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청빈의 가풍 때문에 엄청 고생한 큰 형수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자. 이 단락은 먼저 이씨의 가계家系를 밝힌 다음, 반남 박씨 집안에 시집온 일과 아이 셋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은 일,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20년을 뼈 빠지게 일을 하다 결국 병고 속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이씨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대체로 묘지명의 일반적인 서술 방식이다.
연암의 집안은 반남 박씨 명문가 집안으로, 할아버지가 고관대작을 지냈는데 왜 그리 가난했을까? 이런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연암은 이 단락의 중간부분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바, 곧 ‘청빈淸貧’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워낙 청렴결백하여 집안에 남긴 재산이 없어 가난을 면할 수가 없었다는 것. 다시 말해 할아버지가 관직에 있을 때 부정부패를 일삼지 않았음 물론, 직위를 이용해 재산을 늘리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녹봉만으로 생활했던 모양이다.
명문가 사대부라고 해서 다 연암의 할아버지 같았던 건 아니다. 서울의 대갓집 가운데에는 그 직위를 이용해 사익을 챙기거나 집안의 청지기나 노비를 동원해 이런저런 상업 활동을 꾀하는 집이 적지 않았다. 고지식하게 녹봉만으로 생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연암의 아버지와 연암의 형은 평생 벼슬하지 못했고, 연암 자신도 형수가 세상을 뜰 때까지 말단 벼슬 하나 얻어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지적在地的 기반을 가진 지방 사족士族과 달리 서울과 근기近畿 지역의 사족은 2대쯤 벼슬이 떨어지면 몹시 곤궁해지게 마련이며, 몰락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다. 연암 당대에 와서 연암의 집안이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 같다. 더구나 연암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다음 해에 다시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歲且荐喪), 그 장례비용이 집안의 경제 사정을 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다.
연암 집안은 대대로 청빈을 강조하던 집안이었다. 당시의 청빈을 사대부가家의 큰 미덕으로 간주하던 시대였으니 사대부들은 대개들 짐짓 청빈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다 청빈한 것은 아니었으며 가식과 위선으로 흐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연암 집안의 경우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 점과 관련해선 『과정록』의 다음 기록을 참조할 만하다.
아버지(연암)는 일찍이 우리 형제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들이 장차 벼슬하여 녹봉을 받는다 할지라도 넉넉하게 살 생각은 하지 말아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하였으니, 청빈이 곧 본분이니라.”
그리고는 집안에 전해오는 옛일들을 다음과 같이 낱낱이 들어 말씀해주셨다. (1권 34번-1)
嘗詔不肖輩曰: “爾曹, 他日雖得祿食, 毋望家計之足也! 吾家傳世淸貧, 淸貧卽本分耳.” 因歷擧家傳故事曰
“조부께서는 그 지위가 공경의 반열이었으나 자주 끼닛거리가 떨어져 가난한 선비의 살림살이와 다를 바 없으셨다. 도성 서쪽의 낡은 집은 누추하고 비좁았으나 평생 거처를 옮기지 않으셨다. 한번은 집에 심하게 무너진 곳이 있어 객이 수리할 것을 청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때 조부께서 지방수령에 임명되셨다. 조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령이 되어서 집을 수리하는 건 옳지 않다.’
얼마 후 통진(지금의 김포군 통진면)에 있는 농장의 방죽이 해일로 무너져 다시 쌓으려 했다. 그런데 조부께서는 마침 그때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셨다.
조부께서 이번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관찰사가 되어서 자기 농장을 돌보는 건 옳지 않다.’
조부께서는 마침내 사람을 보내 그 일을 중지시켰다. 객이 이렇게 탄식하였다.
‘관찰사나 수령이 되려는 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선데 공은 도리어 손해만 보고 있다.’
이 일이 알려져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당시 사대부들 가운데는 청렴결백한 법도로 집안을 다스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우리 집의 법도는 당시로서도 너무 지나치다고 일컬어졌다. (1권 34번-5)
王父位躋列卿, 而屢空如寒士. 城西弊廬樸陋逼窄, 平生不易居. 嘗有頽圮甚處, 客請修葺之, 適除外任. 王父謂: ‘作守令而修室屋, 不可也.’已之. 通津薄田, 海溢堰缺, 方築之, 適拜畿伯. 又謂: ‘作道伯而治農庄, 不可也.’
送人停其役. 客恨之曰: ‘爲方伯守宰, 將以撥貧也, 如公家則反有害焉.’ 傳以爲笑.
其時士大夫, 亦多廉白立家, 而吾家規模, 在當時亦以太過稱之.
(중략)
무릇 이런 사실들은 모두 자손들이 몰라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 집안은 수십 대에 걸쳐 청빈함과 검소함이 이와 같았으니 이는 원래 타고난 것이었다. 내 비록 너희들이 따뜻한 옷을 입고 배부르기를 바라지만 부귀와 안인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다만 바라는 건 사대부 집안으로서 글 읽는 사람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뿐이다.”
凡此皆子孫之所不可不知. 吾家歷數十世, 淸素如此, 此殆天之所畀付者耳.
吾雖望爾曹衣煖食飽, 富樂安逸必不可得, 但願大家不絕讀書種子耳.”
이에서 보듯 연암 집안은 대대로 청빈을 강조하는 가풍을 이어 왔고, 연암 스스로도 이런 가풍에 긍지를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과정록』의 이 대목을 통해 이 단락 중의 “할아버지께서는 관직에 계실 때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한 재산을 손톱만큼도 늘린 적이 없어(其居官, 不長尺寸爲子孫遺業)”라고 한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 전문
인용
10. 유언호가 명을 짓다
11.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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