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포를 기록하다
기회(記懷)
정사룡(鄭士龍)
四落階蓂魄又盈 悄無車馬閉柴荊
詩書舊業抛難起 場圃新功策未成
雨氣壓霞山忽瞑 川華受月夜猶明
思量不復勞心事 身世端宜付釣耕 『湖陰雜稿』 卷之五
해석
四落階蓂魄又盈 사락계명백우영 | 네 번 계단의 명협초【명협초(蓂莢草): 15일까지 하루에 잎이 하나씩 피다가 16일부터 그믐까지 잎이 하나씩 진다는 전설상의 풀이름.】 졌고 달【혼백(魂魄): 시야에 보이는 달이 혼(魂)이고, 보이지 않는 부분이 백(魄)이다.】은 또한 차올랐지만, |
悄無車馬閉柴荊 초무거마폐시형 | 쓸쓸히 수레와 말도 없이 사립문 닫아거네. |
詩書舊業抛難起 시서구업포난기 | 시 쓰고 글 쓰는 옛날의 업은 포기하고 다신 하기 어려우나, |
場圃新功策未成 장포신공책미성 | 채마밭의 새로운 일은 계획이 완성되지 않았네. |
雨氣壓霞山忽瞑 우기압하산홀명 | 빗 기운이 노을을 누르니 산은 문득 어두워졌으나, |
川華受月夜猶明 천화수월야유명 | 강 빛은 달을 받아 밤에도 오히려 밝기만 하네. |
思量不復勞心事 사량불부로심사 | 생각으로 다시는 마음의 일을 수고롭게 말아야지. |
身世端宜付釣耕 신세단의부조경 | 신세 마땅히 낚시질과 농사일에 부치노라. 『湖陰雜稿』 卷之五 |
해설
이 시는 작자의 회포(懷抱)를 적은 시로, 정사룡이 노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네 번 명협초가 졌으니, 벼슬에서 물러난 지 네 달이 지났다. 그런데 쓸쓸하게도 수레나 말을 탄 고관(高官)들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대문을 닫아 버렸다. 세상의 시비(是非)를 일으켰던 시를 짓고 글을 짓던 일은 그만두어서 다시 하기 어렵고, 대신 새롭게 시작해야 할 농사일은 아직 계획도 세우지 못했다. 마음이 답답한데, 비가 오려는 지 산이 갑자기 어둑해지고 강물은 달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다. 밝은 강물을 보고 어둡던 마음이 다시 밝아져 다시는 세상에 대한 근심과 걱정을 하지 않고 낚시하며 농사지으며 살아가겠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상 82번에서 이 시의 경련(頸聯)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고 있다.
“우리나라 춘정 변계량이 지은 ‘강마을에 새벽 되자 환한 빛이 하늘과 닿았고, 버드나무 방죽에 봄이 찾아오니 누런빛이 땅 위에 떠도네’라는 시구가 있고, 호음 정사룡이 지은 …… 라는 시구가 있다. 두 사람 또한 모두 신령의 도움이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춘정의 시는 경물묘사가 신령스럽기는 하지만 신령스러움을 볼 수 없다. 호음의 시는 지극히 맑고 허허로운 기상이 있으니, 신령의 도움을 얻었다고 해도 지나친 인정은 아닐 것이다[我東卞春亭季良‘虛白連天江郡曉, 暗黃浮地柳堤春.’ 鄭湖陰‘雨氣壓霞山忽暝, 川華受月夜猶明.’ 兩公亦皆矜神助, 春亭詩寫景雖新, 未見其神處, 湖陰詩極有淸虛之氣, 雖謂之神助, 亦非過許.].”
또한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상 79번에서, “기재 신광한과 호음 정사룡은 같은 시대에 이름이 함께 높았는데, 두 사람의 기상과 격조는 서로 달랐다. 신광한의 시는 맑고 밝으며, 정사룡의 시는 웅장하고 기이하다. ……기재는 각체의 시를 구비한 반면 호음은 유독 7언율시 만을 잘 지었다. 호음이 기재에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자, 호음이 일찍이 ‘신공의 각체가 어찌 내 율시 하나를 대적하겠는가?’라 하였다[申企齋·鄭湖陰, 一時齊名, 兩家氣格不同. 申詩淸亮, 鄭詩雄奇. 企齋「沃原驛」詩曰: ‘暇日鳴螺過海山, 驛亭寥落水雲間. 桃花欲謝春無賴, 燕子初來客未還. 身遠尙堪瞻北極, 路迷空復憶長安. 更憐杜宇啼明月, 囱外誰栽竹萬竿.’ 企齋於詩各體俱備, 湖陰獨善七律, 湖似不及企, 而湖嘗曰: “申公各體, 豈能敵吾一律哉!”].”라 하여, 위의 시처럼 정사룡이 7언 율시에 장처(長處)가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정사룡(鄭士龍)은 김만중(金萬重)의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본조의 시체는 네다섯 번 변했을 뿐만 아니다. 국초에는 고려의 남은 기풍을 이어 오로지 소동파(蘇東坡)를 배워 성종, 중종 조에 이르렀으니, 오직 이행(李荇)이 대성하였다. 중간에 황산곡(黃山谷)의 시를 참작하여 시를 지었으니, 박은(朴誾)의 재능은 실로 삼백 년 시사(詩史)에서 최고이다. 또 변하여 황산곡과 진사도(陳師道)를 오로지 배웠는데, 정사룡(鄭士龍)·노수신(盧守愼)·황정욱(黃廷彧)이 솥발처럼 우뚝 일어났다. 또 변하여 당풍(唐風)의 바름으로 돌아갔으니,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이달(李達)이 순정한 이들이다. 대저 소동파(蘇東坡)를 배워 잘못되면 왕왕 군더더기가 있는데다 진부하여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운 데서 잘못되면 더욱 비틀고 천착하게 되어 염증을 낼 만 하다[本朝詩體, 不啻四五變. 國初承勝國之緖, 純學東坡, 以迄於宣靖, 惟容齋稱大成焉. 中間參以豫章, 則翠軒之才, 實三百年之一人. 又變而專攻黃ㆍ陳, 則湖ㆍ蘇ㆍ芝, 鼎足雄峙. 又變而反正於唐, 則崔ㆍ白ㆍ李, 其粹然者也. 夫學眉山而失之, 往往冗陳, 不滿人意, 江西之弊, 尤拗拙可厭].”라고 언급한 것처럼, 송풍(宋風)의 영향을 받았다.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년, 277~279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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