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물치지를 공부할 수 있는 공간
관물당기(觀物堂記)
관물당(觀物堂)은 안동시 서후면 교리 207번지에 있는 건물로 송암 권호문이 1569년(선조2)에 지어 서식하던 곳이다. 1985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31호로 지정되었다.
권호문(權好文)
앞산에 새 집을 마련하다
余以時, 着愛溪上小峯, 編茅爲屋, 左琴右書, 期以畢百年光景也.
歲壬戌, 又卜築于峯之下, 依翠麓, 搆一畝宮, 爲妻孥所容也. 杜陵詩曰: “何時割妻子, 卜宅近前峯.” 杜則割家累, 余則携家累, 雖趣舍不同, 而其近前峯之意則一也.
新居溪曲, 環堵晏如, 聊足以寓一生之歡. 秪以賓友時至, 觴詠無着, 常欲架空數椽而未能者, 若干年矣.
조카의 도움으로 벗과 모일 관물당을 만들다
去己巳, 姪子道可幹家事, 財力稍優, 乃欲成余之志. 秋七月, 乘農之歇, 命匠聚材, 起小堂于松巖之西偏, 閱四蓂而功訖.
余適是年, 久在京師, 十一月, 歸見簷楹之巋然高峙. 其制度, 雖不愜余心, 其勢寬豁, 可償宿尙矣.
越明年春, 貿瓦而蓋, 買版而粧. 半爲燠室, 半爲涼軒, 隈壁而藏書, 虛前而繞欄, 翛然宜騷子之攸芋. 余乃名其齋曰: ‘觀我.’ 堂曰: ‘執競.’ 而退陶先生以觀物改之, 仍名焉.
관물을 통해 천지만물의 이치를 알게 된다
嗚呼! 觀物之義大矣. 盈天地之間者, 物類而已. 物不能自物, 天地之所生者也; 天地不能自生, 物理之所以生者也. 是知理爲天地之本, 天地爲萬物之本, 以天地觀萬物, 則萬物各一物; 以理觀天地, 則天地亦爲一物.
人能觀天地萬物而窮格其理, 則無愧乎最靈也. 不能觀天地萬物, 而昧其所從來, 則可謂博雅君子乎. 然則堂之所觀, 豈但縱目於外物, 而無硏究之實哉
이치로 사물을 봐야한다
閑居流覽, 則水流也, 山峙也, 鳶飛也, 魚躍也, 天光雲影也, 光風霽月也. 飛潛動植, 草木花卉之類, 形形色色, 各得其天, 觀一物則有一物之理, 觀萬物則有萬物之理. 自一本而散萬殊, 推萬殊而至一本, 其流行之妙, 何其至矣.
是以, 觀物者觀之以目, 不若觀之以心, 觀之以心, 不若觀之以理, 若能觀之以理, 則洞然萬物, 皆備於我矣.
관물당에서 격물치지하리
邵子曰: “人能知天地萬物之道, 所以盡乎人.” 曾子曰: “致知在格物.”
苟能處斯堂而着力於格物致知之功, 而以得夫所以盡乎人之道, 則庶不負觀物之名矣.
辛未季夏旣望, 松舍小隱記. 『松巖先生文集』 卷之五
해석
앞산에 새 집을 마련하다
余以時, 着愛溪上小峯, 編茅爲屋,
내가 한 때는 시냇가 작은 봉우리에 있는 걸 좋아해 띠풀 엮어 집을 만들고
左琴右書, 期以畢百年光景也.
왼쪽은 거문고와 오른쪽엔 책을 끼고 100년 삶을 다하리라 기약했었다.
歲壬戌, 又卜築于峯之下,
임술(1562)년에 또 봉우리 아래에 점쳐 쌓고
依翠麓, 搆一畝宮, 爲妻孥所容也.
푸른 산기슭에 따라 한 밭이랑 크기의 집을 얽으니 아내와 자식들이 살 만했었다.
杜陵詩曰: “何時割妻子, 卜宅近前峯.”
두보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두보의 「알진체사선사(謁眞諦寺禪師)」 시 중 미련(尾聯)인데 ‘하시(何時)’가 ‘미능(未能)’으로 되어 있다.】.
何時割妻子 卜宅近前峯 | 어느 때에 처자식을 놓고 앞 봉우리 가까운 곳에 집을 점지할까? |
杜則割家累, 余則携家累,
두보는 가족을 놓아두려 했지만 나는 가족을 데려가려 하니
雖趣舍不同, 而其近前峯之意則一也.
비록 취향은 같지 않지만 앞 봉우리에 가까이 가려는 뜻은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新居溪曲, 環堵晏如,
새로 시내 굽이진 곳에 집을 만들고 담장 두르니 평안한 듯하여
聊足以寓一生之歡.
애오라지 한 평생의 기쁨을 붙일 만하구나.
秪以賓友時至, 觴詠無着,
다만 손님과 벗이 올 때 술 잔치하고 시 읊조릴 자리가 없어
常欲架空數椽而未能者, 若干年矣.
항상 여러 서까래를 엮어 공간을 만들려 했지만 하지 못한 채 약간의 해가 흘렀다.
조카의 도움으로 벗과 모일 관물당을 만들다
去己巳, 姪子道可幹家事,
지난 기사(1569)년에 조카 도가【도가(權道可, 1553~?)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사우(士愚)이고, 아버지는 권선문(權善文)이다. 1582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가 집안 일을 주관하여
財力稍優, 乃欲成余之志.
재력이 조금 여유가 있게 되자 곧 나의 뜻을 이루어주려 했다.
秋七月, 乘農之歇, 命匠聚材,
가을 7월에 농한기를 타서 목수에게 명해 재목을 모으고
起小堂于松巖之西偏, 閱四蓂而功訖.
송암 서편에 작은 집을 일으켜 4번 명협초를 보니 공사가 끝났다.
余適是年, 久在京師,
나는 마침 이 해에 오래도록 서울에 있었는데
十一月, 歸見簷楹之巋然高峙.
11월에 돌아와 보니 처마와 기둥이 우뚝하니 높이 솟아 있었다.
其制度, 雖不愜余心,
그 제도가 비록 나의 마음에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其勢寬豁, 可償宿尙矣.
집의 기세는 넉넉하게 트여 있어 묵은 바람을 보상해줄 만했다.
越明年春, 貿瓦而蓋, 買版而粧.
다음해 봄에 기와를 사서 덮었고 판자를 팔아 집을 단장했다.
半爲燠室, 半爲涼軒,
반은 온돌방을 만들고 반은 서늘한 마루를 만들었으며
隈壁而藏書, 虛前而繞欄,
모퉁이 벽엔 책을 보관하고 앞은 비워두고 난간은 두르니
翛然宜騷子之攸芋.
넉넉하게 시인이 살기에 마땅하였다.
余乃名其齋曰: ‘觀我.’ 堂曰: ‘執競.’
내가 곧 그 서재를 ‘관아재(觀我齋)’라 이름 지었고 별당을 ‘집경당【집경당(集競堂): 집경(執競)은 강함을 지닌다는 뜻이다. 『시경』 「주송(周頌) 집경(執競)」에 “강함을 지닌 무왕은, 비길 데 없이 공이 많으시네.[執競武王, 無競維烈.]”라고 하였다.】’이라 이름 지었지만
而退陶先生以觀物改之, 仍名焉.
퇴도선생께서 ‘관물당’이라 고쳐서 이름 지어주셨다.
관물을 통해 천지만물의 이치를 알게 된다
嗚呼! 觀物之義大矣.
아! 관물의 뜻이 크구나.
盈天地之間者, 物類而已.
천지 사이에 가득 찬 것이 사물의 부류일 뿐이다.
物不能自物, 天地之所生者也;
사물은 스스로 사물이 될 수 없고 천지가 낳은 것이고
天地不能自生, 物理之所以生者也.
천지가 스스로 낳을 수 없고 사물의 이치가 낳도록 한 까닭이다.
是知理爲天地之本, 天地爲萬物之本,
이에 이치가 천지의 근본이 되고 천지가 만물의 근본이 됨을 알아
以天地觀萬物, 則萬物各一物;
천지로 만물을 보면 만물이 각각 하나의 사물이고
以理觀天地, 則天地亦爲一物.
이치로 천지를 보면 천지 또한 하나의 사물이 된다.
人能觀天地萬物而窮格其理, 則無愧乎最靈也.
사람이 천지만물을 보아 그 이치를 궁리하고 헤아릴 수 있다면 가장 신령한 이에게 부끄럽지 않으리라.
不能觀天地萬物, 而昧其所從來,
천지만물을 볼 수 없어 시종에 어둡다면
則可謂博雅君子乎.
박학하고 우아한 군자라 말할 수 있겠는가.
然則堂之所觀, 豈但縱目於外物,
그러나 이 당에서 보는 것이 어찌 다만 눈을 외물에 놓아버리고
而無硏究之實哉
연구하는 실질이 없는 것이겠는가.
이치로 사물을 봐야한다
閑居流覽, 則水流也, 山峙也,
한가롭게 거처하며 흐르듯 보니 산은 흐르고 산은 높으며
鳶飛也, 魚躍也, 天光雲影也,
솔개 날개치고 물고기 팔딱이며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주희의 「관서유감(觀書有感)」 시에 “반이랑 네모난 연못이 거울처럼 열렸으니,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그 속에서 배회하네.[半畝方塘一鑑開天光雲影共徘徊]” 라고 하였는데, 사람의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어리며
光風霽月也.
맑은 바람이 불고 비 갠 뒤의 달【광풍제월(光風霽月): 송나라 주돈이(周敦頤)의 사람됨을 형용한 말이다. 황정견(黃庭堅)이 「염계시서(濂溪詩序)」에서 주돈이의 높은 인품과 탁 트인 흉금을 묘사하여 “흉금이 깨끗하기가 마치 맑은 바람에 갠 달과 같다.[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이 떠올랐다.
飛潛動植, 草木花卉之類,
나는 새와 잠긴 물고기와 움직이는 동물과 심어진 식물과 풀과 나무 꽃들의 종류는
形形色色, 各得其天,
형형색색으로 각각 천부적인 걸 얻었으니
觀一物則有一物之理,
하나의 사물을 보면 한 사물의 이치가 있고
觀萬物則有萬物之理.
만물을 보면 만 가지 사물의 이치가 있다.
自一本而散萬殊, 推萬殊而至一本,
하나의 근본으로부터 만 가지 다름으로 흩어지고 만 가지 다름을 확장하여 한 가지 근본에 이르니
其流行之妙, 何其至矣.
유행의 오묘함이 얼마나 지극한가.
是以, 觀物者觀之以目, 不若觀之以心,
이런 이유로 사물을 보는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보는 것만 못하고
觀之以心, 不若觀之以理,
마음으로 보는 것이 이치로 보는 것만 못하다.
若能觀之以理, 則洞然萬物,
만약 이치로 볼 수 있다면 한순간에 확 트여 만물이
皆備於我矣.
모두 나에게 구비되어 진다.
관물당에서 격물치지하리
邵子曰: “人能知天地萬物之道, 所以盡乎人.”
소강절이 “사람이 천지만물의 도를 알 수 있다면 사람에게 극진할 수 있다【「관물편해(觀物篇解)」에 나오는 말이다.】.”라고 말했고
증자가 “앎을 극진히 하는 것이 사물에 다가가는 데에 있다.”라고 말했다.
苟能處斯堂, 而着力於格物致知之功,
진실로 이 당에 거처하며 격물치지의 공부에 힘을 쏟아
而以得夫所以盡乎人之道,
대체로 사람의 도를 극진히 할 까닭을 얻을 수 있다면
則庶不負觀物之名矣.
거의 ‘관물’이란 이름을 저버리지 않으리라.
辛未季夏旣望, 松舍小隱記. 『松巖先生文集』 卷之五
신미(1571)년 늦여름 보름에 송사소은(松舍小隱)이 쓰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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