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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안연 - 6. 참소와 하소연을 통해 보는 현명함이란 본문

고전/논어

논어 안연 - 6. 참소와 하소연을 통해 보는 현명함이란

건방진방랑자 2021. 10. 1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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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참소와 하소연을 통해 보는 현명함이란

 

 

子張問明. 子曰: “浸潤之譖,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明也已矣. 浸潤之譖膚受之愬不行焉, 可謂遠也已矣.”

, 莊蔭反. , 蘇路反.

浸潤, 如水之浸灌滋潤, 漸漬而不驟也. , 毁人之行也. 膚受, 謂肌膚所受, 利害切身. 所謂剝床以膚, 切近災者也. , 愬己之冤也. 毁人者漸漬而不驟, 則聽者不覺其入, 而信之深矣. 愬冤者急迫而切身, 則聽者不及致詳, 而發之暴矣. 二者難察而能察之, 則可見其心之明, 而不蔽於近矣. 此亦必因子張之失而告之, 故其辭繁而不殺, 以致丁寧之意云.

楊氏: “驟而語之, 與利害不切於身者, 不行焉, 有不待明者能之也. 故浸潤之譖, 膚受之愬不行, 然後謂之明, 而又謂之遠. 遠則明之至也. : ‘視遠惟明.’”

 

 

 

 

해석

子張問明.

자장이 밝음에 대해 여쭈었다.

 

子曰: “浸潤之譖,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明也已矣. 浸潤之譖膚受之愬不行焉, 可謂遠也已矣.”

공자께서 서서히 젖어드는 참소(讒訴)와 살갗을 파고드는 하소연을 실행하지 않으면 밝다고 할 만하다. 서서히 젖어드는 참소와 살갗을 파고드는 하소연을 실행하지 않으면 원대한 포부를 지녔다고 할 만하다.”라고 말씀하셨다.

, 莊蔭反. , 蘇路反.

浸潤, 如水之浸灌滋潤,

침윤(浸潤)은 물이 점점 잠겨들어 불어나고 젖어드는 것과 같아

 

漸漬而不驟也.

점차 젖는 것이지 갑자기 하는 것은 아니다.

 

, 毁人之行也.

()은 남의 행실을 헐뜯는 것이다.

 

膚受, 謂肌膚所受, 利害切身.

부수(膚受)란 살갗으로 받은 이로움과 해로움이 몸에 간절한 것을 말한다.

 

所謂剝床以膚,

주역에서 상을 깎아 살갗에 닿게 하면

 

切近災者也.

몹시 재앙에 가깝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 愬己之冤也.

()는 나의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것이다.

 

毁人者漸漬而不驟,

남을 비방하는 것이 점점 젖어들고 갑작스럽지 않으면

 

則聽者不覺其入,

듣는 사람은 빠져 들어감을 깨닫지 못해,

 

而信之深矣.

믿음이 깊어지게 된다.

 

愬冤者急迫而切身,

원통함을 하소연한 것이 갑작스럽고 몸에 절박하게 하면

 

則聽者不及致詳, 而發之暴矣.

듣는 사람은 미처 상세함을 다하지 못해, 사나운 말을 발설케 된다.

 

二者難察而能察之,

두 가지는 살피기 어려우니 살필 수 있다면

 

則可見其心之明, 而不蔽於近矣.

마음의 밝음을 볼 수 있고 가까운 것에 가려지지 않게 된다.

 

此亦必因子張之失而告之,

이것도 또한 반드시 자장의 단점에 따라 말해줬기 때문에

 

故其辭繁而不殺, 以致丁寧之意云.

말이 번잡하고 줄이지 않음으로 진실한 뜻을 다한 것이다.

 

楊氏: “驟而語之, 與利害不切於身者,

양시(楊時)가 말했다. “갑자기 헐뜯거나 이해가 몸에 간절하지 않는 것이

 

不行焉, 有不待明者能之也.

실행되지 않는 것은 밝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아도 할 수 있다.

 

故浸潤之譖, 膚受之愬不行,

그러므로 젖어드는 참소와 살갗으로 파고드는 하소연을 실행하지 않은 후에

 

然後謂之明, 而又謂之遠.

밝다고 말하고 또 원대하다고 말한다.

 

遠則明之至也.

원대함은 밝음의 지극한 것이다.

 

: ‘視遠惟明.’”

서경에서는 멀다는 것을 보는 것이 오직 밝음이다.’라고 했다.”

 

논어’ ‘안연(顔淵)’편에서 자장(子張)이 명(), 곧 통찰력에 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침윤(浸潤)은 물이 땅을 차츰 적셔 들어가듯이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어가는 모습을 말한다. 참은 남에 대해 근거 없이 비난(非難)하는 일이다. 부수(膚受)는 피부가 갈라지듯 절박하다는 뜻이다. , 정약용은 피부의 병이 차츰 골수로 스며들 듯이 한다[膚受謂腠理受病將漸入骨髓]는 뜻으로 풀이했다. ()는 자기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일이다. 이런 하소연은 너무 절박해서 자칫 실상을 제대로 살피기 어렵게 만든다. 불행(不行)은 먹혀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위(可謂)가히 라 이를 만하다이다. 야이의(也已矣)는 단정의 어조사를 중첩했다.

공자는 바로 이어서 침윤지참(浸潤之譖)과 부수지소(膚受之愬)가 불행언(不行焉)이면 가위원야이의(可謂遠也已矣)니라고 했다. 물이 차츰 젖어 들어가듯이 하는 헐뜯는 말과 살갗을 파고드는 하소연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멀리까지 밝게 본다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통찰력의 중요성을 강조해서 덧붙인 말이다.

지도자는 총명(聰明)해야 한다. ()은 귀가 밝은 것, ()은 눈이 밝은 것이다. ‘서경’ ‘순전(舜典)’에서는 순()임금을 찬양해서 명사목 달사총(明四目, 達四聰)”이라 했다. 눈으로 사방을 살피고 귀를 사방에 기울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눈이 밝다 해서 아무것이나 다 보고, 귀가 밝다 해서 아무 말이나 다 들어서는 안 된다. 군주가 면류관을 쓴 것은 그 때문이다. 면류관의 앞에는 끈을 늘어뜨리고 주옥을 꿰어, 좋은 것만 골라서 본다는 뜻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또 면류관의 양쪽에는 주광을 달아 긴요하지 않은 말은 듣지 않겠다는 뜻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지금 이 시대의 지도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도 바로 총명(聰明)이 아니겠는가.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인용

목차 / 전문 / 편해 / 역주

생애 / 공자 / 유랑도 /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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