ㆍ로마 신전폐쇄명령 이것만 해도 이미 너무도 과분하게 편파적인 결정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는 면세의 범위를 더욱 넓힌다. 아버지 시대에는 면세대상자는 주교ㆍ사제ㆍ부제로 한정되어 교회성직자 내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콘스탄티우스는 교회의 고용인이나 교회 소유의 농지나 공장이나 상점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도 납세자명단에서 제외시켰다. 교회는 더욱 우쭐하여져서 인두세는 물론 토지세도 면제해달라고 리미니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청원했다. 2년 후에 콘스탄티우스는 이 청원도 들어주었다. 그리고 더 더욱 한심한 것은 성직자의 사유재산에 관한 특례적 결정이었다. 성직자가 된 뒤에는 사유재산을 갖는 것이 인정되지 않았다. 성직에 취임하는 동시에 그때까지 소유하고 있었던 재산은 교회에 기부하거나 육친에..
콘스탄티누스의 파격적 기독교우대 콘스탄티누스는 우선 밀라노칙령을 통하여 기독교를 공인하는 동시에 탄압시대에 몰수한 교회재산의 반환을 명령하고 거기에 필요한 보상은 국가가 하기로 명령했다. 그는 곧 정책 제2탄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참으로 파격적이면서도 로마의 법전통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처사였다. 그는 황제의 전재산을 교회에 기증하였던 것이다. 제정으로 이행한지 300년이 지난 당시의 황제 소유의 농경지는 어마어마했다. 로마황제는 로마제국의 최대의 지주였다. 다시 말해서 하루아침에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최대의 지주가 된 것이다. 다음 콘스탄티누스는 성직자의 모든 공무를 면제해주었다. 그는 이와 같이 말했다. “성직자는 번거롭게 다른 임무에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성스러운 임무에만 전념해야 한다. 그것이 국..
전업 성직자계급의 발전: 기독교 그런데 비해서 기독교는 유대교의 제사장전통과 그것을 민중화시킨 바리새인들의 시나고그 랍비전통을 계승하고 또 예수의 12사도의 상징적 권능에 따라 초기부터 감독(주교), 장로, 집사들이 있었고 곧 이들은 전문적 성직자계급으로 발전해갔다. 그리고 유대교나 희랍종교와 같은 번거로운 피의 희생제식이나 번제가 없이 간결하고 의미가 깊은 성찬식을 발전시켰으며, 세례나 캐더키즘(catechism, 교리문답)의 초기형태나 서약 같은 것이 발달했으며, 복음서와 같은 낭송문화가 가세하면서 교회조직은 독자적인 성스러운 세계로 발전해 나갔다. 그리고 성스럽게 규정된 안식일이라고 하는 주기적 모임(congregation)의 형식은 기독교인의 사회경제적 기반에도 크게 도움을 주었다. 일주일에 한 ..
희랍신전의 성격: 전업 성직자의 부재 기독교를 이교신앙과 구분 지우는 가장 획기적 사실은 전문적 성직자의 존재였다. 다시 말해서 오직 성직에만 전념하는 전업클래스의 존재였다. 헬라스(희랍) 종교에는 이러한 전업 성직자계급이 존재하질 않았다. 희랍의 신전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신이 거(居)하는 전당이었으며 그 속에 사람이 들어가서 예배하는 곳이 아니었다. 희랍의 신전이란 인간들의 예배장소가 아닌 신의 거처였다. 신전은 반드시 폴리스와 일체를 이룬다. 신전은 대개 폴리스의 중심에 있는 아고라나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것은 폴리스 시민의 공동소유였다. 그 신전에 거하는 신은 대개 그 폴리스의 수호신이었으며, 물론 폴리스마다 다른 다양한 신을 모시고 있었다. 예배란 개념은 따로 없고 희생의 제식(sa..
순교는 공포아닌 영광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공인은 기독교신앙의 자유라는 어떠한 사상자유를 선포하는 사건이 아니다. 박해를 하던 대상을 하루아침에 숭배의 대상으로 돌변시키는 데는 그 나름대로의 충분한 하부구조적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박해로서는 기독교를 제압할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순교는 초기기독교인들에게는 전혀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광신자들은 삶에 대한 증오심이 있었다. ‘그들은 종종 도로상에서 여행자를 멈춰 세우고 자기들을 죽여 순교자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면서, 부탁을 들어주면 사례금을 주고 거절하면 당장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곤 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정해진 날에 절벽 위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고 했다(The Decline and Fall of Roman Empire 4..
예수님의 말씀과 인간의 언어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의 대결,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의 모습을 비로소 확정 지운 아타나시우스의 27서 정경의 출현, 이러한 문제를 단순한 종교교리상의 문제로 귀속시킬 수는 없다. 그 배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인간들의 생활상과 역사의 하부구조, 경제사적 토대와 같은 매우 착실한 기반으로부터 분석해 들어가는 것이 타당하다. 한국의 독자들은 나의 역사서술방식이 약간 기독교 정통론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역사의 흐름에 대해 나의 주관적 포폄의 절대성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내가 비록 안타까움을 표현할지라도 독자들에게 그것이 강요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클레오파트라(Cleopatra VII, BC 69~30)의 코’는..
아름다운 토착적 전통을 회복시키고 짧은 생을 마감한 율리아누스 황제가 된 후 그가 실천하고 싶었던 것은 기독교에 짓눌린 그리스ㆍ로마문명의 아름다운 토착적 전통의 회복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도 결국 ‘배교자’로서 낙인 찍히고 만다. 그러나 그가 황제로 있을 동안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는 또다시 탄압을 받는다. 아리우스파에 의하여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은 그가 아타나시우스의 주교권한을 인정할 리가 없다. 그러나 율리아누스의 생애는 짧았다. 페르시아 영토를 탈환하여 로마의 위세를 다시 한번 과시하고자 했던 전투에서, 현재의 바그다드 아래에 있는 크데시폰(Ctesiphon) 전투에서 퇴각하던 중 말 탄 율리아누스의 상복부에 ‘누가 던진 것인지 알 수 없는 창’이 깊숙이 꽂혔다...
율리아누스의 인생역전 그의 형 갈루스가 부제로 임명되어 떠나자, 그는 이오니아의 에베소로 가서 자유로운 삶을 만끽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친형 갈루스 부제는 콘스탄티우스에게 손을 뒤로 결박당하고 무릅 꿇은 자세로 목이 잘렸다. 정제 콘스탄티우스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그의 모가지는 무죄를 항변하지도 못하고 입을 다문 채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밀라노로 호출되었다.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에게 살살 빌었다. 자기는 오직 철학공부하는 것만이 삶의 기쁨이며 정치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살살 빌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로 유학을 갔다. 그리고 철학의 본고장의 유적들을 바라보며 탈레스로부터 소크라테스..
배교자가 아닌 공평한 황제 율리아누스 콘스탄티우스의 뒤를 이은 황제는 바로 337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장례식에 참여한 모든 육친을 살해하는 대학살에서 6살이라서 너무 어렸기 때문에 차마 죽이지 못하고(이것도 역사의 우연이었겠지만) 살려두었던 대제의 막내조카, 콘스탄티우스의 사촌동생 율리아누스였다. 그런데 오늘날 역사에서는 율리아누스 황제를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us Apostata, Julian the Apostate)라고 쓴다. ‘아포스타타’라는 말은 ‘기독교신앙을 버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결코 배교자는 아니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칙령(the Edict of Milan)의 원래 정신으로만 돌아가자고 말했을 뿐이다. “오늘부터 기독교든 다른 ..
이교라는 말의 비극적 의미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아버지의 기독교편향의 지지정책을 더욱 편향적으로 몰고갔다. 여기서 ‘편향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방인의 종교를 기독교와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탄압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기독교적 가치관 일색으로 도배질된 후대의 관점에서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이방’(gentile)이니 ‘이교’(pagan)니 하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 여기서 말하는 이교도라는 것은 천여 년에 걸친 우수한 헬라스ㆍ로마문명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 교도를 뜻하는 ‘파가누스’(paganus)는 원래 ‘시골뜨기’ ‘촌놈’이란 뜻인데 한번 생각해보자! 헬라스ㆍ로마문명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과연 누가 더 촌스러운 사람들이었겠는가? 그러나 기독교의 공인으로 하루아침에 헬라스..
아타나시우스의 영광과 수난 그러나 바로 이러한 화려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의 승리, 그 자체야말로 그의 생애의 수난이요 비극이었다. 그의 거만한 자세는 당시 이미 얼마나 교권이 황권과 대적할 수 있을 만큼의 조직적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방증하는 한 사례이기도 했지만, 결국 황제를 능멸하는 신민이 편하게 버틸 수 있을 만큼의 판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세 황제 중 애초부터 실권자는 아타나시우스와 대결한 콘스탄티우스였다. 맏형 콘스탄티누스 2세는 막내동생 콘스탄스와 영토싸움을 벌이다가 불과 23세의 젊은 나이에 일찍 제거되고 만다(AD 340). 아타나시우스를 지원한 로마의 황제 콘스탄스도 10년 후 야만족 출신의 장수인 마그넨티우스에게 제거되고 만다. 콘스탄스는 피레네산..
콘스탄스ㆍ콘스탄티우스와 아타나시우스 그러나 337년 7월 무렵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황궁을 피로 물들인 대숙청이 일어났다. 이방원의 살생부는 그래도 오랜 세월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이 대숙청은 무지막지하게 한꺼번에 선대의 정치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싹 쓸어버린 사건이었다. 대제의 육친 중에 살해되지 않은 것은 12세인 갈루스와 6세인 율리아누스뿐이었다. 그리고 천하는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 3형제에게로 3분되었던 것이다. 이 대숙청을 주도한 인물은 둘째아들 콘스탄티우스였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는 동방을 지배하던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관할구역에 속해 있었는데 그의 탄압을 받고 로마로 가서 성격이 경쾌하고 활달했던 막내 콘스..
콘스탄티누스의 세 아들과 네 조카 콘스탄티누스 대제(‘대제’는 기독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로마 황제라는 이유로 후세에 붙여진 칭호)가 AD 337년 5월 22일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죽었을 때,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 둘째아들 콘스탄티우스, 셋째아들 콘스탄스였다. 아버지가 죽은 해에 이들의 나이는 20세, 19세, 17세였다. 이들에게는 이미 ‘카이사르’(가이사)라는 칭호가 있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부제로 임명되면서 국법에 의하여 선술집 딸이었던 첫 부인 헬레나와 이혼하고 당시의 정제인 막시미아누스(Maximianus)의 딸 테오도라와 재혼해야만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첫 부인 헬레나의 아들이다. 그런데 테오도라에게서도 두..
아타나시우스의 로마유학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는 동방의 주교였지만, 서방 로마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외로운 사상가였다. 그는 그의 생애에서 제2차로 박해를 받았을 때, 즉 아리우스파가 동방의 지배자인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의 지지를 얻어 아타나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했을 때, 아타나시우스는 현명하게도 로마로 유학을 했다. 당시 서방 로마는 콘스탄티우스의 지배권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타나시우스는 망명생활을 새로운 지지기반의 획득으로 역이용했다. 아타나시우스는 로마의 주교(교황) 율리우스 1세(Julius Ⅰ)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이탈리아의 주교 50명이 모인 지역 종교회의에서는 그의 무죄를 만장일치로 선언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원래 희랍어에 정통한 인물..
로마교회의 보수성과 27서 체제 그러나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는 유대화파들은 전혀 경쟁대상이 아니었으며, 유대교전통은 전혀 신흥기독교에 대하여 위협적인 그 무엇이 아니었다. 따라서 로마교회 사람들은 오히려 자유롭게 유대교 전통, 특히 구약을 활용할 필요를 느끼었던 것이다. 즉 구약의 율법적 세계관이야말로 오히려 정통과 이단을 구분할 수 있는 많은 근거를 제시하였고, 그 권위로운 전통의 하중은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결정적으로 지지하였으며, 구약의 다양한 문학전통은 그리스도교의 예배(worship service) 형식이나 구도에 풍요로운 내용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동방교회는 다양한 이방철학이나 종교, 관습을 포용하는 절충주의적, 그러니까 크게 말해서 영지주의적 개방성을 유지한 반면 로마교회는 구약의 정..
로마교회의 지지 사실 동방교회의 일반적 통례는 정통과 이단이라는 개념에 의하여 신도들을 분리하거나 파문시키는 그러한 분위기가 부재하였다. 정통과 이단이 공존하면서 항상 티격태격거리는 상황은 있을지라도 일자가 타자를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는 그러한 배타적 권위가 부재했다. 그러한 일반적 분위기가 바로 초기기독교의 생명력이었으며 급속한 팽창의 주원인이었다. 그런데 ‘정통’(Orthodoxy)이라는 개념은 2세기초부터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정통’이라는 것은 이론상의 문제가 아니라, ‘로마교회의 다수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 기독교의 형태’(the form of Christianity supported by the majority in Rome, 同上 229)를 말하는 것이다. 이 ..
목소리 큰 놈이 정통 결국 이런 문제에 있어서 가장 현실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다: ‘목소리 큰 놈이 정통이고 목소리 작은 놈이 이단이다.’ 여기서 ‘목소리 크다’라는 우리 구어의 표현은 주장하는 사람의 성세나 권세가 크다는 말인데, 대개 목소리가 커지려면 그 목소리를 지지하는 목소리들이 많아야 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정통과 이단의 구분은 다수(majority)와 소수(minority)의 문제로 결착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오늘날 교회 내에서 분란이 일어나 이단으로 몰려 쫓겨나가는 사람은 아마도 대부분 소수파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정통과 이단의 구분이 다수와 소수의 문제로 가려진다면 또 역사기술은 간단해지겠지만, 이 다수와 소수의 문제는 ‘권불십년 (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듯이 짧은 시간내에 변할 수..
내용적으로는 기준이 없다 결국 초대교회에서 정통을 얘기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사람들은 항상 예수님 말씀과 사도들의 권능을 들먹거렸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예수님의 말씀의 정확한 내용이 무엇이며, 사도들이 전한 말씀의 순결한 내용이란 무엇인가를 아무도 확정지을 수 있는 절대적 근거가 부재하다는 데 있다. 지금 한국의 독실한 기독교인은 누구라도 그 절대적 근거는 성서가 아닌가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은 초대교회에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의 성경이 근원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27서정경도 존재하지 않았고, 복음서의 권위도 절대적이 아니었으며, 또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동일한 자격을 지니는 성서문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당시의 문헌은 모두 양피지..
정통이 없으면 이단도 없다 우선 초대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과연 정통(orthodoxy)과 이단(heresy)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좀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이단이란 옳다고 인정받는 종교ㆍ사상ㆍ학설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의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옳다고 인정받는 이론 이 과연 무엇인지를 규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이단도 규정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통이 없으면 이단도 없고, 이단이 없으면 정통도 없다. ‘이단’(異端)이라는 말의 당시 라틴어는 ‘하에레시스’(haeresis) 그것은 ‘선택’이라는 의미이다. 그리스ㆍ로마시대의 ‘이단’이라는 것은 ‘심사숙고한 끝에 선택한 설’을 의미하는 것이지 ‘정통해석에서 벗어나는 설’을 ..
지금의 정통은 과거의 이단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의 기나긴 이론투쟁을 논의했는데, 기번의 아타나시우스에 관한 기술은 매우 정중하다. 그리고 너무 일방적으로 아리우스파에 대한 폄하의 붓길에 하등의 재고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20년 가까운 기나긴 세월을 자신의 종교적 이념 때문에 정치적 박해를 받았어야 했던 성자적 인품에 기번은 한없는 존경의 염을 표시하고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분명 ‘온갖 영욕과 성쇠를 겪으면서도 결코 동료들의 신임과 반대파의 존경을 잃는 법이 없었던’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을지도 모른다(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409). 그러나 우리는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논쟁을 단순히 예수가 사람이냐 신이냐? 하는..
제13장 아타나시우스의 부활절 메시지까지 - 정경과 외경이 없던 시대 - AD 367년 알렉산드리아 자아! 우리의 최종적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오늘 우리가 신약성서라고 알고 있는 27서의 체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확정된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우리나라와 같은 교계내에서는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성경이라고 하면 그냥 성령의 말씀으로서 시공을 초월하여 예수님시대에 하늘에서 툭 떨어진 책이라고만 단순히 생각하는 한국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또 그러한 생각을 조장하는 그리스도교계의 우매한 지도자들에게 초대교회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성경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 단순한 사실의 지적이야말로 가장 혁명적인 사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단도직입적인 정답을 먼저 제시..
부록: 초대교회의 상상력 ▲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소장의 AD 3세기 로마동전. 터키의 프리기아 지방의 도시인 아파메이아 키보토스(Apameia Kibotos)에 살았던 유대인들의 커뮤니티에서 사용되었던 동전이다. ‘키보토스’라는 말 자체가 희랍어로 ‘방주’(ark)라는 뜻이다. 고대의 노아방주의 그림은 방주모양이 성냥갑같은 박스로 나타난다. 박스의 한 가운데 희랍어로 NΩE(노아)라고 쓰여져 있다. 밑바닥의 갈비살이 드러난 것은 물이 빠진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방주 앞으로 노아와 노아부인이 땅을 디디고 나와서 손을 들어 야훼께 경배하고 있다. 방주 위에는 감람산에서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날아온 비둘기가 앉아 있다. ▲ 로마, 베드로 마르첼리누스 카타콤(the catacombs of Saints P..
성령주의, 재림주의, 금욕주의의 야만성 실제로 동방교회의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페푸자로 모여들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결혼을 금지시켰고(독신생활), 육식을 폐지했으며, 세상의 모든 것과 절연하고 몸을 정화시킬 것을 명했으며, 그리고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 정교하게 단식하는 법식을 가르쳤다. 그리고 성찬식에 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한돌 짜리 아이를 희생으로 썼다. 1살 아기의 몸에 수없이 바늘을 찔러 거기에서 나오는 핏방울들을 모아 빵과 함께 먹었다. 문자 그대로 그것이 예수의 로고스(Logos)가 성찬 참여자의 몸에 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순교를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으로 장려했고, 몬타누스 자신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매달아 자살했다. 세 지도자 중에서 막시밀라라는 여자 예언..
리고리즘(rigorism) 테르툴리아누스가 이들에게 매력을 느낀 것도 당대 교회의 도덕적 해이를 비판하는 엄격주의였다. 이들의 주장이 사실상 초대교회의 오리지날한 성격에서 이탈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기가 매우 곤혹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위험한 운동이었다. 몬타누스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자기 운동의 근거로 삼았다. 그리고 외쳤다. “나는 아버지요, 나는 아들이요, 나는 보혜사이다.”(I am the Father and I am the Son and I am the Paraclete.) 몬타누스운동에 또 두 여자 선지자 프리스킬라(Priscilla)와 막시밀라(Maximilla)가 가담했다. 이들은 남편을 떠났고 금욕주의를 실천하면서 황홀경에 이르면서 방언과 예언을..
몬타니즘과 평창동 휴거파 유스틴이 죽고난 후 타티안은 로마교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고 축출되었다(AD 172), 그 이유는 그가 엔크라타이트의 멤버이며, 영지주의 사상가 발렌티누스(Valentinus)의 추종자라는 것이었다. 엔크라타이트(Encratite)란 시리아의 금욕주의 크리스챤종단(an ascetic Christian sect)을 말하는데 ‘극기’ ‘절제’ ‘금욕’을 의미하는 희랍어 엔크라테이아(enkrateia)에서 종단 이름이 생겨났다. 이 종파 사람들은 결혼을 피했으며(독신주의), 육식을 금했고, 술이나 취기를 불러일으키는 어떠한 음료도 거부했다. 그들은 성찬식에서도 술을 쓰지 않고 우유나 물로 대치했다. 타티안은 로마에서 축출된 후 고향인 시리아로 돌아갔다. 그의 가르침은 동방세계에서 엄청..
이성과 신앙의 이분법은 이단이요 오류다 이러한 유스틴의 주장 속에서 우리는 이미 유스틴이 요한의 제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얼마나 요한복음의 사상이 2세기의 교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지를 쉽게 감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유스틴의 제자인 타티안이 디아테사론, 즉 4복음서체제를 구상하게 된 것도 요한복음의 구도와 사상체계 속에서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쟁론 속에서 2세기 초기기독교의 자유로운 사유의 건강성을 감지할 수가 있다. 즉 신앙과 이성을 근원적으로 이원화시키지 않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신앙과 이성을 이원화시키고 암암리 이성을 신앙에 종속시키고, 은총의 빛(lumen grātiae)을 이성의 빛의 상위에 두는 것은 모두 중세 스콜라철학의 장난이다. 기독교의 복음의 진리로써 인간의 ..
스승 유스틴의 주장 유스틴은 150년경에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 161~180 재위) 황제에게 호소하는 『제1 아폴로지(First Apology)』를 저술하였는데 기독교를 옹호하는 호교론적 논문이었다. 그는 『제1 아폴로지』의 첫 부분에서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가 아니며, 로마 당국에 하등의 적대감정이 없다는 것을 웅변하였다. 기독교나 전통적 플라톤의 철학이나 모두 초월적이고 불변하는 하나님에 대한 열망의 산물일 뿐이며, 기독교신앙의 지적 언표는 로마사회의 모든 이성과 조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앙과 이성이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the divine mind)과 인간의 이성(human reason)이 하나로 상통되기..
타티안 디아테사론의 창출자는 타티안(Tatian, fl. 160~175)이라는 인물인데 나중에 결국 영지주의 이단으로 몰렸기 때문에 그의 활동에 관한 자료가 별로 없다. 우리에게 4복음서를 선사한 것도 영지주의적 선견지명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앗시리아의 땅, 유프라테스강의 동쪽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여지고 있는데 그는 시리아 사람이었을 것이다. 타티안의 여타 저술로서 『오라티오 아드 그라에코스(Oratio ad Graecos)』라는 책이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는데 그 속에는 그의 전기자료가 꽤 상세하게 들어있다. (참고서는 Molly Whittaker, ed., Oratio ad Graecos and Fragments, Oxford Early Christian Texts, Oxford: C..
디아테사론 4복음서의 체제는 언제 출현했는가? 요한복음만 해도 AD 150년 이전에는 그것이 존재했다는 확증을 던져주는 물리적 근거는 없다. 요한복음 18장의 몇 줄을 포함하고 있는 라일랜드 파피루스(Rylands Papyrus 457)나 요한복음을 참고했다고 사료되는 어떤 복음서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에게르톤 파피루스(Egerton Papyrus 2)가 모두 AD 15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AD 172년 경에는 디아테사론(Diatessaron)이라고 하는 4복음서체제가 출현하기에 이른다. 디아(dia)라는 말은 ‘통하여’(through)라는 말이다. 테사론(tessaron)이란 ‘넷’(four)이라는 뜻이다(속격), 마가복음 2:3의 ‘네 사람에게’라 할 때 ..
교황과 황제 아직도 가톨릭 교황청이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콘스탄티누스 이래로 축적된 로마 황제의 권위가 교황의 이미지와 오버랩되어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이미지는 우리 한민족에게 더욱 리얼하다. 불과 왕정에서 벗어난 것이 1세기도 안 되는 일천한 체험의 구조 속에서는 그러한 구속적 황제의 이미지에 대한 아이러니칼한 향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사회가 매우 급속히 민주화되고 개인주의화되고 자본주의화되고 강력한 지배자에 대한 향수가 근원적으로 붕괴되어가게 되면, 더구나 정보사회화의 급격한 진전이 수직적 사유를 근원적으로 해체시키는 경향성을 보이게 되면, 자연히 조선 왕조말기와 일제식민지하의 절박한 상황에서 요청되었던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정서가 같이 해체되는 위기상황이 초래될 것은 너무도 뻔..
제12장 디아테사론과 몬타니즘 콘스탄티누스 이후와 한 무제 이후 문명의 여로에 동ㆍ서를 막론하고 항상 종교는 있어 왔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말하는 데 있어서 최소한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예수를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공자(孔子)를 말하는 데 있어서도 우리는 한 무제 이후의 공자를 말해서는 아니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도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예수나 한 무제 이후의 공자에 집착한다. 사실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예수는 예수가 아닌 로마 황제의 변형태다.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하나님 또한 하나님이 아닌 로마 황제의 변형태인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말대로,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하나님은 갈릴리지평을 완전히 상실하고 세 가지 이미지로 발전해나갔던 것이다. 그 첫째는 제국의 통치자로서의 이미지(God in the..
부록: 정교하고 찬란한 고대자료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Old Babylonian Period)의 설형문자(쐐기문자) 점토석주, 우르 제3왕조(the Third Dynasty of Ur, BC 2097~1989)의 왕들의 이름과 치세가 쓰여져 있다. 이 석주는 BC 1740년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아브라함은 원래 대홍수이래 갈대아 우르에 정착한 사람이었다. 이 석주도 대강 아브라함과 동시대의 것이다. 고대사 자료는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BC 2000년 전후의 문명의 수준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놀랍게 정교하고 찬란하다. 이러한 인류문명의 지혜의 축적으로 오늘 우리가 이기와 복지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성서의 세계도 이러한 인류문명과 더불어 성장해온 것이다. 나는 이 전시물을 2003년 5월 뉴..
종교는 증오가 아니다 종교는 항상 설명되는 순간 왜곡되고, 왜곡되는 순간 결국 야만으로 타락하고 만다. 그러나 어차피 종교는 야만 속에서 성장한다. 유럽의 지성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야만으로부터 구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여 왔다. 종교는 계시와 신앙과 은총의 대상으로만 규정되어야 하며, 일상적 체험과 이성과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정밀한 신학체계를 수립하려는 끊임없는 이성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새카만 옛날에 이미 지중해연안의 한 불건전한 미신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문명통합의 기초(the common basis for the unity of civilization)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종교적 아이디어들은 서로 배우고 서로 빌려야 하며, 서로 이해..
사실의 인지만이 혁명 우리는 새삼 종교개혁이나 종교혁명을 운운할 필요가 없다. 초기 기독교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사실만 인지하는 것으로도 히로시마 원폭보다 몇 억만 배의 위력을 갖는 혁명적 사고의 전환이 가능한 것이다. 마태ㆍ마가ㆍ누가의 공관복음서가 바울의 서한보다 더 늦게 형성된 것이며, 또 그보다 요한복음이 더 뒤늦게 형성된 것이라는 이 단순한 사실, 너무도 모든 정통신학계의 경건한 신학자들, 목사님들, 신부님들이 다 알고계신 의심할 바 없는 일치된 견해, 성서 자체의 권위 속에서 입증되는 사실만으로도 기독교에 대한 혁명은 가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신도들에게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신학교에서는 다 배우고 있고, 서가에 꽂혀있는 모든 신학사전에 다 쓰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단순한 사실들이..
바울과 요한의 기독교 바울의 오늘의 지평 속에서 예수는 매우 추상적이었다. 그는 근원적으로 역사적 예수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부활한 예수의 의미에 관심이 있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마가는 구체적 예수를 말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공관복음서의 홍류를 이루었다. 바울이 예수를 부활의 지평 위에 올려놓았다면 공관복음서는 예수를 역사의 지평 위에 올려놓았다. 요한복음서는 바로 바울(正)과 공관복음(反)을 지양(止揚, Aufheben)한 합(合), 즉 신테시스(synthesis)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요한은 바울의 추상성과 공관복음의 구체성, 바울의 성령성과 공관복음의 역사성의 양면을 종합하려 했다. 바울의 논술성과 공관복음의 이야기성을 종합했고, 바울의 의미성과 공관복음의 설화성을 종합했다. 그래서 바울과..
초기 기독교를 형성한 세 사람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하며 우리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초기전승과 맥이 닿아있는 노인이라고 상정하기 쉬운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희랍철학과 당대의 모든 이방철학을 마스터하고 유대적 사유에 정통한 젊은이로서 초기전승을 체득하고 있는 노인에게서 모든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새로운 비젼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전성시기와 동년배의 35세 전후의 정예로운 젊은 사상가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초기기독교의 새로운 기원을 이룩할 수 있는 과감하고 참신하고 유연하고 깊이있는 사색을 할 수가 있었을까? 나 도올은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그런 싱싱한 젊음을 느낀다.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초기기독교를 형성한 세 사람의 이름을! 초기 기독교..
요한자료의 독자성과 역사성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이 공관복음서 자료를 자유롭게 취사선택하고 편집하는 요한의 태도에 비추어, 공관복음서 자료 이외의 담론이 모두 요한의 과감한 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이 아닐까하고 의심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자체의 담론을 구성하는 1)표징자료 2)계시담론 3)수난설화 모두에 요한의 독자적인 자료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한은 공관복음서를 능가하는 풍요로운 초기전승자료, 어쩌면 예수 당대의 직전구전자료들까지도 풍부하게 구비하고 있었다고 사료되는 것이다. 그의 생동감 넘치는 자세한 묘사가 단순한 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이 아니라는 것이 점점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우선, 주요한 사화(事話)들의 기술방식이(예를 들면, 6장의 오천 명 먹..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 담론 그러한 데 비한다면 예수는 공생애의 시작부터 자기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드러내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문이다’(10:9), ‘나는 선한 목자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포도나무다’(15:1)를 공공연히 외치는 예수에게 메시아 비밀이라고는 있을 수 없다.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에도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는 그의 언어 속에는 지상에서의 사역에 대한 완벽한 자신감이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으로도 그의 메시아됨은 처음부터 공공연하게 고백되었던 것이다(1:41, ‘우리가 메..
예수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이란 헤롯이 지은 것으로 제3의 성전(Third Temple)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가장 화려했고 가장 규모가 컸다. 제1의 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것이고 제2의 성전은 바빌론유치에서 돌아와 BC 520~515 사이에 지은 것인데 희랍인들의 정벌(BC 325)과 로마인들의 정벌(BC 63) 때 다 망가졌다. 예수시대의 성전은 헤롯대왕이 재건한 것인데 AD 70년까지 존속한 것이다. 이 제3의 성전은 성전 본 건물이 있고 그 밖에 뜰이 있고 그것을 에워싸는 담이 있고, 그 밖에 또다시 큰 이방인의 뜰이 있고 그것을 로마식 건축물인 거대한 솔로몬의 행각(行閣)이라는 더블 콜로네이드(double colonnade: 두 열의 긴 돌기둥 회랑)가 둘러싸고 있었다..
재림의 재해석 그리고 요한 시대의 그리스도 공동체를 괴롭힌 가장 큰 문제는 파루시아(Parousia) 즉 재림의 지연이었다. 곧 온다고 믿었던 예수의 재림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바울부터 ‘곧’ ‘곧’하던 그 ‘곧’이 벌써 반세기가 지나가버린 것이다. 재림의 지연에 대하여 ‘조금만 더 기다려라! 기다려라!’하던 초기교회 지도자들의 간증도 이제 맥이 풀리기 시작했다. 막연히 ‘곧’ ‘곧’ 하면서 기다리는 데 이제 신도들은 지쳐버린 것이다. 따라서 요한에게는 이러한 재림대망 사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했다. 요한은 암암리 로고스 기독론을 통해 예수의 지상에서의 사역(ministry) 그 자체가 이미 재림이고 재림의 의미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한의 관심 속에서는 중요한 것은 ..
요한은 3복음서를 다 보았다 요한복음의 저자의 책상머리에는 분명히 마가, 마태, 누가복음, 이 3복음서가 놓여있었다는 것이 현재 성서신학자들의 일치된 결론이다. 과거에는 요한복음은 전혀 공관복음서를 참고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은 3복음서를 다 보았다. 요한은 체질적으로 마태복음은 좋아하지 않는다. 지나친 유대교적 성향 때문에 보편론자인 요한에게는 매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마태를 참고하였다. 요한은 누가의 국제적 감각을 좋아했지만 가장 그가 존중한 것은 마가였다. 역시 그 마가복음의 소박한 진실성이 그가 복음서를 바라본 기준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이 공관복음서의 사건들을 자기 나름대로 생략하고, 덧붙이고, 자세하게 부연하고, 자유롭게 배열하고, 심오한 논술을 첨가할 수 있는 ‘자유’..
국제도시 예루살렘과 성전정화사건 그러나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사역을 과감하게 갈릴리중심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버렸다. 이왕 예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헬라세계 사람들에게는, 강원도 양양 해변에서 활동한 사람이라는 것보다는 역시 서울(首爾)특별시를 무대로 활동한 사람이라고 제시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세 번의 유월절을 보낸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공생애를 보통 3년(AD 28~30)이라는 시간 길이로 설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첫째번 유월절 언급은 2:13. 둘째번 언급은 6:4에 있으나 이것은 전후 맥락으로 보면 갈릴리 가버나움 부근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이 유월절은 5:1의 ‘유대인 명절’과 관련하여 같은 시점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언..
7개의 매트릭스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AD 26~36 재직) 아래에서 일어난 확실한 예수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그러나 그 역사적 사건의 기술이 요한의 관심이 아니다. 그 역사적 지평의 배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하나님의 로고스적인 신비로운 사역(使役), 그것을 예수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순간에서 드러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과연 이 우주라는 프로젝트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프로젝트 속에 던져진 우리의 삶의 의미를 전폭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이러한 의미의 징표로서만 기적을 제시했기 때문에 단 7개의 사건만을 기술했다. 시간(5:1~9), 공간(4:46~54), 양(6:1~14), 질(2:1~11), 생사(11:1~46), 인간의 숙명(9:1~12), ..
기적을 사실로 강요하는 목사에게 송사도 가능한 현대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조선땅에는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는 천여 만의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있다. 그 중에는 성서의 축자무오류(逐字無誤謬)를 신봉하는 매우 보수적인 목사님도 계실 것이고 그 교설을 따르는 매우 우직한 신도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목사님은 설교하실 것이다. 예수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린 것은 사실이며 우리 삶의 역사의 지평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사실로 믿고 따르는 신도들! 그래서 감명을 받고 교회에 재산을 반이나 바쳤다. 그런데 그 신도의 사랑하던 외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런데 과연 그 아들의 시체를 교회로 가져와서 이렇게 외치는 자가 있을까? 목사님이시여! 당신은 하느님의..
시베리아의 한인 나사로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예수의 이적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고 당혹한 심사를 금치 못할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가? 과연 가능할까?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요한복음서는 이미 예수를 로고스로 규정하였다. 그는 시공을 초월하는 절대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의 구현체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이적 앞에서는 우리 인간의 일상적 언어나 사유의 범주가 적용되지 않는다. 바로 인간의 일상적 사유의 범주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권능의 표징(Sign)이나 상징(Symbol)으로서 요한은 이적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요한복음에 있어서의 이적은 이론적으로도 아귀가 들어맞는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로고스로서 규정되었기 때문에 그의 행위는 그 말씀이 인간에게 드러내..
나사로를 살리는 장면의 디테일 예를 들면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그 유명한 이적의 장면을 한번 보자! 그 기술방식이 너무도 사실적이고 인간적이다. ‘예수께서는 본래 마르다와 그 여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고 계셨다.’(요 11:5). 이것은 평소부터 너무도 마르다, 마리아 두 자매와 그의 오빠 나사로를 잘 알고 있었고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있었다는 애정의 표시이다. 그 두 자매가 애통해하고 있는 장면에까지 예수가 가는 과정도 매우 디테일하게 묘사되고 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와있었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는 마중을 나간다. 그동안 마리아는 집안에 있었다. 마르다는 예수께 이렇게 말한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
시공이 단절되는 절대적 타자 그런데 전통적으로 구약의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歷史) 속에 역사(役事)하시는 하나님이다. 만약 하나님이 시공을 초월한 존재로서만 머문다면 그런 하나님이 과연 우리 삶에 무슨 의미를 지니겠는가? 아론의 지팡이를 보내어 애굽의 압박자들을 정죄하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만나 항아리로써 먹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인도해주시고, 계명을 주시어 살게 해주시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민족의 역사적 지평 위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기 때문에만 하나님은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적 지평 위에서 역사하는 동시에, 역사ㆍ세계라는 시공을 초월하는 존재라는데 그 아이러니칼한 성격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시공이 단절되는 절대적 타자(the Abso..
로고스의 성육신 요한은 복음서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유행화된 ‘예수님 말씀 = 하나님 말씀’의 도식에서 ‘말씀’만을 추상화시켜서 마치 그것이 독자적인 생명력을 갖는 하나의 존재인 것처럼 표현했다. 따라서 예수라는 역사적 지평은 평범한 인간의 족적이 아니라, 그 말씀, 그 로고스가 인간의 육신의 옷을 입고(Incarnation) 나타난 존재라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 1:14) 그런데 그 말씀은 ‘태초에 있었다.’ ‘태초’라는 것은 물론 ‘시간에로의 진입’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태초에 있었다’는 ‘시간과 더불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유대교적인 창조론의 발상을 전제로 할 때는 말씀은 시간과 더불어 있었지만 동시에 시간 너머, 시간이 있기 이전에, 우리의 시간인..
로고스의 화신으로서의 아인슈타인 우리가 잘 아는 물리학의 천재로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발견한 상대성이론(theory of relativity)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모든 물리적 법칙의 기초가 되는 새로운 시공론이며 소립자물리학의 새역사를 알리는 혁명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완성은 못했다고 하지만 전자기장과 중력장을 통합하는 그의 통일장론 구상은 하나의 제일적이고 결정론적인 새로운 우주에 관한 통찰로서 지금도 계속 많은 과학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우주의 원리를 범인이 도저히 범접하기 어려운 영감과 수리적 사유로 구성해내었다. 그의 수리적 사유도 물론 그의 말씀 즉 그의 로고스다. 우리에게 이미 프린스턴대학..
말씀과 세계 우리는 저 나무를 어떻게 쳐다보고 있는가? 나무는 저기 우뚝 서있는 물리적 나무이기 이전에 나무라는 말씀이다. 나무라는 말씀으로 인하여 저 나무가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저 나무가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에서 말하는 세포구조의 매우 자세한 말씀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저 나무를 우리가 평상적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매우 다르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물리학의 심오한 말씀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히 우리가 일상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세계를 바라보고 살게 된다. 그것은 분명 우리의 일상적 체험과는 다른 또 하나의 우주다. 다시 말해서 말씀은 우주를 창조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철자한다’ ‘말을 구성한다’라는 것을 영어로는 ‘to spell’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동..
로고스의 일반용법 불트만의 이러한 언급은 매우 부당하다. 물론 그의 논지의 핵심을 내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지나치게 요한복음을 영지주의적 세계관이라는 틀 속에서 자리매김 하고 있으며, 더욱이 영지주의라는 것을 지나치게 하나의 특수한 신화적 세계관으로 고정시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매우 낡은 사고방식이다. 희랍철학이란 몇몇 철학자의 단편 속에 담긴 특수한 사유체계가 아니다. 희랍어를 사용하던 당대의 사람들의 삶과 언어에 배어있는 일반적 윤리관이나 사고의 경향성을 대변하는 문화적 가치이다. 요한복음의 저가는 희랍어를 사용하는 지식대중을 향하여 복음을 설파하기 위해서 ‘로고스’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면, 그 로고스는 이미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us, BC 540~480)로부터 스..
로고스 그리스도론 그 유명한 로고스 그리스도론(Logos-Christology)이야말로 요한문학의 해석적 지평의 핵심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일반 독자들에게는 ‘로고스’(Logos) 즉 ‘말씀’(Word)이라고 하는 개념이 매우 생소한 영지주의적 우주론(Gnostic Cosmology)과의 관련 속에서 논의되고 있기 때문에 쉽게 파악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논하는 신학자들도 우리 한국인들에 낯설 수밖에 없는 개념들을 과연 그것이 우리의 일상적 삶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풀어내지를 않고 우리에게 외래어로서 던져진 개념 그대로 논의를 축적해가기 때문에, 로고스 그리스도론은 막연한 형이상학으로서 타자화되어 있을 뿐이다. 더구나 서양의 신학자들조차도 로고스가 일차적으로 일상적 희랍어의 개념..
기독교의 지속성을 보장한 요한의 해석틀 요한복음의 해석의 지평에는 영지주의라는 우주론이 깔려있다. 이런 말을 하면 또다시 ‘영지주의 = 이단사상’이라는 편견 때문에, 요한복음의 이해를 근원적으로 그르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한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요한복음 해설서를 보면 모두 그 모두(冒頭)에 꼭 한마디를 한다: ‘요한복음은 반영지주의적 복음서이다.’(이영헌 역주, 『요한복음서』, 29~31. 참고. 물론 이 책은 훌륭한 요한복음의 연구ㆍ주석서이다). 이 말은 ‘칼 맑스는 헤겔의 유심론체계에 반대하여 유물론체계를 수립하였다’라는 말과 대동소이하다. 칼 맑스의 유물론과 헤겔의 유심론은 물론 상반될지 모르지만 그 양자에는 공통된 변증법 구조와 공통된 발전사관구조가 들어있다. 공부를 진지하게 많이 하..
제4단계의 지평 우리의 논의를 다시 한 번 총체적으로 점검해본다면, 제1단계인 예수의 생애의 시대는 말씀 그 자체의 지평이다. 제2단계인 바울의 서한문시대에는 신의(神義)적 지평이 깔려있다. 제3단계인 공관복음 시대에는 역사적 지평을 새롭게 발견해내었다. 제4단계의 시작인 제4복음서 요한복음은 복음이라는 형식을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공관복음서와는 다른, 복음서에 대한 해석의 지평을 제공했던 것이다. 요한복음은 복음인 동시에 복음의 해석(Interpretation of Gospels)이다. 제1단계 Stage Ⅰ BC 4 ~ AD 30년경 예수의 생애 말씀의 지평 제2단계 Stage II AD 48 ~ AD 68년경 바울의 서한문 신의적 지평 제3단계 Stage III AD 70 ~ AD 90년대 공관복음서..
대승기독교의 정점을 향하여 희랍신화에 젖은 헬라인들은 그들 신화 속의 신들의 아류밖에 안 되는 로마신들에게 그리 큰 매력을 느꼈을 까닭이 없다. 옥타비아누스로부터 황제가 신격화된 후로부터 신의 권위는 날로 세속화되어 갔고 추락해갔다. 글라디에이터의 경기를 아무리 숨죽이고 관람한들 내면의 공허감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렇다고 근동ㆍ중동의 모든 이원론적 신앙은 악의 문제를 너무 쉽게 처리해버렸다. 선신과 악신이 갈라진 이원론적 우주의 드라마 속에서는 인간의 고뇌의 심연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것은 글라디에이터의 경기를 관람하는 것 이상의 감동을 주기가 어려웠다. 기독교는 최소한 인간의 악을 인간의 타락으로 설명할지언정 이원적 신의 근원을 설정하지는 않는다. 예수는 근원적으로 인성론(theory on huma..
심포지움과 희랍신들의 퇴폐성 초기교회에 모여든 헬라세계의 다양한 지식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종교의 개념과는 다른 색다른 종교의 개념과 색깔과 진지함을 원했다. 희랍인들의 언어는 사실 그 언어 자체가 신화적이었다. 그들은 신화의 요람에서 컸다. 그들의 유모가 요람에서 들려주는 다양한 신들의 이야기(=신화神話)가 그들의 말의 어휘가 된 것이다. 자라나면서 학교교육에서 배운 시인들의 시나 극작가들의 희곡이 모두 신들의 이야기였다. 어슴프레 땅거미가 깔리고 동네 마실을 가면 약속된 아무개집에 모여 술을 마시는 것을 보통 심포지움(symposium)이라고 부르는데, 심포지움 장면에는 반드시 삐딱하게 드러누워 술을 마실 수 있는 소파들이 삥 둘러 놓여있고 그 가운데 안팎으로 신들의 그림이 그려진 희랍 항아리가 놓..
영지주의의 혼합요소들 유대교 자체에 내재하고 있었던 모든 다양한 에소테릭(esoteric)【비전(秘傳)이라는 말로만은 해석되기 어렵다. 우리의 일상적 인식을 넘어서는 신비롭고 은밀한 사유를 지칭한다】한 전통, 일례를 들면 지혜문학, 묵시문학, 그리고 쿰란공동체에서 나타나는 명백한 이원론적 세계관: 진리의 영과 불의의 영, 악한 영과 선한 영, 의인과 악인, 빛과 어둠, 자유의지와 예정론,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의 전쟁, 최후의 심판, 메시아사상, 부활사상, 그리고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적 종교사상, 그리고 이집트의 죽음과 부활의 신 오시리스(Osiris)컬트와 그의 핍박자 세트(Seth), 그리고 희랍의 헤르메스(Hermes)와 동일시된 토트(Thoth)숭배, 그리고 ..
제11장 요한복음과 로고스기독론 유대교로부터 이탈된 기독교: AD 10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 한 30년 동안 기독교는 복음서와 함께 놀라운 교인들의 팽창을 기록했고 특히 동방세계에서는 확고한 교회조직을 형성했다. 요한복음서내에서는 유대인(the Jews)이 저주의 대상으로 기독교인과 확연히 구분되어 객화된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도다.’(요 1:11), 요한복음서 전체를 통해 ‘유대인’이라는 표현은 예수의 적대세력으로서 예수의 삶이나 그것을 읽는 우리의 삶으로부터 소외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곧 기독교가 완전히 유대교로부터 이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요한복음서는 초대교회 내에 유대인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에 쓰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관복음서 내에서는 예수..
도회지 중심, 디너 테이블 누가는 문체에 있어서도 유대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은 피하고, 독자가 이해하지 못할 성 싶은 용어와 지명은 해설조로 다 바꾼다. 그리고 마가가 동사의 시제를 어색하게 구사한 것도 단순과거로 교정해버린다. 그리고 자료수집량이 매우 많고 자료배열도 치밀하다. 마가의 갈릴리 묘사는 시골의 마차길의 흙냄새가 펄펄 난다. 그러나 누가의 갈릴리는 도회지 중심의 인상이 강하게 풍긴다. 마태는 예수를 산 위에 올려놓기 좋아하는데 누가는 예수를 디너테이블에 앉히기를 좋아한다. 마가는 예수를 민중의 영웅적 리더(the heroic Leader)로 그렸고, 마태는 위대한 선생으로 율법의 수여자(the great Teacher and Law-giver)로 그렸고, 누가는 예수를 인류의 친구(..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말 성경 여기에 재미있는 한 에피소드를 첨가하자면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된 우리말 성경이 바로 누가복음서였다는 것이다. 중국 만주에 주재하고 있었던 소격난 장로교회 선교사 죤 로스(John Ross)의 발원에 의하여 이루어진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소격난(蘇格蘭)이란 스코틀랜드를 의미한다. 그는 만주 봉천에서 한국상인들을 만나보고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아 한국으로 선교하러 들어오려고 했는데 도저히 노란머리 푸른눈을 가진 양코배기로서는 대원군의 양이(攘夷) 정책이 극성을 부리던 시대에 밀입국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입한(入韓)은 단념했지만 현명하게도 성경 반입에 대한 뜻을 세웠다.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먼저 한국말을 배워야했다. 그런데 당시 ..
누가의 국제적 감각의 언어 앞서 살폈듯이 누가는 예수의 출생 시점을 이야기할 때에도 지역의 총독 이름을 거론한 것이 아니라, 당대 전체 로마세계의 신적 지배자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를 들먹였다(눅 2:1).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을 알릴 때도, 로칼한 팔레스타인의 연대를 대는 것이 아니라, ‘때는 카이사르 티베리우스(Tiberius Caesar)의 통치 열다섯 해째 되는 해였다.’라는 식으로 곧 죽어도 로마 황제를 들먹인다. 티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눅3:1~2)..
테오필로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우선 ‘테오필로스’라는 이름을 분석해보면 이것 자체가 이미 누가의 국제적 안목에 의하여 만들어진 조어임이 명백히 드러난다. ‘테오필로스’의 ‘테오’(Theos)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필로스’는 지혜의 사랑을 뜻하는 필로소피아의 필로와 같은 어원이다. 다시 말해서 ‘테오필로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 ‘테오필로스’(데오빌로)에다가 고대 로마의 기사단 이상의 계급에게만 붙일 수 있는 ‘각하’(크라티스토스)라는 존칭을 붙임으로써 이미 이 복음서의 낭송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로마의 고위층 관료 내에도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그들이 누가를 지원하고 있다고 하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그리고 복음서와 같은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사람의 열독을 위한 서한양식이 아니다 누가는 이렇게 새롭고도 체계적으로 집필한 예수의 복음서를 데오빌로(Theopilus, 테오필로스) 각하에게 보낸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데오빌로 각하께서 읽고 여태까지 예수에 관하여 얻어 들은 바가 허황된 것이 아니라 확실한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 과연 테오필로스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여러 논란이 있어왔다. 분명 ‘각하’(크라티스토스)라는 존칭이 붙어있는 것을 보아 그는 분명 로마의 고위직의 어떤 인물이었을 것이다. ‘각하’라는 존칭은 사도행전에서 헤롯 아그립파 1세의 딸 드루실라와 결혼한 유대지방의 로마 총독 벨릭스(Felix, 펠릭스, AD 53~60 재직)와 그의 후임자인 베스도(Festus)에게 붙여지고 있..
구전전통과 성문전통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말은 예수라는 사건이 역사적 지평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말이다. ‘평범한 우리와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 그 예수의 사건에 관하여, ‘처음부터’ 즉 예수의 당대로부터 ‘말씀의 목격자가 되고 ’일꾼’(ministers, 사역자, 전도자, 선교자) 된 사람들이 전하여 준 ‘내력’이 많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 내력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이전에 매우 다양한 구전전통(oral tradition)이 많았다는 것을 확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구전전통은 얼마 전에 성문전통(written tradition)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서 복음서라는 문학양식의 출현을 누가는 정확히 제시하고 있다. ‘그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누가의 세계사적 지평 마태의 궁극적 관심은 유대인중심의 교회공동체였으며, 율법의 성취로서의 사랑의 윤리를 강조함으로써 새 이스라엘의 구속사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하면 누가는 매우 국제적이고 관심의 폭이 넓다. 따라서 나는 시대적으로 마태가 유대인으로서 복음을 유대교적 지평 위에서 편집한 노력이 누가의 세계사적 지평보다는 앞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나의 논의를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도표를 독자들이 머릿속에 집어넣고 따라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AD 70년경 마가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Mark) 갈릴리 지평 ↓ AD 80년경 마태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유대화 지평 ↓ AD 90년경 누가복음(The Go..
제10장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구약의 성취로서의 마태복음 마가복음서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참담한 패배와 굴욕감 속에서 의욕을 상실하고 민족적 프라이드가 손상되고 다이애스포라에로의 해체분위기가 짙어가던 유대인 사회에 무엇인가 새로운 활력을 집어넣고 정신적 위기감을 극복할 수 있는 구심점으로서 복음의 중요성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마가복음서보다 보다 완정한 복음서 증보개정판을 내려는 노력이 이루어진다. 마가복음서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passion and resurrection)이라는 패러다임을 제시했지만, 누가와 마태는 예수의 수난과 재림(passion and parousia)이라는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수난 - 부활’과 ‘수난 - 재림’은 다르다. ‘수난 - 재림’의 패러다임이 성립하려면 부활 ..
부록: 바알과 야훼 이것이 바로 바알(Baal) 신이다. 라스샴라(Ras-Shamra)에 있는 바알 신전의 BC 14세기 스텔레 부조이다. 왼손에 잡고있는 나무는 비옥한 초생달 지대의 주목인 삼나무인데 성서에는 백향목으로 나온다. 예루살렘 성전도 이 나무로 지었다. 그 끝은 창모양으로 되어 있어 전투적 성격도 있다. 오른손에 치켜든 것은 인도의 인드라신이 들고 있는 금강저와 같은 벼락방망이이다. 바알이나 제우스나 인드라나 모두 벼락의 신이며, 구름을 타고 다니며 풍우기상을 지배하기 때문에 다산성 (fertility)의 상징이며, 사랑과 풍요의 신이다. 바알은 가나안의 토착 신이며 셈족어로 ‘주인’ ‘남편’ ‘주님’의 뜻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로는 야훼보다는 이 바알..
마가의 자료수집 태도 나는 마가복음이 로마에서 성립되었다는 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갈릴리 사람이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갈릴리 지역의 초대교회전승을 충실히 수집하여 예수를 철저히 갈릴리의 지평 위에서 선포하고 있다. 아마 성립시기는 70년 예루살렘 멸망 직후였을 것이다. 로마저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가가 팔레스타인 지리를 정확히 모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제5장에 예수가 거라사인의 지방(the country of the Gerasenes)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 악령을 추방하는데, 그 악령이 돼지 속으로 들어가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는 장면(막 5:13)이 나온다. 그런데 말하기를 거라사와 갈릴리 바다와의 ..
4복음서의 저작연대 많은 사람들이 복음서의 발전단계를 ‘마가 → 누가 → 마태 → 요한’의 순서로 비정(比定)하지만 나는 ‘마가 → 마태 → 누가 → 요한’의 순서로 비정한다. 기존 견해 마가 → 누가 → 마태 → 요한 도올 견해 마가 → 마태 → 누가 → 요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1ㆍ2부작으로 한 사람에 의하여 세트로 저술되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요즈음의 연구성과는 양자가 꼭 동일한 저자의 작품이라고만 볼 수 없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생각보다는 후대의 작품으로 비정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누가복음 또한 시대가 그렇게 많이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 다드의 말대로 어차피 누가와 마태의 저술연대는 거칠게 잡아도 AD 75년부터 AD 95년 사이의 사건이 확실하며, 그 사이에서의 ..
성서의 디컨스트럭션 가톨릭신학계만 하더라도, 확고한 전통교설이었던 교황의 무오류성(Infallibility)을 인정하지 않는 한스 큉(Hans Küng, 1928~2021)이나 그보다는 보다 온건한 칼 라너(Karl Rahner, 1904~84)와 같은 신학자를 무조건 이단자로 휘몰지는 않는다. 교황의 무오류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복음에 대한 복음서 저자의 무오류성도 인정되지 않는다. 교회의 전승과 하나님의 말씀을 혼동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퀑은 복음의 우선권이 인간문화의 소산인 성서의 우선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복음과 성서는 구별되어야 한다. 복음의 절대적 규범은 성서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일뿐이며, 성서 자체와 복음이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위하여 ..
케리그마의 양식 물론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진지한 독자들은 금방 대꾸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의 기록을 우리는 춘향전과 같은 노래가사의 수준으로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이 이상의 픽션도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복음서의 저자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픽션으로서 날조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복음서는 분명히 역사의 지평을 깔고 있다. 그리고 복음서의 저자들도 예수라는 역사적 지평에서 발생한 많은 구술이나 성문화된 전승들을 충실하게 수집하고 종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복음서는 어디까지나 복음서의 양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양식에 대하여 진위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것을 하나의 양식으로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2006년 12월 10일 대통령 아무개는 중..
케리그마의 본질적 성격 성서를 이렇게 한 줄 한 줄 분석해 들어가면 사실(史實)과 부합하는 것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사가 별로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분석방법이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복음서의 저자는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려고 이 복음서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쁜 소식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선포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 정보의 역사적 근거(historical security)를 말하기 전에 구성적 창조성(compositional creativity)을 말해야 한다. 그것은 기억된 역사(history remembered)가 아니라 역사화된 예언(p..
헤롯의 유아살해의 허구성과 마태의 문제의식 또 마태복음에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후 헤롯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地境)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라 명하였고(마 2:16), 그래서 요셉은 아기와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해 있다가 헤롯이 죽은 후에야, 그것도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니까 마태는 예수의 부모가 원래 나사렛 사람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살던 사람으로 그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마태는 ‘원적 호구조사’라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윗의 고장 베들레헴 사람으로 그렸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복음서 앞머리를 족보로써..
원적지 호구조사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누가의 기록이 아주 비상식적이라는 것은 모든 호구조사는 원적(原籍)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사대상의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고 생활하고 있는 현주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원칙에 비추어서도 알 수 있다. 호구조사의 목적이 과세인 이상, 원적으로 사람을 다 이동시켜서 그 원적에서 모든 식구가 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관료제도적으로도 불가능한 사태일뿐 아니라 의미없는 짓이다. 현주소의 삶의 터전에서 호구조사를 해야 과세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와 그의 아버지 요셉은 분명히 나사렛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에게 다윗혈통의 정통적 후계라는 메시아적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예수는 다윗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에서 출생해야만 했다. ..
천하의 호적조사 누가복음 제2장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이러한 언급은 매우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예수 집안의 불가피했던 행보를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가이사 아우구스도’(Caesar Augustus, BC 63~AD 14)는 바로 줄리어스 시이저(가이사)가 죽은 후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기원전 82년경~기원전 30)와 로마를 양분해가졌..
할아버지부터 모조리 다른 두 개의 족보 우리 한국인들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족보학에 관심이 많은 민족이다. 민간 레벨에서 우리나라처럼 모든 집안마다 장구한 족보를 간직하고 있는 문명은 이 지구상에서 유례가 별로 없다. 그런데 족보는 본시 부계혈통의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마리아 처녀잉태 사실은 바로 부계의 혈통을 단절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지 요셉의 아들이 아니다. 그런데 족보는 요셉의 족보다. 참으로 이런 넌센스가 어디 있는가? 한국인들처럼 족보에 민감한 사람들이 성서를 읽을 때는 이러한 명백한 불일치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여기에 바로 마태ㆍ누가의 고민이 있다. 예수의 출생을 범용한 인간의 출생과는 다른 것으로 그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예수를 그..
예수의 부계족보와 부계가 부정된 동정녀탄생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는 태초로부터 존재했던 말씀이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예수는 처녀 마리아의 자궁에서 비로소 태어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는 시간의 생성과 더불어 이 세계로 진입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의 어느 시점에서 탄생될 수 있는 그런 존재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서에는 처녀마리아 탄생 설화나 유년설화와 같은 일체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다 빠져버린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필요도 없고, 또 받아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예수의 신적 권위는 세례 요한의 세례로써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로고스라는 존재성의 권위로써 확보된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처녀 마리아의 성령잉태를 보다 사실적으로 보이게 만..
마리아 컬트 마리아는 성서에 즉해서 말한다면 가톨릭성당 입구에 서있는 성모 마리아상이나 중세기 성화에 그려져 있는 순결한 처녀의 모습이 될 수는 없다. 최근 KBS 드라마 『서울 1945』 속에 나오는 고두심분(份)의 ‘엄마상’ 정도의 모습이야말로 마리아의 참모습이었을 것이다. 여러 남매들을 거느리고 참혹한 고난의 세월을 견디어 가면서도 소리없이 끈질기게, 그리고 한없는 사랑과 인자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평범하고 주름진 노경의 여자였을 것이다. AD 2ㆍ3세기에만 해도 초대교회에 마리아 컬트(Maria Cult)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의 모습의 담지자(테오토코스, Theotokos)로서의 처녀 마리아의 숭배는 기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공인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기독교도가 되면 갑자기 많은 이권과 특..
왜곡된 순결한 처녀 이미지 그리고 야고보는 예수의 사후 예루살렘교회의 리더가 되었던 사람이다. 얼굴이나 인상착의가 예수와 매우 흡사했고 인격적으로도 매우 원만하고 통솔력이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를 말하는 어떤 학자들은 예수가 죽은 후 제자들에게 다시 모습을 보인 그 부활한 예수는, 예수와 똑같이 생긴 야고보가 예수의 사후 교단을 수습하기 위하여 위로방문하러 다닌 스토리들이 와전된 것이라고 말한다. 예루살렘교단은 그렇게 해서 야고보에 의해서 성립했던 것이다. 헤롯왕도 예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믿고 호들갑을 떨었다(막 6:16, 눅 19:7~9, 마 14:1~2), 예수를 사모하던 사람들이, 그에 대한 애정이 사무치던 사람들..
콘텍스트에서 텍스트로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비록 신학계의 상식적 담론을 반복함에 불과할지라도, 거룩한 독자들은 마치 내가 성서의 권위를 깎아내리려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오인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서 저자의 전달방식을 믿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라는 케리그마(kerygma, κῆρυγμα)는 예수님의 말씀 그 자체 속에 있는 것이지 그 말씀을 드러내기 위한 드라마적 장치나 내러티브적 콘텍스트(context, 문맥)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콘텍스트가 아닌 텍스트 그 자체로 진입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예수의 자기이해에 있어서, 예수님 스스로 ‘나는 순결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
처녀는 젊은 부인 이사야는 유다왕국의 네 임금, 웃시야, 요담, 아하즈, 히스기야를 섬긴 유대민족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다. 상기의 예언은 이사야가 아하즈왕의 이러한 앗시리아 충성주의를 비판하면서 아하즈왕에게 하나님의 징표가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는 장면이다. 이때 ‘처녀’는 성교를 경험하지 않은 처녀가 아니고, 바로 아하즈왕이 새로 맞이한 젊은 부인을 가리킨다. 아하즈왕의 새 부인이 곧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이라 하리라고 한 것은 딴 뜻이 아니라 네 아들은 너와 같이 앗시리아 이교숭배를 하는 그런 못된 짓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항상 하나님을 공경하는 절대신앙의 인..
동정녀 마리아 탄생설화와 그릇된 인용 재미난 것은 동정녀 마리아 탄생설화에 관하여 사도 바울의 서한문에는 일체의 언급이 없다. 그리고 복음서 안에 있는 최고층대의 자료인 Q자료 속에도 일체 언급이 없다. 다시 말해서 AD 60년대까지만 해도 예수가 순결한 동정녀로부터 잉태되었다는 담론은 전혀 초대교회 내에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시조설화들을 보면 대부분 알에서 태어난다. 신라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도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곁 큰 알에서 깨어 나왔다. 박이란 박 같이 큰 알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석탈해(昔脫解)도 큰 알에서 나왔고, 김씨시조 김알지(金閼智)는 계림 금궤짝[金櫃]에서 나왔다. 고구려시조 주몽(朱蒙)도 하나님[天帝]의 아들[子]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지만 닷되들이 만한..
공적인 사실과 전승담론의 조화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예수의 공생애의 사역과 관련하여 드러난, 공적인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적인 사실을 하느님적 경지와 조화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전통사회는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이라는 계급적 분별이 있었다. 크게는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있었다. 어느 사회든 전통사회에서는 이러한 구분은 매우 보편적ㆍ심층적 문명의 경향성이었다. 모든 문명(=인간세)은 선을 긋기를 좋아한다. 이스라엘 사회는 당시 사ㆍ농ㆍ공ㆍ상 대신에 다른 계층적 구조가 있었다. 최상층에는 극소수의 정치적 지배자들이 있었다. 왕과 총독, 그리고 그 주변의 고급행정관료들이 있었다. 이들은 인구의 1%도 채 되지 않지만 당시 이스라엘 땅의 과반을 소유하고 있었..
마태ㆍ누가가 마가보다 더 인기 마태나 누가가 마가보다 인기가 더 많은 것은 매우 당연한 이유 때문이다. 마태ㆍ누가가 마가보다 더 자상하고 더 뿌듯하고 더 섬세하고 더 완결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체를 보더라도 훨씬 더 세련되어 있다. 희랍어의 문체로 말한다면 누가의 문장이 가장 세련되었고 유려하다. 역시 개정판을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판ㆍ원판의 묘미는 개정판이 따라갈 수 없는 그 나름대로의 숭고한 가치가 있다. 마가는 복음서를 곧바로 복음의 선포로써 시작한다. 기쁜 소식의 선포는 곧 예수라는 역사적 실존의 공생애로부터 출발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의 말씀이다. 예수의 말씀이야말로 복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떤 가문의 사람인지..
공관복음서 이러한 생생한 역사적 지평 위에서 복음서는 전개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마가복음서의 기본적 관점(觀點)을 공유(共有)하는 복음서를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 the synoptic gospels)라고 부르는데 마태와 누가가 바로 이 공관복음서의 대표적 작품이다. 그러니까 마태와 누가는 마가를 책상 앞에 놓아두고 쓴 작품이다. 책으로 말한다면 마태와 누가는 마가의 ‘개정증보판’인 것이다【신약학의 거장 다드의 표현, Dodd, About the Gospels 24】. 그러니까 마태와 누가 속에는 마가가 거의 다 들어있다. 마가의 661개의 문장(verses) 중에 600개가 마태 속에 들어있고, 350개가 누가에 들어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을 매우 충실히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마가..
유앙겔리온의 전성시대 마가복음은 빅 히트였다. 그 감동은 여기저기 교회마다 소문으로 퍼져나갔고, 낭송자는 유랑극단처럼 여기저기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반주자도 없는 1인공연이니 간편하게 다녔을 것이고, 가는 곳마다 한번에 다 읽었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연속극처럼 몇 회에 나누어 낭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여튼 인기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 대본을 카피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사본을 가지고 또 새 팀들이 유랑의 길, 전도의 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러한 복음을 듣는 사람마다 감동 끝에 자기가 이전에 들어왔던 이야기를 첨가해서 전하는 사람도 생겨나게 되고, 또 관련된 설화들을 창작하여 덧붙이는 사람도 생겨난다. 옛날에 할머니들이 들려주던 이야기들은 누대를 거쳐 전승이 달라지기 때문에 해주는 사람마다 스토..
산조의 전승양식과 복음의 전승양식 가야금산조는 한말에 전라도 영암 사람 김창조(金昌祖, 1856~1919)라는 무속의 달인이 판소리에 내재하는 가락을 압축시켜 절대음악의 장르인 순수기악곡으로 재창조해낸 우리민족예술의 걸작 중의 걸작이다. 그 장르가 하도 새롭고 하도 충격적이라서 듣는 사람들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흐트러진 가락’이라 하여 산조(散調)라 속칭(俗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순식간에 구한말 음악계에 열병처럼 번져가서 오늘의 장관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옛날에는 악보라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연주라는 개념이 꼭 ‘악보대로’ ‘선생에게 배운 대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의 해석이나 장끼나 자기가 좋아하는 가락을 첨가하기도 하고 또 자기 분위기에 맞지 않는 것은 ..
낭송문학 요한계시록 판타지아 복음서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현 성서의 제일 끝머리의 요한계시록이라는 문헌이 붙어있는데, 이 문헌이야말로 낭송문학의 극단적 형태를 과시하고 있다. 계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은 초기기독교인들의 발명이 아니고,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배어있는 대중문학 장르였다. 이 묵시문학은 기원전 2세기초에서 기원후 2세기초까지 유대인 사회에서 매우 유행하던 문학장르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며,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초시간적ㆍ초월적 세계의 체험을 인간의 언어로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꿈이나 천사나 환상을 통하여 드러난다. 그 주제는 메시아적 대망이며 이 세계의 종말이며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종래적 예언자의 예언은 하나님의 의지를 이 현실역사의 지평..
마가복음은 낭송된 것이다 마가복음은 그것이 독서용의 문헌이 아니라 초대교회에 던진 판소리의 사설과도 같은 것이다. 마가복음은 케릭스에 의하여 대중들에게 낭송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로 시작되어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로 이어지는데 아마도 구약(70인역 이사야 40:3)의 인용구는 노래 챈팅으로 낭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여자들이 심히놀라 떨며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말도 하지못하더라’로 끝났을 때, 아마도 이 복음판소리가 준 감동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그..
심청의 십자가 우리가 기독교문명을 접하기 이전에도 이미 ‘죽음과 부활’이라는 메시지는 우리 주변에 무수히 깔려있었던 이야기 패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을 우리의 서민들은 하나의 문학적 상상이나 날조로서 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리얼한 사실이다. 심청이는 정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남들이 하기 어려운 희생의 결정을 내렸고 몸을 팔았다. 죽음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효(孝)를 나타낸다고 하는 그 여린 여인 심청의 결단처럼 심각한 문제상황은 없다. 분명 그것은 심청의 십자가였다. 그리고 임당수로 몸이 팔려 뱃전에서 떠나가는 가냘픈 심청이의 모습, 뒤늦게 달려와 임당수 해변에서 대성통곡하는 아버지 심봉사의 원성! 심청이 거동봐라 샛별같은 눈을감고 초마자락 무릅쓰고 뱃전으로 우루루루 만경창파 갈..
판소리와 복음서 판소리사설은 그냥 사설로만 읽으면 매우 현학적이고 어렵고 지루하다. 그러나 그것을 발림이나 아니리, 그리고 북 반주를 수반하는 소리꾼의 창(唱) 이야기로 들을 때는 무슨 이야기인지 세부적인 것까지는 다 모른다 해도 대충 재미있게 알아듣는다. 『춘향전』이나 『심청전』의 사설을 뜯어보면 매우 현학적인 한문투가 많다. 즉 그것을 쓴 사람은 조선조 문화의 아주 고도의 문헌적 지식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그 재미를 향유한 사람들은 식자층이 아닌 조선왕조의 일반서민들이었다. 소리꾼의 판이 벌어진 곳은 양반집 사랑채의 대청이었지만 그 앞마당을 가득 메운 것은 농촌의 뭇백성이었다. 시각적 문헌과 청각적 문헌은 그 성격이 매우 다르다. 시각적 문헌은 그 자체로 그것을 읽는 지식인들을 ..
낭송문화 속의 교회 교회라는 곳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초대교회에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이러한 낭송문화였다. 예수의 말씀이라고 전승되어온 파편이나 다양한 목격담, 그리고 사도들의 편지가 케릭스에 의하여 낭송되는 것이 그들의 예배였다. 낭송문화는 반드시 운이 들어가고 인토네이션의 리듬이 들어가고 때로는 노래가 삽입되기도 한다. 그것은 거의 우리나라의 ‘판소리’라는 장르와 매우 유사한 것이다. 케릭스는 우리나라 ‘소리꾼’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단지 조선조말기의 소리꾼은 신분적으로 광대신분이었기에 천시된 반면에, 초대교회의 전령은 신의 말씀을 전하는 전령으로서 숭상되었다는 것만 다르다. 전령들의 낭송이 끝나면 성찬이 베풀어진다. 즉 빵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이다. 성찬이라는 것도 요즈음처럼 쬐끔쬐끔 상징적으..
케릭스 바울이 데살로니카의 교우들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그냥 편지 하나를 보냈다는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편지는 보통의 교우들은 읽을 능력이 없다. 그 편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반드시 교회의 회중들이 모여있는 공적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읽은 것이다. 이 낭독(Public Reading)은 초대교회의 가장 보편적 문화였다. 이 편지의 경우에는 이 편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읽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읽는 사람을 구해서 읽어 들리게 하라는 부탁을 첨가한 것이다. ‘이 편지를 낭송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들리게 하라’라는 부탁을 자기의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너희들에게 명한다’고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그리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