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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1. 총평 1 공인 이씨가 열여섯에 시집올 때는 꽃다운 얼굴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내내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그녀의 파리하고 핏기 없는 얼굴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기품 있는 여인이었으리라. 아픈 몸을 일으켜 빙긋이 웃으며 “이는 제 오랜 꿈인 걸요(是吾宿昔之志)”라고 말하는 데서 그녀의 인간 됨됨이와 기품이 느껴진다. 2 이 글은 조선시대 가난한 선비 집안에 시집 온 여성에 대한 ‘실록實錄’이라 할 만하다. 연암 외에도 빈사처貧士妻의 생애를 기록한 문인들은 상당수 있다. 하지만 연암의 이 글처럼 그런 여성의 내면 풍경과 심리 상황까지 냉철하게 그려 보인 글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연암은 가난 때문에 사대부 집안의 한 여성이 절망과 낙담 끝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놀랍도록 예..
10. 유언호가 명을 짓다 나는 친구인 규장각 직제학直提學 유언호俞彦鎬에게 묘지명을 지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마침 개성 유수로 와 있었는데 개성은 연암골에서 가까웠다. 그는 장례를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명銘도 지어 주었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연암이라 그 골짝은, 산 깊고 물 맑은데, 시동생이 유택幽宅을 마련했지요. 아아! 온 가족이 함께 은거하려 했거늘, 마침내 이곳에 머무시게 됐군요. 계시는 곳 편안하고 굳건하니, 아무쪼록 후손들 보우하소서. 趾源求銘於其友人, 奎章閣直提學兪彥鎬. 彥鎬方留守中京, 地接燕岩, 爲助葬且銘之, 其銘曰: “燕岩之洞, 山窈而水淥, 繄惟小郞之所營築. 嗚呼鹿門盡室之計. 竟於焉而托體. 旣安且固, 以保佑厥後.” 묘지명의 ‘지誌’와 ‘명銘’은 대개 한 사람이 짓는 법인데, 이 ..
9. 형수님은 연암협에 가지 못하고 돌아가셨네 형수는 몹시 위독했지만 이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손으로 머리를 가누고선 한 번 웃으며 “이는 제 오랜 꿈인 걸요(是吾宿昔之志)”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이 단락에서뿐만 아니라 이 글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부분으로 우리 눈에 박힌다. 20여 년을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힘이 소진하여 절망과 좌절감 속에 죽어가고 있던 형수에게 연암이 들려준 말은 그 말만으로도 기쁘고 가슴이 벅찼으리라.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한 번 빙긋이 웃음을 머금은 것이리라. 사실 이 글 전체에서 형수가 직접 나서서 자신의 목소리로 스스로 발언한 것은 이 대목 한 군데밖에 없다. 비록 앞 부분에서 공인 이씨에 대해 많이 서술해 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8. 형수를 위로하려 연암협을 미화하다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주는 서贈白永叔入麒麟峽序」를 검토하며 자세히 살핀바 있지만, 연암은 1771년에 처음 연암협을 답사한 이래 이곳에 작은 산장을 지어 놓고 수시로 머물곤 했던 듯하다. 하지만 그가 온 가족과 함께 이곳으로 이주한 것은 1778년에 와서였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다. 1777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홍국영은 정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갔는데, 연암에 대해서도 악감정을 품고 장차 해코지를 하고자 하였다. 당시의 사정을 『과정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유공(유언호)은 아버지와 우정이 아주 깊었다. 그리하여 난처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를 찾아와 의논하곤 하였다. 공은 아버지의 의론이 준엄하고 과격해 ..
7. 에피소드를 삽입시켜 글에 생기를 불어넣다 나는 화장산華藏山의 연암골에 새로 터를 잡아 그 산수를 어여삐 여기며 손수 가시덤불을 베어 내 나무 곁에다 집을 세웠다. 趾源新卜居華藏山中燕岩洞, 樂其水石, 手剪荊蓁, 因樹爲屋. 언젠가 형수님께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형님이 연로하시니 장차 저와 함께 시골에서 사셨으면 합니다. 담을 둘러 천 그루의 뽕나무를 심고, 집 뒤엔 천 그루의 밤나무를 심고, 문 앞에는 천 그루의 배나무를 심고, 시냇가에는 천 그루의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를 심으렵니다. 못에는 한 말 가량 치어稚魚를 풀어 놓고, 바위 절벽 밑에는 벌통 백 개를 놓아두며, 울타리 사이에 소 세 마리를 묶어 두렵니다. 제 처가 길쌈할 때면 형수님께선 그저 계집종이 기름 짜는 일이나 살펴 제가 밤에..
6.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가정살림을 돌보다 아아! 옛사람들은 가난한 선비의 아내를 약소국의 대부大夫에 견주었다. 조석朝夕도 보전키 어려운 상황에 놓인 기울고 망해가는 나라를 부지하며 조정에서 혼자 국사國事를 맡아 고군분투하듯 하셨고, 변변찮은 것이지만 정성스레 제수祭需를 마련해 선조의 혼령이 굶주리지 않게 하셨으며, 또 좋은 음식은 못 되더라도 음식을 장만해 손들을 잘 접대하셨으니, 이 어찌 이른바 ‘온 힘을 다해 죽은 이후에야 그만둔다’는 데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嗟乎! 貧士之妻, 昔人比之弱國之大夫. 其拄傾支覆, 莫保朝夕, 猶能自立於辭令制度之間, 而澗繁沼毛, 不餒其鬼神, 不腆之廚庖, 足以嘉會, 豈非所謂: ‘鞠躬盡瘁, 死而後已’者耶? 내가 자식을 낳아 그 아이가 겨우 태胎를 벗었을 때 형수님은 그 ..
5. 가난 때문에 병들어 죽어간 형수를 그려내다 이 단락에서 가장 빼어난 서술은 “이렇게 20년을 노심초사하며 뼈 빠지게 일했지만 적빈을 면할 수 없어 의기소침해지고 낙담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廿載嘔膓擢髓, 甁槖垂倒, 屈抑挫銷, 無所展施)”라는 대목이다. ‘20년’이란 연암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인 1759년부터 형수가 세상을 버린 해인 1778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문장은, 주부로서 공인 이씨가 살아온 삶과 그녀의 내면적 심리 상황을 놀랍도록 예리하게 묘파해내고 있다. 가족과 집안을 위해 죽으라고 일하고 애썼지만 가난은 늘 그 자리에 있어 공인 이씨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절망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혔다는 것. 이 절망감과 좌절감이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을 터이다. “노심초사하여 뼈 빠지게(嘔膓擢..
4. 주부로 두 번의 상을 치르다 “집안에 연거푸 상이 났(歲且荐喪)”다고 했는데, 이는 1759년 연암의 모친 함평 이씨가 59세로 세상을 하직하고 이듬해인 1760년 조부 박필균이 76세로 별세한 일을 말한다. 공인 이씨가 시어머니 상을 당한 것은 그 36세 때였다. 시집온 지 20년 째 되던 해다. 이때부터 공인 이씨는 연암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주부主婦’의 역할을 수행했다. ‘주부’란 오늘날의 ‘가정주부’라는 말과 다소 의미가 다르다. 당시 주부에게는 한 집안의 살림에 대한 책임이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집안의 온갖 제사에 대해 준비해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말하자면 한 집안의 경제와 제사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다. 공인 이씨가 이 역할을 맡기 전에는 시어머니 함평 이씨가 이 역할을 수행했을 터이..
3. 청빈의 가풍 때문에 엄청 고생한 큰 형수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자. 이 단락은 먼저 이씨의 가계家系를 밝힌 다음, 반남 박씨 집안에 시집온 일과 아이 셋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은 일,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20년을 뼈 빠지게 일을 하다 결국 병고 속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이씨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대체로 묘지명의 일반적인 서술 방식이다. 연암의 집안은 반남 박씨 명문가 집안으로, 할아버지가 고관대작을 지냈는데 왜 그리 가난했을까? 이런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연암은 이 단락의 중간부분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바, 곧 ‘청빈淸貧’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워낙 청렴결백하여 집안에 남긴 재산이 없어 가난을 면할 수가 없었다는 것. 다시 말해 할아버지가 관직에 있을 때 부정..
2. 생활고에 병에 걸린 형수님을 부모처럼 모시다 집안에 연거푸 상喪이 났지만 형수님은 힘써 가족 열명의 생계를 꾸려 나갔으며,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을 접대함에 대가大家의 법도를 잃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리 깁고 저리 맞추며 온갖 노력을 다하셨다. 이렇게 20년을 노심초사하며 뼈 빠지게 일했지만 적빈赤貧을 면할 수 없어 의기소침해지고 낙담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매양 낙엽이 지고 추워지는 가을이면 형수님은 더욱 실망하고 낙심하여 병이 더욱 도졌다. 이렇게 몇 년을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마침내 금상今上 2년인 무술년戊戌年(1778) 7월 25일에 운명하셨다. 歲且荐喪, 恭人力能存活其十口, 奉祭接賓, 恥失大家規度, 綢繆補苴. 且廿載嘔膓擢髓, 甁槖垂倒, 屈抑挫銷, 無所展施. 每値高秋木落天寒, 意益廓然霣沮,..
1. 형수의 아버지가 형수를 보러 자주 찾아오다 공인恭人 휘諱 모某는 완산完山 이동필李東馝의 따님으로 왕자 덕양군德陽君 후손이다. 열여섯에 반남潘南 박희원朴喜源에게 시집 와 아들 셋을 낳았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형수님은 평소 몸이 여위고 약해 온갖 병에 시달렸다. 恭人諱某, 完山李東馝之女, 王子德陽君之後也. 十六, 歸潘南朴喜源, 生三男, 皆不育. 恭人素羸弱身, 嬰百疾. 희원의 할아버지는 당대에 이름난 고관高官이었는데, 선왕先王께서는 매양 한漢나라 탁무卓茂의 고사故事를 거론하며 그 벼슬을 올려 주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관직에 계실 때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한 재산을 손톱만큼도 늘린 적이 없어 청빈淸貧이 뼈에 사무쳤으니, 별세할 때 집안에는 돈이 몇 푼 없었다. 喜源大父, 爲世名卿, 先王時每擧漢卓武故事, 以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