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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형수님 묘지명 - 1. 형수의 아버지가 형수를 보러 자주 찾아오다 본문

책/한문(漢文)

형수님 묘지명 - 1. 형수의 아버지가 형수를 보러 자주 찾아오다

건방진방랑자 2020. 4. 17.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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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수의 아버지가 형수를 보러 자주 찾아오다

 

 

공인恭人[각주:1] [각주:2] [각주:3]는 완산完山[각주:4] 이동필李東馝[각주:5]의 따님으로 왕자 덕양군德陽君[각주:6] 후손이다. 열여섯에 반남潘南[각주:7] 박희원朴喜源[각주:8]에게 시집 와 아들 셋을 낳았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형수님은 평소 몸이 여위고 약해 온갖 병에 시달렸다.

恭人諱某, 完山李東馝之女, 王子德陽君之後也. 十六, 歸潘南朴喜源, 生三男, 皆不育. 恭人素羸弱身, 嬰百疾.

 

희원의 할아버지[각주:9]는 당대에 이름난 고관高官이었는데, 선왕先王[각주:10]께서는 매양 한라 탁무卓茂의 고사故事[각주:11]를 거론하며 그 벼슬을 올려 주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관직에 계실 때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한 재산을 손톱만큼도 늘린 적이 없어 청빈淸貧이 뼈에 사무쳤으니, 별세할 때 집안에는 돈이 몇 푼 없었다.

喜源大父, 爲世名卿, 先王時每擧漢卓武故事, 以增秩. 其居官, 不長尺寸爲子孫遺業, 淸寒入骨, 捐舘之日, 家乏無十金之產.

이 글은 박지원의 형수 묘지명이다. 묘지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앞서 큰누님 박씨 묘지명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을 검토할 때 언급한 바 있으므로 다시 말하지 않는다. 연암에게는 위로 형님이 한 분 계셨고, 이 형님 아래로 두 분의 누님이 계셨다. 즉 연암은 4남매 중 막내였다. 형님은 연암보다 열다섯 살 위였으며, 형수 이씨는 연암보다 열세 살 위였다. 형수 이씨가 시집왔을 때 연암은 고작 세 살 난 어린애였다. 연암은 형수의 아버지인 이동필의 제문을 쓴 바 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말이 보인다.

 

 

아아, (연암)가 세 살 적에

처음 말을 해

이니 능금이니 말 배울 때

오천이란 말도 뇌까렸죠.

무얼 자랑한 거냐구요?

새색시의 집이었죠.

(이동필)께서 따님을 보러 오실 땐

늘 흰 나귀를 타고 왔죠.

눈은 깊고 수염은 길어

몹시 점잖아 보이셨지요.

달려 나가 인사한 후

기뻐서 글공부도 안하고는

덩달아 장인이라 부르며

형님을 따라 했었지요.

꼭 어제 아침 일 같은데

30여 년이 흘렀군요.

공은 성품이 굳세고 밝아

세상 사정 깊이 알고

옛날 일에 밝고 예를 좋아해

도덕이 갖추어지고 대의가 분명했지요.

평생 벼슬하지 아니하고

처사로 지냈어도

하늘의 명 원망 않고

생전에 후회가 없었지요.

아아, 나의 어머니를 닮아

형수(이동필의 딸)를 어머니처럼 대했지요.

형수는 집안에서

옛날의 충신과 같았지요.

온 힘을 다해 그만두지 않았으니

공은 꼭 자기 몸이 아픈 것처럼

늘 걱정하고 근심했죠.

옛날 제후국이

이웃 나라를 돕고 백성을 보살피듯

수시로 양식을 보내주어

갓난아이 돌보듯 했지요.

 

 

이동필은 그 딸보다 6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이 제문은 그가 죽은 해인 1772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제문에는 형수의 묘지명에 보이지 않는 사실이 언급되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 연암이 형수를 어머니처럼 여겼다는 것, 그리고 형수의 아버지인 이동필이 가난한 집안에 시집 가 고생하는 딸을 늘 걱정하며 수시로 도와주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형수의 아버지가 형수를 보러 자주 찾아오다

2. 생활고에 병에 걸린 형수님을 부모처럼 모시다

3. 청빈의 가풍 때문에 엄청 고생한 큰 형수

4. 주부로 두 번의 상을 치르다

5. 가난 때문에 병들어 죽어간 형수를 그려내다

6.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가정살림을 돌보다

7. 에피소드를 삽입시켜 글에 생기를 불어넣다

8. 형수를 위로하려 연암협을 미화하다

9. 형수님은 연암협에 가지 못하고 돌아가셨네

10. 유언호가 명을 짓다

11. 총평

 

  1. 공인恭人: 조선 시대에 국가에서 5품 관리의 아내에게 내리던 작호爵號이다. 연암의 형 박희원은 평생 벼슬한 적이 없지만, 그 할아버지가 높은 벼슬을 지냈기에 박희원의 처가 죽자 나라에서 이런 작호를 내린 게 아닌가 생각된다. [본문으로]
  2. 휘諱: 고인의 이름을 뜻한다. 예전에는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실례라고 생각했기에 ‘피하다’ ‘숨기다’는 뜻을 갖는 ‘휘’라는 말을 ‘이름’이라는 뜻으로 썼다. [본문으로]
  3. 모某: ‘아무개’라는 뜻이다. 남자의 묘지명에는 ‘휘’ 다음에 이름을 적지만 여자의 묘지명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모’라고만 썼다. 조선 시대의 공식적 글쓰기에서 여자는 늘 ‘익명’이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름이 불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기껏해야 그 성에 ‘씨’자가 붙어 김씨니 박씨니 하고 불리든지, 서씨의 아내, 유씨의 아내라는 뜻인 서처, 유처로 불리든지, 난설헌이나 윤지당이니 하는 당호堂號로 불리든지, 수원댁이니 이진사댁이니 하는 택호宅號로 불릴 뿐이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이런 문화를 낳았다. 연암도 자기 시대의 틀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지라 이런 관습에 따라 글을 쓰고 있다. [본문으로]
  4. 완산完山: 전주의 옛 이름으로, 박지원의 형수인 이씨의 본관이다. [본문으로]
  5. 이동필李東馝(1704~1772): 이씨의 아버지다. 호는 초은樵隱 혹은 오천梧川이며, 평생 포의로 지냈다. [본문으로]
  6. 덕양군德陽君(1524~1581): 중종의 다섯째 아들이다. [본문으로]
  7. 반남潘南: 연암의 본관으로, 예전의 반남현潘南縣(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8. 박희원朴喜源(1722~1787): 연암의 형이다. [본문으로]
  9. 희원의 할아버지: 장간공章簡公(‘장간’은 시호) 박필균朴弼均(1685~1760)을 말한다. 문과에 급제하여 경기도 관찰사, 대사간大司諫,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등을 지냈다. [본문으로]
  10. 선왕先王: 영조英祖(1694~1776)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11. 탁무卓茂: 한漢나라 때 인물로 백성들을 잘 다스린 유능한 관리였지만 왕망이 집권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이후 광무제光武帝는 탁무의 재능과 지조를 높이 사 그를 태부太傅 벼슬에 임명하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 34년 7월 24일 조條에 보면, “임금이 동돈녕同敦寧 박필균을 불러 보시고는 그 연로함을 슬퍼하신 후 그의 청렴함을 칭찬하시며 후한의 탁무 고사를 들어 그를 특별히 지중추부사에 임명하셨다”라는 말이 보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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