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고전/성경 (1707)
건빵이랑 놀자
시각적 문헌과 청각적 문헌 내가 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가? 우리는 너무도 ‘사실’에 무지하다는 것이다. 성경을 운운한다면 우리는 우선 성경이라는 아주 객관적인 문헌에 관한 사실들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한 사실을 토대로 초대교회의 역사적 정황을 정확하게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복음이 들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서구의 매우 위대한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사실들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것은 때때로 오늘날의 우리의 체험 속에서 왜곡된 주관적 인간의 언사에 불과할 수가 있다. 성령을 주장하는 정통파들일수록 인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하는 오류의 폐해를 주책없이 전파하는 경향이 심하다. 내가 말하려는 복음서에 관한 중..
양피지와 파피루스 마가시대에는 종이에 해당되는 것이 두 가지 밖에 없었다. 하나는 양피지(parchment)라는 것인데 양가죽을 무두질하여 늘려서, 쎄무가죽처럼 야들야들하게 얇게 만든 것이다. 양가죽만 쓰는 것은 아니고 염소나 소가죽도 쓸 수 있다. 소가죽은 길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새끼가죽일수록 고급품이 나오는데 그것을 벨룸(vellum)이라고 한다. 이 양피지는 우리나라 족자처럼 양쪽에 나무를 껴서 두루루 만다. 따라서 한 면에만 쓴다. 앞뒤 양면을 다 쓰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양사로써 한 두루마리 즉 권(卷)의 의미를 지니는 볼룸(volume)이라는 말을 쓴다. 한 볼룸은 한 롤(roll)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양피지 이외로는 파피루스(papyrus)라는 소재가 있다. 이것은 나..
제9장 낭송문화와 복음서 복음서 저작의 물리적 사실들: 종이 복음서에 관하여 우리가 얘기를 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매우 중요한 기초적 사실들, 우리가 오늘날 우리 자신의 일상체험의 구조 때문에 매우 안일하게 무시해버릴 수 있는 사실들, 복음서가 쓰여진 당대의 초대교회의 일상적 삶의 문화적 쇄사(瑣事)와 관련된 사실들에 관하여 응당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당시에는 인쇄라는 것이 없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의 ‘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개념의 ‘독서’라는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책방에 가서 책을 사서 본다든가, 교회에 가면 의자 앞에 신도들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성경이 꽂혀있다든가 이런 진풍경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당대..
미국과 유대인 현금의 세계질서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미국이다. 미국의 군사력은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군사력을 합친 것보다 더 막강하다. 이 지구의 역사에서 한 나라가 그토록 강성한 유례는 없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시기에도 중국에는 한제국, 인도에는 쿠샨왕조가 있었고, 그리고 로마의 동점을 막고 있었던 파르티아제국(Parthian Empire)도 있었다.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미국이라고 한다면,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이다. 이 세계는 실제로 유대인들에 의하여 지배 당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미국의 금융, 언론, 학술, 엔터테인먼트산업에 있어서 거의 독점적인 위치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칼 맑스, 프로이드, 아인슈타인, 노암 촘스키, 스필버그, ..
다이애스포라 신세 유대인은 또다시 자기 고향을 잃고 이역의 다이애스포라(Diaspora)에 살아야만 되는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이 ‘떠돌이 신세’는 자그마치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the State of Israel)가 공표되기까지 1800여년 동안 계속되었던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김춘추가 당(唐)이라는 대국의 힘을 빌어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되, 통일의 주체라는 신라까지 말아멕혔다면 어찌 되었을까? 지금도 예산에 가면 임존성(任存城)의 잔해가 남아있어 백제인들의 마지막 항쟁의 치열했던 함성이 메아리 친다.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은 의자왕을 비롯 수없는 왕족ㆍ대신ㆍ장사(將士)들을 포로로 하여 당으로 돌아갔고, 이세적(李世勣)은 보장왕을 비롯 다수의 귀족과 20여만..
바르 코크바와 랍비 아키바 AD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도 로칼한 시나고그들은 유대교의 구심체로서 기능했고, 기독교 교회들도 특히 갈릴리지역에서는 번창해나갔다. 로마인들은 정치적 저항에는 가혹했지만 원칙적으로 유대인들이 유대교에 귀속되는 권리까지 침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AD 66~73년 사이의 제1차 독립전쟁시기에서 사두개인들은 많이 죽임을 당하였지만 바리새인들은 내면적으로 결속하여 유대인 공동체의 정신적 토대를 오히려 공고히 다져나갔다. 미쉬나(Mishnah)와 탈무드(Talmud)를 중심으로 한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형성의 주축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AD 132년 하드리안 황제(Hadrian, AD 76~138, 재위 117~138)는 유대인의 할례와 일체의 거세를..
요한복음 속의 예수 나사렛의 예수는 물론 유대인이었다. 예수는 안식일을 지켰고, 유대의 율법과 관습을 잘 알았다. 그의 제자도 모두 유대인이었고, 그를 따르던 군중도 모두 유대인이었다. 그의 선교활동 전체가 팔레스타인 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예수는 유대인의 민족적 메시아는 될 수 없었다. 요한복음 속의 예수는 그를 심문하는 빌라도 총독에게 이와 같이 반문한다. 빌라도 총독: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죄인 예수: “나를 ‘왕’이라니, 그건 네 자신의 말이냐? 그렇지 않으면 딴 사람들이 들려준 말을 네 입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냐?” 빌라도 총독: “네가 날 유대인으로 알고 그따위 질문을 하는 거냐? 너를 왕이라고 고소한 놈들은 바로 네 동족들이다. 넌 도대체 그들에게 뭔 짓을 했느냐?” 죄..
예수에게는 메시아라는 자기인식이 없었다 일반 유대 민중에게 있어서 ‘메시아’의 일차적 의미는 그들에게 정치적 독립, 즉 이민족지배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주는 다윗왕과 같은 역사적 인물이었다. 역사적 예수는 이러한 맥락에서의 ‘메시아’로서 자기인식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문제는 메시아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최후의 승리자이다. 그런데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메시아’ 라는 것은 일반 대중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메시아의 모습이었다. ‘죽는 메시아’(dying Messiah),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killed Messiah)는 상상키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복음서 저자들에게는 이 ‘부활’(Resurrection)과 ‘재림’(Parousia)이라고 하는 문제가 흩어져가는 민족에게..
마가복음서 집필상황과 이스라엘민족의 애환 이런 상황에서 마가는 복음서를 썼다. 복음서는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하여 쓴 책이 아니다. 당대의 크리스챤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전쟁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복음서의 저자들도 이 민족적 비극을 객화시켜서 담담하게 묘사할 뿐 자기내면의 상처와 아픔으로 그리고 있질 않다. 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의 유대민족의 정치적 해방에 관심이 없었으며, 결국 자기민족인 유대인들의 몰이해와 박해 속에서 죽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의 출현은 완전히 민족적 프라이드와 아이덴티티를 상실하고 좌절 속에 해체되어만 가고 있었던 유대인 커뮤니티 속에 새로운 민족적 구심점을 창출하려는 한 노력으로도 볼 수가 있다. 그들은 예수를 진정한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로 그리..
마사다 요새 AD 70년 유월절 기간 동안에 티투스의 4개 군단과 강력한 지원군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처참한 파괴가 이루어진 이 사건으로 6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났다.(사망자가 100만 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자그마치 팔레스타인 유대주민의 4분의 1이 죽은 것이다. AD 73년, 아마도 74년초까지 사해의 서쪽해안 난공불락의 산 정상에 있는 마사다 요새에서 항쟁을 계속했던 유대의 독립투사들은, 금남로 도청에 포위되었던 광주시민처럼 상황이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결을 결정하였다. 지하의 수도관에 숨어있던 두 명의 아낙과 다섯 어린이들만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유대인 독립투사들의 비참한 항쟁의 종말을 지켜보았다. 마사다 요새를 로마군이 함락시켰을 때는 시체만 즐비하게 널려있었던..
예루살렘교회 전통과 복음양식 바로 마가의 복음서양식의 출현은 이러한 바울의 추상적 이방선교에 대한 예루살렘교회 전통의 회복을 의미하는 사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예루살렘교회와 팔레스타인 곳곳의 토착교회에는 바울의 추상적 논술과는 달리 보다 구체적인 예수의 이야기, 즉 1세대ㆍ2세대의 직전 담론들이 짤막한 케리그마(kerygma, κῆρυγμα)의 형태로 지속되어 내려오고 있었다. 마가는 이러한 단편적 케리그마의 유형들을 하나의 일관된 수난극의 플롯 속에서 묶어내어 예수라는 사건의 전모를 드러내는 포괄적인 새로운 케리그마를 구상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었다. 그런데 복음서의 출현은 AD 70년 예루살렘멸망을 전후로 한 정치 상황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이때만 해도 기독교는 아직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지 않았..
바울 비젼의 독자성 3년 후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지만 그는 자신의 개종체험을 인가받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간 것이 아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정통성이나 권위를 전혀 인정하고 있지 않다. 예루살렘에서 만나서 15일을 같이 유숙했다고 하는 ‘게바’(Cephas)도 주석가들의 통념처럼 꼭 베드로이어야만 하는 보장도 없다. 게바(베드로의 아람말)와 베드로는 어원의 문제를 떠나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 이외에는 다른 사도들, 즉 예수의 직전제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았고 만날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그의 이방선교에 대한 사도 권능의 원천이 전혀 예수의 제자들과는 무관한 것임을 자랑스럽..
사도 바울과 아라비아 사막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이다. 바울은 아주 명료하게 ‘유대교’(Judaism)라는 표현을 썼다. 즉 유대전통이 그의 의식 속에서 이미 하나의 개념으로서 소외되어 있고 객화되어 있는 것이다. 유대교에 대한 열렬한 충성심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그토록 열심히 핍박했던 그가 그의 아들 예수를 ‘내 속에서’ 계시된 형태로 만난 사건을 계기로 어떤 심정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개종체험’의 대사건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그 체험의 사건에 관하여 일체 가까운 사람, 혈육 그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라비아로 갔다. 그리고 다메섹으로 돌아갔다. 개종체험이 있은 후 당연히 그는 그 개종에 관하여 기독교단을 리드하는 사람들로부터 인가를 얻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
사울의 개종체험 이렇게 본다면 바울이 다메섹(다마스커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둘러 비추어 음성이 들리면서 눈이 멀었고, 사흘 후에나 아나니아라는 제자의 안수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고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에피파니(epiphany, 하나님 현현)의 체험, 그리고 제자 아나니아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매우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사도 바울에 관한 환상적 이야기들이 후대에 다양하게 전승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생생한 이야기의 진실, 기독교사의 최대의 역전적 계기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주 확실하고도 안전한 방법이 있다. 사도 바울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사도 ..
바울과 예수 바울은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돌연한 계시적 체험에 의하여 그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다. 이 개종체험(conversion experience)의 드라마는 사도행전에 꽤 자세히 생생하게 3번이나 기술되어 있다.(행 9:3~19, 22:6~16, 26:12~18). 그러나 이 3번의 상황도 자세하게 뜯어 보면 설명방식이 각기 다르다. 3개의 다른 전승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더욱 결정적인 사실은, 오늘날의 성서연구자들이 확정짓고 있는 일치된 결론은 사도행전의 기록이 결코 사도 바울의 직접적 증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사도 바울과 직접 안면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속의..
공전의 히트 바울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무시간적으로 표백시켜 그 속죄론적 의의만을 강조했던 것과는 달리, 마가는 오히려 생동치는 한 역사적 인간으로서 갈릴리의 평원에서 활동한 예수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논술했다고 한다면 마가는 나사렛 예수의 삶을 기록했다. 여기에 최초의 복음서라는 문학장르의 탄생의 역사적 의의가 있다. 초대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기적과 영광과 권세의 수퍼 히어로(a super-hero), 신인(神人, a divine man)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마가는 그러한 교인들에게 완전히 다른 복음의 드라마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가의 예수는 힘이 없었고 연약했으며, 사람들을 치유하고 권면했으며, 수난 속에 죽어갔다. 이러한 십자가를 통해 ..
수난복음서 마가는 수난복음서이다. 수난에 관한 이야기전승을 마가는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수난 한 주간의 역사만 해도 복음서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마가복음은 크게 3부로 대별된다. 제1부는 수난사의 서막이다(시작~1:13). 자세히 살펴보면 희랍비극의 서막과 매우 유사한 양식을 취하고 있다. 세례 요한의 출현, 예수의 세례, 광야에서의 시험이 매우 간략하게 서술되면서 예수라는 인물의 진정한 아이덴티티는 베일에 가려진 채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6장에는 살로메의 쟁반 위에 칼로 토막난 세례 요한의 머리가 올려지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생애 자체가 이미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의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제2부는 예루살렘 상경 직전까지의 갈릴리호수를 중심으로 한 예수의 선교활동이..
마가의 복음 핵심 그 얼마나 강렬한 드라마인가! 이렇게 위대한 드라마의 엔딩장면을 놓고 밑 안 닦은 것 같다는 식의 투정들, 예수의 부활현현의 장면이 있었을 것이라는 등, 계속된 부분이 여기서 뜯겨져서 없어졌을 것이라는 등, 복음서 저자가 잡혀가는 바람에 완성을 못했을 것이라는 등등의 하찮은 췌언(贅言)을 신학자라는 사람들이 일삼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분명히 말하건대 마가는 16장 8절, 연약한 여인들의 떨림으로 그의 유앙겔리온의 대미를 완벽하게 장식한 것이다. 그것은 의도된 결말이었다. 마가가 전파하고자 한 유앙겔리온의 핵심은 십자가였다. 예수라는 한 인간, 우리의 구세주의 몸으로 겪은 수난이요 희생이었다. 오로지 그 십자가가 그의 관심이었다. 화려한 부활이나 눈부신 승천이 그 주제가 아니었..
마가가 그리는 예수의 색신 사마천이 그린 공자(孔子)의 모습이 과연 역사적인 실상에 가까운 공자의 모습인가에 관하여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공자세가(孔子世家)」를 구성하는 단편자료들 사이의 중복, 모순, 불일치, 시대적 배열의 문제점들이 수없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천이 그리려고 하는 공자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한 인간의 충실한 전기적 구성이다. 그러나 마가는 애초부터 그런 식으로 예수를 바라보지 않는다. 앞서 내가 복음서의 예수를 바울의 법신적 예수에 비하여 색신(色身)적 예수라고 말했지만, 이 색신이라는 것도 사마천이 공자를 바라보는 것과도 같은 역사적 인물로서의 색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색신은 그 자체가 하나의 복음이며, 그 색신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이다. 마가..
마가복음과 공자세가 독자들은 마가복음과 「공자세가(孔子世家)」를 병렬하여 논구하는 나 도올의 견식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깊게 양자를 모두 문헌학적 측면에서 검토해보면 그 성립과정이나 집필방식에 놀라운 유사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0세기 신학자들이 발전시킨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이나 양식비평(form Criticism)의 모든 문제점이 「공자세가(孔子世家)」 속에서도 드러나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정의로운 주장 때문에 요참(腰斬)의 사형언도를 받고 또 그것을 당대 사대부로서는 최대의 치욕이었던 궁형(宮刑, 거세)으로밖에는 모면할 길이 없었던, 너무나 처절하고도 끔찍했던 실존적 고뇌를 감내해야만 했던 사마천! 그 사마천은 「공자세가..
사기의 공자세가 우리는 인류문명의 7대 불가사의(Seven Wonders)니 뭐니 운운하지만 이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스케일의 위대한 불가사의가 하나 있다. 『사기(史記)』라는 서물이 그것이다. 이 『사기』 속에는 ‘의(義)를 돕고 결연히 나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세운 사람’, 암혈지사(巖穴之士), 유협지사(遊俠之士), 덕행으로 명성을 날린 시정의 장사치 등등, 후세의 이름을 남긴 영웅호걸이나 위인들의 바이오그라피(傳記)가 열전(列傳)이라는 장르 속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열전을 아무리 뒤척여도 공자(孔子)의 전기는 보이지 않는다. 노자(老子)나 한비자(韓非子)의 이름은 나와도 공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공자의 전기는 세가(世家)라는 장르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세가’는 천자(天子)..
로기온과 논어(論語) 복음서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 관한 단편적 이야기들이나 그의 말씀, 그러니까 로기온(logion)이라고 부르는 설법토막들이 전승되어 오고 있었다. 아마도 교회 내에서 암송이나 독송의 형태로 내려오는 구전자료들, 그리고 신도들 앞에서 크게 공적으로 낭독하는 어떤 예수어록집 같은 문서기록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어록의 말씀은 역사적ㆍ상황적ㆍ감정적 맥락이 단절된 단편적인 것이었다. 그런 것은 아무리 들어도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한 인간에 대한 심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록에는 그 인간의 라이프 스토리라든가 그 말을 의미 있게 만드는 전후 내러티브(narrative, 서술적 담론)가 없는 것이다. 일례를 들면 우리가 아무리 『논어』를 열심히 읽어도 공..
제8장 복음서의 출현 복음서와 대승기독교 역사적 상황은 다르지만 기독교 복음서의 출현은 동일한 헬레니즘 문명권내에서 대승불교가 출현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의미맥락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복음서 출현이 약간 빠르다). 그러니까 복음서라는 새로운 문학양식의 출현은 기독교를 대승화시키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바울이 말하는 부활의 그리스도가 아닌 팔레스타인의 풍진 속에서 역사하는 나사렛 예수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재미있고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기독교의 대승화작업에 최초의 전기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마가(Mark)라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대승화작업의 정점에 요한복음이 자리잡고 있다. 요한복음의 로고스기독론과 『금강경』(金剛般若波羅蜜多經, Vajracchedikā-Prajñāpāram..
대승불교 시작의 계기 현 파키스탄내의 페샤와르(Peshāwar)지역에서 이러한 불상이 대거 출토되는데 이 지역의 미술을 통칭하여 간다라미술(Gandhara Ar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간다라 미술과 더불어 인도의 웃따르쁘라데쉬(Uttar Pradesh)지방의 마투라(Mathura) 불상들이 흥기하였고 이로 인하여 이전의 초기불교의 금기를 깨고 인도전역으로 ‘불상 조각붐’이 열병처럼 번져나갔다. 한편 전륜성왕 아쇼카왕 이후 인도에는 스투파신앙이 보편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붓다의 돌무덤인 스투파(stūpa: 원래 분묘였는데 점점 우리가 알고있는 탑양식으로 발전해갔다) 주변을 빙빙 돌면서 붓다를 흠모하는 ‘탑돌이’ 문화가 생겨났다. 이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은 몇날 몇 달을 죽치고 계속하는 습속이 있..
예수의 법신과 색신 초기불교시대에 있어서는 입적한 싯달타(Siddhartha)에 관하여 일체의 형상을 구체화할 수 없었다. 싯달타(예수에 비교) 즉 붓다(그리스도에 비교)는 윤회의 고리를 끊고 완벽하게 열반(涅槃, nirvāṇa)의 세계로 들어가버린, 다시 말해서 일체의 색신의 가능성이 없어져버린 해탈자(물질적 세계를 완전히 벗어난 자)였기 때문에 그를 다시 육신의 모습으로 구현한다는 것은 금기였고 불경(不敬)이었다. 불타의 생애를 말해주는 초기불전도(初期佛傳圖)에도 발자국 같은 것만 표현되어 있을 뿐 일체의 형상이 없다. 그런데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 불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바로 알렉산더가 뿌린 헬레니즘문화와 관련이 있다. 알렉산더는 인도북부지역 중앙아시아까지 정복의 발길을 뻗치면서 그곳에..
신약성경의 저작연대 도표화 그냥 인상적으로, 상투적으로 현재의 27서 신약성경을 접하는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편제(編制)에 의거하여 그것의 저작연대도 그냥 그 순서대로인 것처럼 생각하기가 일쑤다. 그런 문제에 별로 신경을 안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 있는 4복음서의 성립연대가 뒤에 있는 바울의 서한보다 뒤늦다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쯤은 항상 머리에 넣고 있어야 한다. 쓰여진 저작연대로만 말하면 27서 중에서 갈라디아서나 데살로니카전서가 제일 첫머리에 나와야 할 문헌이다【많은 학자들이 데살로니카전서야말로 신약성서 중에서 최고의 문헌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것은 AD 50년 겨울 고린도에서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물론 AD 50년의 상한선을 소급할 수는 없다. 그리고 바울의 저작성에 관해서도 이론이 ..
마르시온의 11서 체제 마르시온(Marcion, ?~160)이 바울의 편지 10개와 누가복음 1서, 즉 11서의 체제로써 최초의 크리스챤운동의 정경을 창출한 행위는 매우 과감하고 혁신적이며 효율적인 발상의 소치였다. 결국 그후의 모든 정경화작업이 이 체제의 심층구조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시온의 일차적 해후는 바울의 편지였다. 바울의 편지는 그에게 있어서는 유대율법과의 단절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관한 위대한 논술이었다. 그러나 이 논술만으로는 부족하다. 신도들이 예수를 믿게 만들기 위해서는 논술이 아닌, 역사 속에서 살아움직인 구체적인 예수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바울의 추상적인 예수에 대하여 구체적인 예수가 곧 복음서 속에 그려지고 있는 예수였던 것이다. 불교에 비유하자면 바울의 편지들은..
바울의 예수관 예수의 사도로서 글을 쓸 줄 아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의 반열에 낄 수 있는 최초의 인물이 아마도 바울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유대민족의 말인 히브리말에도 정통했으며 당대 세계공용어(lingua franca)인 희랍어(당대의 영어)에 통달했으며 로마시민권 소유자였으며 그레코ㆍ로망 수사학과 문학의 달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이 예수의 사도임을 자처하면서도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 관하여 관심을 표명한 적이 없다. 예수의 생전의 행적이나 말씀에 관하여 일체의 구체적 언급이 없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직전제자들을 만나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 관한 전기자료를 수집할 꿈도 꾸지 않았다. 바울에게 있어서의 예수는, 역사적 색신(色身)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다. 오로지 부활하신 예수일 뿐이다. 그는 부활..
기독교는 경전종교가 아니었다 사도행전에 보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행 4:13)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학문없는’이라고 번역한 원문은 ‘아그람마토이’(agrammatoi)인데 그것은 ‘글 쓸 줄 모르는’(illiterate)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베드로와 요한은 외견상 무식한 촌무지랭이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문맹이었다. 그의 제자들이 거개 글 쓸 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가 말한 것을 전하고 가르치고(to teach, 마 28:20) 설파하라(to preach, 막 3:14)고 명령했지, 그의 말씀을 써놓으라고 권고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는 출발부터 말씀(구두)의 종교요 행위의 종..
불타와 예수 불타는 깨달음(大覺) 자체가 매우 지적인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설법은 매우 지적이었다. 그리고 아난(阿難陀, Ānanda)과 같은 다문(多聞)의 지적인 제자가 있어 그의 설법의 기록을 전담했다. 물론 아난의 기록은 암송의 형태였다. 그리고 불타가 입적한 직후에 이미 500명의 장로ㆍ비구가 왕사성(王舍城, Rājagṛha)에 모여 불타의 말씀을 결집하여 아함과 율장의 일정한 형태로 만들었다(물론 이것도 구송의 결집이었는데 제3차 결집 때에 문서화시켰다.) 그러니까 불교는 출발부터 경전불교였던 셈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예수는 유대교전통 전체를 뒤엎을 만큼 대단한 지력의 소유자였지만 그의 강론의 내용은 전혀 지적인 것이 아니었다. 불타의 깨달음 속에는 요즈음 말..
예수의 말 예수는 당대 아람어(Aramaic)라는 히브리어와 비슷하면서 다른, 속화된 토속말(vernacular)을 사용한 사람이었다. 이 아람어는 히브리어와는 달리 페니키아 알파벳(the Phoenician alphabet)으로 표기되었다. 요번에 발견된 쿰란문서에도 아람어 텍스트가 많이 나왔다. 아람어는 원래 히브리어와 계보를 달리하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언어였는데(아브라함도 아람어를 쓴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 26:5), 기원전 6세기경부터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속어로서 자리잡았다. 그것은 특히 갈릴리지방의 흔한 일상구어였다. 그러나 유대지방에서는 일상구어로서 히브리말이 통용되었다. 예수는 히브리말을 몰랐을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일반군중들은 물론(막 10:5..
가톨릭교회 정경화작업의 시작 마르시온(Marcion, ?~160)이 정경화작업을 이미 AD 150년경에는 완성하였고, 그를 이단으로 몰아친 바에야, 그리고 그의 교세가 날로 융성하여 마르시온 정경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는 판에 그것을 비판하고 가톨릭교회 자체 내에서 정경을 따로 정립하려는 노력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사도저작성(Apostolicity)을 기준으로 성경문헌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는 책들은 모두 AD 50년~150년 사이의 1세기에 쓰여진 것이다. 이 1세기 동안 쓰여진 책만 하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는 어중이떠중이가 쓴 책이 너무도 많다. 27서 정도의 범위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AD 150년 이후에는 계속해서 어중이떠중이가 쓴..
무라토리 정경 초대교회에는 성경이 없었다. 18세기의 발굴자이며 출판인이었던 무라토리(Lodovica Antonio Muratori, 1672~1750)가 AD 170~180년경에 로마에서 희랍어로 작성되었다고 하는 성경목록을 번역한 7ㆍ8세기 라틴어 단편원고를 발견했다(1740). 이것을 우리가 무라토리 단편이라고 부르고 이 무라토리 단편에 쓰여진 성경목록을 무라토리 정경(Muratorian Canon)이라고 부른다. 이 무라토리 정경이야말로 정통파 신약의 최초의 모습을 알게 해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생각해왔다.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목록에는 ‘4복음서’가 들어가 있는데 누가복음이 ‘복음서의 세 번째’로 지목되고 있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순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르시온 정경: 정경화작업의 최초 계기 누가복음과 아포스톨리콘(the Apostolikon, 바울의 10개 서한)! 이것이 마르시온 교회의 최초의 정경이자 기독교역사에서 출현한 최초의 신약성경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마르시온은 이 정경작업에 오늘날 문헌비평(벨하우젠, 홀츠만)이나 양식사학(궁켈, 디벨리우스로부터 불트만까지)의 선구적 작업이라고 평가될 수 있는 비판적 자세를 견지했다. 그는 상기의 문헌에서 전반적으로 구약과 관계되는 부분을 삭제시켰다. 하나님을 심판자로 묘사하거나, 유대교의 예언의 성취에 관한 부분, 또는 하나님의 징벌에 관한 문구들을 삭제시켰다. 그리고 예수가 구약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구절이나 예수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구약의 인용은 모두 빼버렸다. 누가복음에서도 예수의 유아시절..
아포스톨리콘과 누가복음의 선택 마르시온(Marcion, ?~160)의 ‘구약과의 단절’이라는 테제와 관련하여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모습을 결정케 만든 교회사의 가장 중요한 사실은 구약에 대립되는 신약의 실체에 관한 것이다. 마르시온은 자기의 주장을 확고히 신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성경에 비견할 수 있는 크리스찬들의 성경을 문헌적으로 확정지을 필요를 느꼈다.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문헌들을 제한하여 교회 성경(ecclesiastical scriptures)으로 그 권위를 확립해야만 그의 신약사상을 확고히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우선 바울의 서한이었다. 그가 바울에게 경도된 것은 바울의 반율법사상(antinomianism)이었다. 그는 사도 바울이야말로..
시리아의 마르시온교회 2세기 중엽부터 5세기 중엽까지 마르시온 교회는 300년간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특히 시리아에서는 마르시온파가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끝까지 버티었다. 바울은 시리아의 다메섹(다마스커스)으로 가는 도중에 홀연히 하늘에서 빛이 둘러 비추어 개종케 되었다(행 9:3). 기독교 교회건물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명문이 새겨져 있는 건물은 다마스커스 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에 있는 한 교회다. 그 교회에 희랍어로 명백히 새겨져 있는 명문은 다음과 같다: ‘레바논의 마을에서 마르시온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처. 장로 바울의 리더십 아래 있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이 명문은 318~319년의 것으로 비정된다. ‘마르시온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당..
파문의 결과 물론 당시의 파문이라는 것이 후대의 교황의 파문과도 같은 그러한 권위나 권세를 갖지 못했다. 황제의 정치권력의 백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시온(Marcion, ?~160) 자신도 파문에 승복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마르시온의 교설이 조금도 기독교의 정통교설에 위배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시온을 파문한 것은 교부들이었지 신도들이 아니었다. 로마교회내에서 그의 인기는 열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요즈음의 분파주의자나, 사교(邪敎) 교단을 만들어 자기가 재림 예수라는 둥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둥 그따위 허탄(虛誕)한 말을 둘러대는 사기꾼과는 질이 달랐다. 마르시온은 자신을 ‘교양있는 평신도’로서만 생각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와 바울의 참된 가르침에 가깝..
도세티즘 마르시온(Marcion, ?~160)의 세계관에 있어서는 인간은 영ㆍ육이 모두 전적으로 창조의 하나님, 구약의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영혼 만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의 빛의 세계로 귀향하는 드라마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창조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고차원 하나님(the high God)이 있다. 이 고차원의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가 격절되는, 전혀 규정될 수 없는 그 무엇이며 물론 창조된 이 세계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이 고차원의 하나님은 완벽한 선의에 의하여 자기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계로 파견하여 인간을 전적으로 구원하여 새로운 고향으로 데리고 간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은 인간의 원죄에 대한 대속의 희생이 아니라, 구약의 하나님이 자기의 피조물인 인간에 ..
구약과의 단절성 변덕스럽고 폭군적이고 보복적인 구약의 하나님은 바울의 말대로 ‘율법의 저주’일 뿐이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이런 저주로부터 우리가 속량되는 것이다. 그의 해답은 매우 명료하다. 율법의 하나님이 아닌 복음의 하나님, 구약의 하나님이 아닌 신약의 하나님은 무한히 은혜로우며 자비로우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구약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전혀 몰랐던 하나님이다. 이 신약의 하나님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처음 우리에게 드러난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에게는 악의 요소가 없으며 오로지 무한한 선의 가능성만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무한한 선의지에 의하여 우리는 속량될 뿐이다. 바로 여기에 마르시온을 영지주의자로 휘몰 수 있는 선신과 악신의 이원론적 분열의 가능성을..
영지주의라는 빨갱이 논리 하여튼 이러한 맥락에서 마르시온(Marcion, ?~160)의 정당한 신약의 논리는 안타깝게도 이단으로 몰림으로써 그 새 약속의 철저한 성격이 좌절되고 만다. 구약을 인정한다는 것은 신약을 구약의 재래적 권위주의적 틀 속에서 어느 정도 타협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이라는 새로움의 후레쉬한 성격이 좀 맹숭맹숭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마르시온을 이단으로 몰아가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까지도 우리사회의 주류적 흐름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의 구미에 반하는 사상은 무조건 ‘빨갱이사상’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누가 진짜 주류인지 알 수도 없고 ‘주류’라는 것 자체가 역사 속에서 항상 전변(轉變)케 마련이지만, 하여튼 한 시대 속에서 자기들이 주류라..
신약성경의 문학적 형식과 홀로서기의 어려움 현존하는 성경의 문학적 형식을 보아도 크게 두세 가지 밖에는 없다. 하나는 드라마형식의 전기문학이고, 하나는 여러 목적을 위하여 쓰여진 편지들, 또 하나가 있다면 생각을 체계적으로 기술하는 논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생활하는 과정에서 누구든지 쓸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깊이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지식인들, 그리고 은거하면서 수도생활을 하는 승려들은, 저작이 생활화되어 있고 구라가 쎄기로 정평 나 있는 헬레니즘 문화권에서는 누구나 집필을 시도했다. ‘로마인은 말보다는 실행, 헬라인은 실행보다는 말’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듯이 희랍어를 쓰는 당대의 지식인들은 그칠 줄 모르고 논쟁과 글쓰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기독교문화권의 사방에서 경전에 해당되는 문헌이 쏟아져 나..
성경없는 초기 기독교 당시 기독교는 형성기였으며 구전(口傳)과 예배제식만 있었지 경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이 없었던 기독교!’ 이것이 당시 초대교회의 모습이었다. 1세기에만 해도 교회에서 가장 권위를 갖는 전통은 사도성(Apostolicity)의 기준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직전제자의 말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 경전적 기준이었다. 좀 너그럽게 봐준다면 직전제자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사람의 말까지는 봐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바울의 당대에도 바울이 예수의 직전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진짜 사도로 간주될 수 없다는 비방이 많았다. 바울에게 사도의 권위를 부여할 수 없다고 그를 까댔던 것이다. 그러한 비방은 인간적으로 바울을 몹시 괴롭혔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란 말입니까? 내가 사도가 아니란..
구약과 신약 우리가 기성의 교회사에 대한 편견이 없이 사태를 관망해보면, 마르시온(Marcion, ?~160)이 구약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매우 정당한 일이다. 그것은 기나긴 유대화파와의 투쟁의 역사의 결말로서는 너무도 명료한 결론이다. 생각해보라! 구약의 약(約)이란 계약을 말하는 것이다. 구약이란 ‘헌 계약’(Old Testament)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습관에서 확실히 알 수 있듯이 계약이란 새계약을 맺으면 반드시 헌계약을 파기해야 한다. 새계약을 맺을 때 헌계약증서는 찢어 버리거나 법적 효력을 발생치 못하게 만드는 장치를 반드시 한다. 헌계약이 계속 유효하다면 새계약을 맺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신봉하는 복음을 하나님과의 새계약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신약’(..
제7장 마르시온의 등장 유대인 성경의 부정 그러나 바울의 생애기간 동안에는 이 유대화파들과 이방인 사이의 알력은 강력히 유지되었다. 그의 모든 추상적 논변들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한 편에 치우친 이해 관계를 피해가기 위한 이론적 장치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장치 때문에 바울의 서한은 오히려 구체적 역사정황을 초월하는 보편성, 영원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의 사후에도 유대인기독교도들과 이방인기독교도들 사이의 알력은 첫 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2세기 초반부터는 이미 유대인들의 압력으로부터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2세기 중엽에는 완전히 유대교로부터 독립되었고 더 이상 유대인들의 종교가 아니었다. AD 144년에 정통교회조직으로부터 이단으로 간주되어 파문당한 마르시온(..
유대교여! 안녕: 하나님의 의(義) 바울에게 있어서 최소한 기독교복음이라는 것이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면 안 된다. 그것은 ‘기쁜소식’이 될 수 없다. 복음은 사람에게 ‘자유’(freedom)를 가져다 주는 것이어야 한다. 복음이란 구태의연한 율법체계에 인간을 복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새롭게 태어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이 ‘새롭게 태어남’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명제가 바울에게는 부활(Resurrection)의 궁극적 의미였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
바울의 앰비밸런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의 복음을 유대교화할 수도 없는 것이고, 유대교 그 자체를 기독교화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양자선택의 기로를 벗어나는 근원적으로 새로운 복음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 ‘새로움’을 적나라하게 어떠한 이론적 유연성의 뒷받침이 없이 노출시킨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바울의 서한을 읽어보면 항상 이러한 이율배반의 긴장감이 서려있다. 바울은 율법의 부정을 논구하면서도 율법의 준수와 율법의 완성을 동시에 논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마음이 열려있으면서도 항상 유대인들의 정통성과 기독교에 대하여 유대교라는 뿌리의 본원성과 우월성을 강조한다. 로마인서 11장에서는 기독교가 유대교라는 올리브나무 원목에 접붙여진 야생올리브 나뭇가지에 불과하다고 구질구질한 논변을 ..
메시아의 정치사적 맥락 한편 유대화파 사람들이 크리스챤 아이덴티티에 관하여 강하게 유대교 율법주의 고수를 주장한 배면에는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 즉 이스라엘민족의 사활이 걸린 정치상황이 개재되어 있었다. 때는 AD 70년 예루살렘멸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유대교 정통주의를 고수하는 사람들일수록, 또 메시아의 내림(來臨)을 갈망하는 사람일수록 로마통치로부터 벗어나는 유대인의 독립이나 혁명을 꿈꾸는 정치운동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의 오심은 세속적 정치 해방이었고 외세의 지배로부터의 벗어남이었다.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는 영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그들을 외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줄, 조약돌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기적을 일으키는 다윗과 같은 정치적 리더였다. 그래서 다윗의 출생지인 베들레헴..
할례와 크리스챤 우선 해외동포 유대인들은 당연히 바울이 선포하는 십자가 예수의 복음 그 자체를 보수적 유대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즉 예수는 유대교가 대망하던 메시아니즘의 한 성취일 뿐이므로 기독교는 유대교내의 새로운 운동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면서도 끊임없이 기독교를 유대교화하려고 했다. 이들을 교회사에서는 유대화파(Judaizers, Judaizing Christians)라고 편의상 부른다. 이 유대화파의 주장이 추상적 논변에 머물면 그 나름대로 참아줄 수도 있겠지만, 유대교 자체가 율법종교이기 때문에 이들은 구약의 토라(Torah)나 미쉬나(Mishnah, משנה)가 요구하는 모든 율법을 누구나 일상적 삶 속에서 엄숙하게 지킬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리고 이..
바울의 문제의식과 전도여행의 실상 바울이 명백하게 영지주의 이단론자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 디모데전서의 마지막 구절도 성급한 해석을 내리면 안 된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게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딤전 6:20, 한글개역판)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거짓되게 일컬어지고 있는 그노시스’(falsely called knowledge)는 ‘제대로 된 그노시스’ ‘거짓된 앎이 아닌 참된 앎’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며, 이것이 곧 영지주의에 대한 비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더구나 디모데전서는 현재 신학계에서 사도 바울의 편지로 간주되지 않는다. 첫세기말이나 2세기초 바울 정통학파가 바울의 교설을 너무 과격하게 해석하는 좌파..
형성기의 기독교: 배타없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당시 기독교는 형성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배타’(exclusiveness)라는 것이 큰 의미를 갖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무엇 하나를 배타하기에는 너무도 문명의 두께와 질감이 다양했고, 창조적이었고, 혼돈스러웠고, 절대적 권위를 갖는 리더십이나 기준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물줄기가 뒤엉키어 하나의 카오스를 이루는 콥틱 크리스챤의 일반적인 분위기를 일컬어 보통 그노스티시즘(Gnosticism), 즉 영지주의(靈知主義)라고 부른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교회사의 일반적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혼돈스럽게 그리고 의아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영지주의는 영지(그노시스)라는 말과 관련되어 매우 협..
콥틱어 콥틱어는 함족과 셈족의 혼합언어(Hamito-Semitic language)인 고대 이집트언어 발달사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된다. 무슬림국가인 이집트는 공식적으로 아랍어를 국어로 쓰고 있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이집트어는 멸절된 언어다. 이집트역사를 쓸 때에도 서로마제국의 통치가 종료된 395년부터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한 641년까지를 공식적으로 콥틱 시대(Coptic period)라고 부른다. 그것은 기독교시대(Christian period)이며 비잔틴시대(Byzantine period)에 해당된다. ‘콥트’(Copt)라는 말 자체가 아랍말 ‘쿠브트’(qubṭ)에서 왔는데, 그것은 ‘애굽부트’(Aigyptios)라는 희랍어가 와전된 것이다【우리말의 ‘짱꼴라’가 중국인 즉 ‘종꾸어르언’ 이 와전된 것..
콥틱 크리스챤 이집트의 상형문자(monumental hieroglyphics)는 BC 3000년경부터 AD 3세기까지 지속된 고문자이다. 그것은 피라밋 텍스트, 왕들의 전기 텍스트, 그리고 종교적 목적을 위하여 고귀하게 쓰였다. 그런데 BC 7세기초부터 그 상형문자의 간략화된 초서체(cursive form)가 발전하여 상업, 문학, 공문서 등 일상생활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매우 보편적으로 쓰였다. 그것을 디모틱문자(Demotic Script)라고 한다. 희랍말 데모티카(demotika, 대중적인)에서 왔기 때문에 ‘민용(民用) 문자’라고 한다. 이 디모틱문자는 희랍제국인 프톨레미왕조(the Ptolemaic period, BC 304~30)시대에 점차 희랍어로 대치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프톨레미 왕..
제6장 바울의 기독교운동 초대교회사의 재발견: 나그 함마디 여태까지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의 지적 분위기를 말하기 위하여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해 가면서 기독교 교리의 매우 근원적인 많은 문제들을 논의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가 원래 말하고자 했던 논의의 맥락은 사해문서라고 흔히 불리우는 쿰란사본의 발견에 비견할, 어찌 보면 미래적 가치에 있어서 그것보다 훨씬 더 심원한 중대성을 지니는 또 하나의 발견에 관한 것이었다. 이 발견은 바로 쿰란커뮤니티가 끝난 시점(AD 68)에서부터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의 시대(AD 367)에 걸치는 300여 년의 초대교회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드는 대 사건이었다. 1945년 12월의 사건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나일강을 따라 한 100마일을 거슬..
기독교는 황제교도, 존재론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와는 전혀 무관한 철학적 사유의 장난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에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이 융합된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강요하는 교리에 의하여 기독교를 접근하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현금(現今)의 우리나라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전면부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의 가톨릭은 정치권력과 분리된 종교조직이며 과거의 가톨릭이 아니다. 가톨릭이란 원래 초대교회사에서 로칼한 지방교회들의 분열이나 이단의 발호를 막기 위해 신앙의 공통성을 기준으로 하여 자연적으로 형성해간 보편적 교회(Universal Church)란 뜻이다. 가톨릭이란 말 자체가 희랍어의 카톨리코스(katholikos)에서 온 말이며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그 보편교회..
실체라는 개념은 기독교와 무관 니케아신경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의 실체이다’(homoousion tō Patri)라고 했을 때, 실체라는 말도 전혀 복음서와는 관련이 없는 언어이다. 그것은 우시아(ousia)라는 말인데 그것은 당대에 유행하던 스토아철학을 통하여 삼위일체 논쟁에 끼어든 희랍철학의 개념으로서 피타고라스(Pythagoras, c. BC 580~500) 학파에까지 소급해 올라간다. 우시아라는 말의 실제적 함의도 매우 다양하고 애매해서 감각적 사물의 현상세계에 적용될 수도 있고, 그러한 변화의 세계(genesis, becoming)와 대비되는 그것을 초월하는 비감각적 예지계의 불변의 존재(ontos on, being)를 의미하기도 한다. 우시아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실체(substance)나 ..
관계의 절대성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인식한 것은 하나님이 유일하다는 것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탕자를 무제약적으로 사랑하고 천만번이라도 받아주는 자애로운 아버지와의 ‘관계의 절대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관계의 1차적 절대성은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자 예수와의 관계의 절대성이고, 우리 인간은 독생자 예수와의 관계의 절대성을 통해서 그러한 절대적 관계로 돌입한다. 절대적 관계라는 말은 하나다 둘이다 하는 수비적(數比的) 관계를 모두 단절시킨다. 조금 위험한 비유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할 때, 내가 진정으로 절대적으로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 여자와의 절대적 관계 이외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삶의 의미체계에 있어서 그 ..
아버지 하나님은 존재일 수 없다 이러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은 그레코-로망의 이방세계에 기독교회가 자리를 잡으면서 헬레니즘-로마의 다신론적 세계에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신관을 한결같이 유일신론이라는 배타적 틀 속에서 어필시키고 다신론적 신앙을 멸시하는 정치적 행동을 일삼게 되자(한국 기독교인들이 서낭당이나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 헬레니즘의 사상가들은 결국 예수를 신이라 말하는 너희들의 유일신앙도 다신론이 아니냐고 하는 반론을 펼치게 되었고, 이에 대한 강력한 아폴로지로서 삼위일체론은 대두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인식한 것은 사실 유일신론의 보편 논쟁에 휘말리게 되면 매우 불리한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의 인격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삼위일체론은 비성서적 논쟁 그러나 이러한 세 개념의 병치가 삼위일체(Trinity)의 논쟁을 불러 일으킬 하등의 이유는 없다. ‘성부ㆍ성자ㆍ성신’이라는 말은 복음서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가톨릭교회내에서 성립한 삼위일체 논쟁 이후의 독단론적인 교리개념일 뿐이다. 복음서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아버지(파테르)와 아들(휘오스)’이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개념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자기이해 속에서 일차적으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가부장적인 유대인 가정 속에서 지극히 일상적으로 쓰였던 토속적인 개념일 뿐이며 예수는 아예 아람어로 ‘아바’(Abba)라고 말한다(막 14:36, 로 8:15, 갈 4:6).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과도 같은 아주 친근한 호칭이다. 아버지(파테르)는 요..
삼위일체론의 정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요 1:14)는 이야기도 예수라는 특수존재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일반이 될 때에는, ‘인간 = 예수 = 하나님’의 등식이 전개될 수 있는 근거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분위기는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이 자유롭게 허용되었고, 많은 사람이 그러한 방식으로 케리그마를 이해하고 다양한 운동과 창조적인 저술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방식은 결국 이단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유대이즘의 유일신론적 사유의 틀은 인간과 하나님의 횡적인 연대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을 강하게 거부한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설정은 궁극적으로 종적인 일방성이다. 그 일방성의 방향은 인간에서 신에로의 방향이 아니라, 철저히 ..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 예수는 사람일까 하나님일까? 우선 이런 질문에 우리가 논리적으로 맞부닥뜨리면 매우 당황케 되고 부수될 수밖에 없는 많은 논리적 문제가 부담스러워진다. 우선 예수를 완전히 하나의 사람으로만 간주해버리면, 우리와 완전히 똑같은 하나의 인간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모든 특별한 규정이 의미를 상실하고 ‘역사적 예수’라고 하는 시공 속의 합리적ㆍ과학적ㆍ상식적 추론체계만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린다. 그렇게 되면 예수는 단순한 세속의 역사적 사건이 되어버리고 구속사적인 종교적 의미가 증발되어 버린다. 그리고 평범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인간 위인을 그렇게 우리가 예배하고 신앙하고 따라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진다. 복음서는 평범한 위인전기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타나시우스 아타나시우스는 이집트 사람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성장하면서 철학과 신학을 깊게 공부한 인물로서 이미 니케아 종교회의에 알렉산더 주교를 수행한 집사(deacon)로서 참석하여 아리우스 논쟁의 현장을 목격하였다. 그런데 3년 후(328) 알렉산더 주교가 병사하자 그 후임으로 발탁되어, 젊은 나이에(35세)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되었다. 그는 주교가 되자마자 이집트와 리비아 전역을 여행하면서 자기 교구의 상황을 세밀하게 직접 관찰하였고, 나일강 유역의 콥틱어를 쓰는 수도자들과 교류하였고 그들의 지도자인 파코미우스(Pachomius)와도 교분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리코폴리스의 주교인 멜레티우스(Meletius of Lycopolis)와 아리우스의 이론을 이단으로 휘몰아치며 니케아 신경(信經)..
동방교회의 일반적 정서 니케아 종교회의(325)에서 비록 동체(homoousios)론 조항을 집어 넣은 신경(creed)이 반포되기는 했지만, 니케아종교회의에 참석한 주교들 가운데서 서방주교는 단지 6명일 뿐이었고, 300여 명의 동방 주교의 대부분은 아리우스를 지지했다. 막강한 니코메디아(Nicomedia)의 주교 유세비우스의 열렬한 위호(衛護)가 있었고 그 회의를 실제적으로 주도해간 팔레스타인의 대도시 카이사레아의 주교 유세비우스(동명이인이므로 주의할 것), 최초의 초대기독교역사인 『교회사』와 『콘스탄티누스의 생애』를 저술한 그 유세비우스도 중도적 입장을 취하긴 했지만 아리우스의 논의의 합당함에 기울어져 있었다. 동방교회의 일반적 사상분위기는 다원론(pluralism)이었고 종속론(subordinat..
호모우시온 결국 니케아 종교회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알렉산더 주교의 편을 들 수밖에 없는 분위기로 흘러갔고, 아들도 아버지와 똑같은 신격의 존재라는 신경(信經)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실체이다’(homoousion to Patri)라는 ‘호모우시온’(同體)의 니케아신경(the Creed of Nicaea)은 그후 끊임없는 반박과 수정을 거쳐야 했지만 끝내 삼위일체론(Trinity)의 정통이론이 되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강압적 정책으로 아리우스파의 공식적 반박은 자취를 감추었으나, 새롭게 유럽역사에 등장한 게르만 통치자들의 입교자 중에 아리우스파가 많아 그 영향력은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었다. 오늘날에도 16세기의 합리적 종교개혁파와 매우 리버럴한 칼비니스트(Calvin..
가현설의 위험성 이러한 논의에 관하여, 하나님과 창조된 세계를 매개하는 중간자(mediator)로서의 로고스(Logos, 말씀)를 설정하고, 그 로고스가 곧 예수라고 말하는 이론이 가능하다. 아리우스도 초기에는 이러한 중간자이론을 활용하여 어떤 타협점을 생각해보려고도 한 것 같지만 결국 아주 정직하게 결론을 내려버렸다. 로고스도 창조자이거나 피조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애매한 중간이론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예수를 신과 동일한 실체로 만들어버린다면 예수는 실제로 이 시ㆍ공의 세계에 속할 수가 없다. 창조된 존재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계 속에서의 예수의 모든 활동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허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막말로 하나의 유령(phantom)이 가현(假現)하여 돌아 다니는 것이..
아리우스의 예수인간론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대중에게 감화를 주면서 기독교의 신앙분위기를 쇄신하고 선풍을 일으켰던 아리우스의 주장 가운데, 가장 핵심적이면서도 아리우스가 끝내 한치도 양보하지 않은 테마가 곧 ‘예수는 인간일 뿐이다’하는 것이었다.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오늘까지도 아리우스는 흉악한 이단자로 취급되고 파문과 저주의 대상이 되었고 기독교의 정통사상과 타협하기 어려운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것은 당시 개명하고도 고상한 알렉산드리아 초기기독교도들의 리버럴한 사상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대변한 사상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아리우스 사상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직접 중재가 필요할 정도로 문제시되었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아리우스는 당시 로마세계 전 기독교인들의 존경받는 지적 거물이었고 일반..
네오플라토니즘 궁극적 유일자(to hen, the One)만이 모든 대립과 차별을 초월한 유일절대의 실재이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만물의 세계는 이 유일자로부터 유출(emanatio)되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유출된다 해도 대립과 차별을 초월한 유일자 그 자체는 증감이나 변화가 없다. 유일자는 우리의 사유나 언어가 단절되는, 규정불가능한, 기술 불가능한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절대자이다. 유출에는 단계가 있으며, 그 유출의 단계는 ‘타락’(Fall)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 3단계는 이성(nous), 영혼(psyche), 물질(physis)이다. 유일자로부터 가장 멀리 유출된 물질은 죄악의 정도가 가장 높다. 물질은 물리적인 3차원적 공간의 세계이며 우리의 몸을 구성한다. 이성이 영혼으로 타락..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 아리우스는 리비아(구레네)에서 이주하여 온 부모 밑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때 분열주의자로 몰린 멜레티오스(Meletios of Lycopolis)에게 사상적으로 동조했다가 연좌·추방되어 고행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한 고난의 기간 동안에 그는 영적 체험을 한 듯하다. 그리고는 매우 강력한 영적 설교자로 다시 등장한다. 그는 312년 봄 아킬라스(Achillas)의 교구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인들의 분위기는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5~316)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의 기독교박해 이후 매우 침체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혜성처럼 등장한 아리우스는 기독교인이 가장 밀집한 알렉산드리아 한복판의 바우칼리스(Bauca..
제5장 삼위일체 논쟁 어두운 중세기의 시작 초기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라는, 헤겔 말을 빌리면 ‘세계사적 개인’(World-Historical Individual)을 통하여 로마를 정복하고 로마로 통한 모든 세계의 길을 정복했지만, 로마와 더불어 그 진실한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을지도 모른다. 소아시아의 도시 니케아에서 300여 명의 기독교 주교들을 소집해놓고 기독교 교리에 관하여 그 입심 거센 주교들의 논쟁을 주재하고 앉아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습은 이미 어두운 서양 중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니케아 종교회의(Council of Nicaea, 325년 5월)에서 문제가 된 사안은 바로 초대교회의 센터인 알렉산드리아의 두 종교지도자간에 7·8년 동안 비판의 거센 불을 뿜은 논쟁의 조정에 관한 것이..
예수는 음모와 권세 속에 있지 않다 과연 로마는 콘스탄티누스의 계획대로 기독교라는 새로운 활력소로 인하여 되살아났는가? 결코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로마의 멸망은 이미 결정된 것이다. 기독교라는 요소가 결코 쇠망의 길로 접어든 로마를 흥성의 길로 역전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로마의 문제는 이미 창조성을 결여한 시민사회의 도덕적 해이(moral laxity)였다. 로마와 접합된 기독교는 이미 권위화된 기독교였으며, 그 유일성과 배타성과 절대성은 로마사회를 더욱 경직시켰으며, 멸망을 재촉시켰다. 결국 기독교는 로마의 멸망을 한 1세기 더 연장시켜 준 셈이지만, 너무도 중요한 사실은 그 멸망연장기간을 통하여 너무도 심각하게 향후 모든 유럽역사의 발전을 기독교 일색(一色)으로 염색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콘스탄티..
천국을 도둑질하고 죽은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누스, 그는 골(Gaul)족과의 전쟁(316~22)에서도 승리한 후, 북방 바바리안들의 왕들과 수천 명의 부하들을 함께 야수의 먹이로 던져주었다. 이러한 끔찍한 사건은 이교도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모두 기독교공인 이후의 행적들이다. 그는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도 세례받기를 거부했다. 그는 요단강에 가서 직접 세례를 받겠다고 하면서 미루기만 했다. 그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죄가 사함을 얻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의 삶의 최후의 순간까지 그가 저질러야 할 너무도 많은 죄악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례의 순간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337년 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소아시아로..
콘스탄티누스의 교활한 삶 콘스탄티누스는 310년 자기 아내의 아버지였던 선제(先帝) 막시미아누스(Maximianus)를 죽였다. 2년 뒤인 312년에는 아내의 오빠인 막센티우스(Maxentius)를 밀비우스 다리에서 무찔러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다리밑 테베레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익사한 시체를 다시 참수하여 그 대가리를 창끝에 꽂고 로마에 입성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결정적인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밤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현몽하여 승리와 그 모든 것을 예시하였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325년에는 자기 이복누이의 남편인 정제(正帝) 리키니우스(Licinius)를 전투에서 무찔렀다. 리키니우스는 제위의 상징인 보라색 망토를 벗고 콘스탄티누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일개 야인으로 은퇴하..
황제교와 유일신교 6명의 황제가 1명의 황제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타협이 이루어진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현명한 술책이었다. 6명의 황제란 ‘다신교’ 를 의미한다. 1명의 황제란 ‘일신교’를 의미한다. 로마의 황제는 옥타비아누스 이래로 신성의 상징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3세기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방불케하는 혼란기를 거치면서 황제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졌다. 설사 콘스탄티누스가 무력으로 내란을 제압하고 독존의 1인 황제가 된다 해도 그 권위가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로마는 어디까지나 공화제를 거친 시민사회였기때문에 황제등극의 권위준거가 로마시민과 로마원로원에 있었다. 황제 스스로 자기에게 권위를 부여할 수 없었다. 공화정시대에는 최고의 권력자인 집정관을 시민집회에서 선거로 결정했던 것..
밀라노 칙령 사두정치가 안정적으로 지속될 까닭이 없었다. 그리고 부제(副帝)에 취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제(正帝)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이 4명의 황제들은 인척관계로 얽히게 된다. 콘스탄티누스는 서방의 부제(副帝) 콘스탄티누스 클로루스(Constantinus I Chlorus, ?~306)의 아들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5~316)로부터 시작된 사두정치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은퇴 이후로는 그의 자리를 메꿀 인물이 없었다. 따라서 사두정치는 마구 엉켜들어갔고 306년에는 자그마치 6명의 황제들이 난립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콘스탄티누스는 그중의 한명이었다【312년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에 이르는 자세한 상황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제13권 ..
황제교화된 기독교 우리가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니고, 순교자를 믿는 것이 아니고, 교회사를 믿는 것이 아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역사는 성서주의의 본연으로부터 너무 이탈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가 아니라 황제교화(皇帝敎化)된 다른 차원의 기독교의 발자취라 해야 할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공인을 3세기에 걸친 박해와 순교와 이방 선교의 찬란한 극적 승리로서 간주하는 것은 역사적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기독교는 이미 알렉산드리아, 팔레스타인,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 카르타고, 리옹 등지에 막강한 교구제와 주교를 정점으로 하는 장로·집사 등 성..
순교의 자원(自願) 초대교회의 순교의 역사는 로마라는 정치권력의 박해에 기인하기보다는, 교회 내부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종말론적 신념체계 그 자체의 문제점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 초대교회 순교자들은 순교를 갈망했다. 그들은 하루 속히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 속세의 삶을 종료시키기를 원했다. 그들의 순교는 영웅적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영웅적 순교를 통해 하늘나라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기술을 도올의 편견으로 오해할지도 모르는 독자들은 당시 로마법정기록을 수없이 열람한 20세기의 대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 1889~1975)의 다음과 같은 증언에 귀를 기울여 봄직하다. 초기기독교의 광신주의는 기독교 이전의 이교도문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
초대교회와 네로 박해의 실상 초대교회의 역사는 실제적으로 시이저가 암살되고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사람이라는 뜻)의 칭호를 획득한 이후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 시대, 즉 제정 로마의 최전성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로마의 제정(帝政)은 제정이기는 하지만 공화정(共和政)의 축적된 전통의 기반 위에 서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가혹한 전제군주들이 아니었다. 초기기독교가 팍스 로마나의 평온한 분위기에서 세력을 팽창시켜 간 시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 161~180 재위)에 이르는 5현제시대였다. 네로의 크리스챤 박해도 실상과는 달리 크게 부풀려진 이야기일 것이다. AD 64년의 대로마화재사건의 주범으로서 기독교인들이 희..
셉츄아진트와 쿰란 텍스트 프톨레미 2세(Ptolemy II, BC 285~246)는 유대인들에게 희랍어 성경을 만들 것을 요청했다. 12지파에서 각기 6명씩 선출된 72명의 학자가 72일 동안 제각기 독립된 골방에 쑤셔박혀 번역했는데 나중에 맞추어보니 번역의 결과가 정확히 일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 전설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라고 유대인학자들은 그 실체성을 인정하고 있다. 각 부족에서 합의를 거쳐 공동의 노력으로 정밀하게 이루어진 번역이라는 뜻일 것이다. BC 3세기~2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이 번역을 보통 ‘셉츄아진트’(Septuagint), 우리말로는 ‘칠십인역’이라고 부른다. 셉츄아진트는 그 나름대로 마소라 텍스트와는 다른 체제를 가지고 있으며, 전통적인 히브리경전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알렉산더가 이집트를 정벌할 때, 유대인들은 그를 도와 첩자나 용병구실을 했다. 그래서 알렉산더대왕은 그 대가로 이 새로 만든 도시의 일정구역을 유대인의 거주지역으로 만들어주고 유대인들에게 유리한 생활조건을 허락하고 그들의 활동을 장려했다. 유대인들은 유리한 삶의 조건만 있으면 이동하는 데 익숙해 있다. 곧 대량의 유대인 이주가 이루어졌고,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이즘과 헬레니즘이 교차ㆍ융합하는 코스모폴리스(cosmo-polis)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 이주하여 온 유대인들은 개방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문화수준이 높았다. 그리고 그들은 헬레니즘의 모든 것을 편견없이 흡수하였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라화된 유대인들이 만들어간 도시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시대에는 이 세계적인 문명도..
예수의 현대사 프톨레미왕조의 마지막 여왕, 로마 공화정의 가장 찬란했던 두 영웅, 줄리어스 시이저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기원전 82년경~기원전 30)를 사랑의 열정과 권세의 탐욕의 불길 속에 파멸시키고 끝내 독사의 이빨에 39세의 탐스러운 몸매를 던져 온갖 황금으로 치장된 침대 위에서 장엄하게 운명의 막을 내린 클레오파트라(Cleopatra VII, BC 69~30), 그 숙명의 여인이 활약하던 무대, 셰익스피어가 영원한 로맨스를 연출한 그 무대도 바로 알렉산드리아였다.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버리라’(마 2:16)고 명령해서 예수의 출생이야기에 스릴감을 더해주었던 인물,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B..
알렉산드리아 쿰란 사해문서의 발견과 동시에 이루어진 또 하나의 거대한 발견은 요르단강변이 아닌 나일강변에서 이루어졌다. 초기기독교의 역사에 있어서 나일강은 매우 중요하다. 나일강 하구에 있는 아름다운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때문이다. 우리는 알렉산드리아하면 지금 이집트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별볼일 없는 무슬림의 도시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알렉산드리아야말로 예수시대에는 지중해 연안문명에서 가장 번성한 최대·최고의 문화도시였다. 알렉산더대왕은 자기가 정복한 헬레니즘 대제국의 본산으로서 아테네를 능가하는 새로운 문명의 센터를 이곳에 건설하려 했다. 마레오티스(Mareotis, Lake Maryūt)라는 거대한 호수를 끼고 있는 이곳은 새로 정복한 이집트 영역의 신 수도였으며 지중해를 장..
쿰란 발굴의 역사적 의미 사해쪽에서 바라보면 달이 걸려있는 언덕이라고 해서 이름 지어진 이 쿰란(Qumran, moon hill)지역 공동체는 엄격하게 유대인공동체였고, 구약성서의 모든 것, 그 율법과 유대교전통을 신봉하는 규율집단이었다. 자기들이야말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비하기 위하여 악과 전쟁을 해야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하여 선택된 새로운 계약공동체라고 믿었다. 이들이 본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발굴은 구약성서에 관하여 우리가 물리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최고(最古)의 사본을 엄청나게 대량으로 제공했다. 이로써 마소라텍스트 히브리어성경과 셉츄아진트(Septuagint, 칠십인 역), 사마리아오경(Samaritan Pentateuch) 등 현존하는 문헌의 가치를 형량할 수 있는 정확한 기준이 ..
쿰란과 엣세네 ‘세례를 통하여 죄사함(forgiveness of sins)이 이루어진다(사 5:31)’는 발상은 전혀 유대교적인 전통이 아니다. 불트만과 같은 석학도 그것을 동방종교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페르시아나 바빌론의 고대신화 제식의 영향으로 간주한다. 후대의 만대아교(Mandaeanism)의 세례제식도 요한의 운동이 발전해나간 것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 공동체와 쿰란공동체 사이에는 세례라는 제식의 공통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말론적 기대, 즉 메시아 대망사상이나, 우주의 종말, 마지막 심판, 그리고 회개 등등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세례 요한을 엣세네파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나 도올은 그렇게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례 요한의 사상과 쿰란공동체 사..
세례요한과 쿰란공동체 이 쿰란공동체는, 예수시대의 유대인 역사가인 프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100년경)의 엣세네파에 관한 상세한 기술과 일치하는 많은 문서적 근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연구결과는 쿰란을 대강 엣세네파 공동체로 간주하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복음서에는 바리새인(the Pharisees)이나 사두개인(the Sadducees), 열심당원(the Zealots) 등은 언급되고 있지만 엣세네파(the Essenes)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엣세네파도 세례 요한이라는 역사적으로 그 실존성이 확실히 인정되는 인물과의 관련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신약성서의 한 시대배경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엣세네파의 한 사람이었..
제4장 콘스탄티누스의 공인까지 성서고고학의 양대 사건: 쿰란과 나그 함마디 20세기는 동·서문명의 고전학(古典學)에 있어서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진 세기였다. 황하(黃河)문명권의 최고의 지혜의 서라 할 수 있는 『노자(老子)』의 백서(帛書, 비단에 쓴 책) 고판본이 2종이나 완정한 형태로 호남성(湖南省) 마왕퇴(馬王堆, BC 168년 무덤)에서 발굴되었고, 『주역』의 백서고판본과 대량의 고귀한 고전판본들이 같이 출토되었다. 1973년 11월부터 74년초에 걸친 사건이었다. 그리고 1993년에는 호북성(湖北省) 곽점촌(郭店村)에서 BC 3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노자』 죽간본(竹簡本)이 나왔다. 그외로도 중국 최고의 문자인 갑골문(甲骨文)이 새겨진 귀갑(龜甲)ㆍ우골(牛骨)의 발견, 명문이 있..
헬레니즘의 로고스를 격파한 기독교 사도 바울이 헬라문명권에서 성장한 헬라화된 유대인이며 헬레니즘이 유창한 희랍어를 통하여 체화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가 펼친 논리를 헬레니즘적 사유체계 속에서만 규정해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헬레니즘의 인본주의적 합리성의 암벽을 뚫고 들어가는 유대전통의 독특한 사유체계와 믿음체계, 그리고 그러한 초합리적 사태를 해석하는 바울 자신의 독특한 논리체계를 독자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 자신의 독창적 창안이 아니라 예수라는 실존체의 말씀과 뚜렷한 내면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예수는 신화다』의 저자는 초대교회의 성립사에 관하여 보다 면밀한 고찰을 했어야 했다. 도대체 예수의 실존성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최초의 팔레스타인의..
사도 바울의 도전 사도 바울은 우선 다신론적인 아테네의 분위기를 지적한다. 신상으로 가득 차 있는 아테네의 거리를 보고 우선 헬라스 사람들이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해준다. 그러나 신들이 하도 잡다하게 많아, ‘미처 알 수도 없는 신’들에게까지 제사지내고 있는 그들 신앙의 그릇된 현황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이 경배하는 신들, 이름도 다 기억할 수 없는 그들의 신들은 인간의 형상을 한, 인간의 협애한 상상력 속에서 제조된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모든 우상들을 초월하는 이 전 우주의 창조자로서,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서, 사람이 만든 신전에서 살지 않는 구체화시키기 어려운 단 하나의 하나님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돌이나 은이나 금으로 만든 형상은 아니지만 모든 개개인의 ..
회의학파 회의학파(Skeptics)는 실천론이 아닌 지식론에 있어서 아타락시아(ataraxia)를 추구했다. 일체의 이론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을 중지시킴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누리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의 지각은 결코 외물(外物)의 진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며,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승인하지 않을 수 없는 보편적 진리란 존재할 수 없다. 궁극적 실재에 관하여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명제에 대하여 확실한 진위 판단을 내려서는 아니 된다. 이러한 판단 중지를 이들은 에포케(epochē)라고 불렀다.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말고, 어떤 것에도 동의하지 말라! 신플라톤주의자로서는 플라톤철학에 의하여 유대교를 해석하고 신학의 체계화를 꾀한 유대인 ..
에피큐로스학파 에피큐로스학파(Epicurianism)는 쾌락(pleasure)이 유일한 선이라고 주장한다. 쾌락은 축복된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학문이건, 도덕이건,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쾌락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영어로 ‘에피큐어’(epicure)라 하면 ‘식도락가’라는 의미가 된다. 이들은 모든 선의 근원은 위(胃)의 쾌락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탐식(貪食)을 하면 위에 고통이 올 것이다. 따라서 위의 쾌락을 위해선 절식(節食)이 요구될 것이다. 참다운 미식가들은 먹는 것을 잘 조절해야 한다. 사람이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내적 본성이다. 그러나 문제는 쾌락의 강도와 지속에 있다. 과도한 쾌락의 추구는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
스토아학파의 사상 견유학파(Cynicism)의 사상은 스토아학파(Stoicism)의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스토익들(Stoics)은 견유학파의 자기절제와 세속적 가치에 대한 무관심을 계승하였지만 문명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최소한의 즐거움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참다운 인간의 행복이란 어떠한 외재적인 것에 의하여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의 경지, 아파테이아(apatheia)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연에 따르는 생활을 하라’고 충고한다. 그들에게 자연이란 로고스(Logos)이며 이성이다. 그리고 인간의 덕(Virtue)이란 바로 이성에 복종하는 것이다. 욕정(passions)은 영혼의 질병이다. 자연에 따르는 생활이란 이성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며, 그것은 곧 이성..
견유학파의 가치관 견유학파(Cynicism)의 견유(犬儒, cynic)란 문자 그대로 ‘개 같이(canine) 사는 지식인’이란 뜻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이미 이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반문명적이었나를 알 수가 있다. 이들은 종교, 풍습, 옷차림, 집, 음식, 예절 등 일체의 인간세(人間世)의 전통을 부정하였다. 그들은 일년 내내 한번도 빨지 않은 남루한 옷을 걸치고 구걸하며 살았다. 그들은 전 인류에 대한 동포애뿐만 아니라 동물 전체에 대한 동포애를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상가 시노페의 디오게네스(Diogenes of Sinope, BC 412~323)는 평생을 절구통 속에서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알렉산더대왕이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절구통 속을 들여다..
제3장 헬레니즘의 사유 아타락시아 헬레니즘시대에는, 희랍고전시대의 철학이 우주의 본체를 추구하는 존재론적 탐구(ontological quest)에 집착하였다고 한다면, 다시 동방사상의 유입으로 인생론적 문제, 개인의 구원과도 같은 아주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들은 덕(德, aretē)을 말하였고, 행복(eudaimonia)을 말하였고, 마음의 평정, 즉 아타락시아(ataraxia)를 말하였다. 희랍의 초기 자연철학이 페르시아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페리클레스(Perikles, BC 495년경~429) 황금시대를 맞이하면서 소피스트철학의 난무로 장이 바뀌었듯이, 알렉산더대제의 제국문명이 도래하면서 또다시 인간의 삶의 문제에 관하여 근원적이고도 합리적이고도 보편적인 해결을 꾀하려는 운동들이 활..
알렉산더 세계정복의 의미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알렉산더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323)은 자기 스승의 구태의연한 형이상학적 세계질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관념이 아닌 이 시공, 이 땅 위에 개척하는 데 광분한 패기 넘친 젊은이였다. 젊은 알렉산더는 BC 334~324의 10년이라는 매우 짧은 기간에 헬레니즘(Hellenism)이라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수립했다. 그는 원래 마케도니아 사람이라서 아테네중심의 희랍질서로부터는 변방적인 인물이었지만 그만큼 그는 희랍질서를 편견없이 동경했고, 그가 정복하는 모든 곳마다 희랍의 모든 것, 도시, 언어, 철학, 가치관, 삶의 방식, 종교, 예술, 과학 등 그 모든 것을 전파했다. 그가 10년 동안 정복한 세계는 아시아와 ..
피타고라스와 싯달타 오르페우스는 전통적인 바카스축제가 지나치게 광란의 오르지(orgy)로 흐른 것에 새로운 정신적 요소를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즉 엑스타시를 광란에 의하여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초기승단의 선정(禪定)과도 같은 금욕의 방법을 강조했다. 육체적 도취를 정신적 도취로 대신하려 했던 것이다. 오르페우스를 박카스신앙의 개혁자라고 한다면, 오르페우스종교를 개혁하려고 했던 매우 혁신적이고도 신비로운 사상가가 바로 피타고라스(Pythagoras, c. BC 580~500)였다. 그는 이태리 남부에 있던 그리스 도시 크로톤(Croton)에 매우 신비로운 종교집단, 그러니까 나중에 사해부근에서 사해문서의 발견과 함께 고고학적 발굴로 드러나게 된 쿰란 커뮤니티와도 비슷한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그 속에서..
오르페우스와 바카스 하여튼 오르페우스교도들은 오염된 생활을 피함으로써 그들의 몸을 정화시키려고 힘썼다. 정통파들은 고기를 먹어야 하는 제식의 불가피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평상시는 불교도들처럼 육식을 하지 않았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은 하늘적 부분과 땅적인 부분으로 합성되어 있다. 정화된 생활을 계속하면 땅적인 부분이 감소하고 하늘적 부분이 증가한다. 하늘적 부분이 증가하는 종국에는 인간은 바카스와 합일되는 경지에 도달한다. 그때 우리는 그를 하나의 ‘바카스’(a Bacchus)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을 형이상자(形而上者)와 형이하자(形而下者)의 결합으로 파악하는 『주역』 「계사」적인 세계관이나, 하늘적인 기(氣)와 땅적인 혈(血)의 합성으로 파악하는 『내경』의 기혈론적 세계관을 연상할 수도 있겠지..
기독교사상에 스민 윤회론 역사적으로 오르페우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이러한 전설로써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역사적으로 그는 그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갈기갈기 찢기는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종교의 교리는 잘 알려져 있다. 신도들은 인간의 영혼이 윤회한다는 것을 믿었다. 윤회(the transmigration of souls)란 인간의 영혼이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끊임없는 수육(受肉)과 죽음과 해방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전생의 업보는 후생에 도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윤회사상을 우리는 불교의 전유물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윤회의 사상은 희랍을 포함한 지중해연안문명으로부터, 중동, 중앙아시아, 인도문명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
제2장 신화와 철학 희랍인들의 신화적 세계관 신화(神話, myth)라는 것이 있다. 신화란 문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이다. 신들은 역사 밖에 있다. 신들에게는 우리가 역사 속에서, 그러니까 시공의 지배를 받는 세계 속에서 체험하는 인과관계가 적용되지 않는다. 신들의 세계에 있어서는 죽음과 부활은 다반사(茶飯事)이다. 희랍세계에서 아주 유행했던 바카스축제의 주인공인 디오니소스(Dionysus)만 해도 기구하게 태어났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Zeus)와 테베의 왕 카드무스의 딸인 세멜레(Semele)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는 질투를 느껴 세멜레에게 제우스가 침실에 올 때, 신의 본래 모습으로 나타나 달라고 애원하게 만든다. 제우스는 세멜레에게 어떠한 소원도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했기 ..
이적의 여섯 가지 의미맥락 첫째, 예수는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 이러한 나의 말에 놀랄 많은 기독교인들의 얼굴이 떠오르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예수는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는 역사적 실존인물로서의 개인 예수다. 역사적 실존인물인 예수라는 개체가 주어가 되어, 그 행위의 주체가 기적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이비종교들을 주창하는 사람이나, 예수와 같은 권능을 나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목사나 전도사들이나 부흥사들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성서를 왜곡하고 크게 자신의 존재를 곡해하고 참칭하는 것이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메시지는 바로 나 예수가 주체가 되어 너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바로 너의 구원의 주체는 ‘너의 믿음’이라는 확증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예수 이적 행함의 특징 뿐만 아니다. 예수가 자기가 기적을 행한다는 것을 자랑하거나 뽐내거나, 또 자기 앞에서 그러한 기적이 실제로 벌어진다는 사실을 신나해 하지 않았다. 나의 말이나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으로 썩은 송장도 벌떡 일어서는 기적이 막 일어나는 것을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자기 홀로 있을 때에도 기적행함을 신나게 연습했을 것이다. 마치 마술사들이 골방에서 마술을 연습하듯이.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행태를 전혀 비치지 않는다. 예수가 갈릴리지역의 군중 속에서 수많은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찾아와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표가 될 만한 기적을 보여달라고 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만약 예수가 기적을 신나게 행하는 사람이라면 이때야말로 하나님의 징표..
과학적 세계관의 고뇌 교회는 사교집단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세속적 역사(secular history)의 현상이 아니다. 교회 즉 엑클레시아(Ecclesia)는 그 자체가 종말론적 사건의 일부이며,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골 1:18, 24, 엡 1:22).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 안의 사건일 뿐이다. 인간의 말과 생각만이 난무하는 세속집단이 아닌 것이다. 교회라는 세속적 조직을 구원의 주체로서 운운하는 것은 모두 교부철학이나 스콜라철학 이후의 정치권력의 조작적 사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적을 행한 예수는 자신이 행하는 기적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예수는 자기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의 모든 사건을 ‘아니 땐 굴뚝의 연기’로..
그대로의 성서 수용 예수의 동정녀 탄생설화로부터 시작하여 그가 행한 수많은 기적들, 그리고 그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등등, 예수라는 담론을 구성하는 모든 사건들이 한마디로 ‘아니 땐 굴뚝의 연기들’이다. 인간의 탄생은 반드시 정자와 난자의 결합에 의하여, 그러니까 감수분열을 거쳐 46개가 아닌 23개의 크로모좀(chromosome, 염색체)을 가진 두 남녀 생식세포의 결합과 난할과 기관분화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시절에는,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복음서의 저자들이 활약하던 시대에는 이러한 생식세포들의 크로모좀과 발생과정에 관한 상세한 과학적 인식은 없었다 하더라도 최소한 상식적인 거시적 인과관계, 즉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성적 결합에 의하여 인체 내에 생식이라는 사건이 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