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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8. 풍요 속의 음지(최기남)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8. 풍요 속의 음지(최기남)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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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항인(委巷人)이란 거리에 버려진 사람이라는 것이 본래의 뜻이다. 사회로부터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위항시인이란 대체로 중간계층의 신분에 속하는 시인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실제로는 이른바 하대부일등지인(下大夫一等之人)’으로 자처(自處)하는 의역중인(醫譯中人), 서리(胥吏) 등이 핵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서류(庶流)와 하천인(下賤人)들이 포함되기도 한다.

 

곧 사대부의 반열에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사실상 평민보다는 우위에 있는 이른바 여항의 시인들이다. 이들의 시작(詩作)이 궁극적으로 사대부들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점에서 보면 그 독자적 영역을 인정하기 어렵지만, 한편 사대부와 구별되는 계층에 속하는 지식인이 집단으로 문학활동을 전개한 사실에서 보면 조선후기 한문학사에 중요한 한 획을 긋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들 위항시인(委巷詩人)詩作 활동은 육가잡영(六家雜詠)해동유주(海東遺珠)소대풍요(昭代風謠)풍요속선(風謠續選)풍요삼선(風謠三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특수계층 시집으로 응결 되었으며, 또 이 시작활동은 일종의 동인적 성격을 띤 각종 시사(詩社) 활동, 즉 풍월향도(風月香徒)ㆍ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ㆍ낙사(洛社)ㆍ칠송정시사(七松亭詩社)ㆍ직하사(稷下社)ㆍ비연시사(斐然詩社) 등을 통해 더욱 활성화되었다. 한편 이러한 위항시인들은 그들 詩作의 논리로 천기론(天機論) 내지 진시론(眞詩論) 등을 주창하면서, 위항시의 존재 의의를 자체적으로 마련하기도 하였다.

 

육가잡영(六歌雜詠)에 시편(詩篇)을 싣고 있는 최기남(崔奇男)ㆍ남응침(南應琛)ㆍ정례남(鄭禮男)김효일(金孝一)최대립(崔大立)ㆍ정남수(鄭柟壽) 등은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위항시의 선성이 되고 있는 것은 물론, 이들이 집단적으로 그리고 가시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온축을 스스로 표출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위항문학이 이에 이르러 그 기반이 구축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육가잡영(六家雜詠)은 제목 그대로 여섯 사람의 각종 시체를 한데 묶은 동우인적(同友人的) 성격의 시선집으로, 이후의 본격적인 위항시집의 선구가 되고 있으며, 또 이 시집에 수록된 시인들이 다음 시대의 위항문학을 이끌어갈 많은 시인들을 직접 배출하고 있어 조선후기 위항문학의 전통이 이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최기남(崔奇男, 1586 선조19~?, 英叔, 龜谷默軒)은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의 궁노출신(宮奴出身)으로 신흠(申欽)에게서 시재(詩才)를 인정받아 사대부들 사이에서 일찍이 이름이 알려진 위항시인이다.

 

이 구곡의 문하에서 임준원(林俊元)ㆍ유찬홍(庾纘洪)ㆍ이득원(李得元) 등의 위항시인이 배출되었다. 그는 당시(唐詩) 성향의 시를 즐겨 썼기 때문에, 특히 이경석(李景奭)은 그의 율시에 두보(杜甫)의 풍이 있다고 하였으며, 홍만종(洪萬宗)은 그의 시를 청절(淸切)’하다고 한 바 있다. 장지연(張志淵)은 구곡의 생애와 시를 두고서, 조물주가 그의 가난하고 미천함을 슬퍼하여 시로써 이름을 나게 하였다고 하였다. 구곡의 렴체(奩骵)를 본다.

 

婀娜綺窓柳 昔時郞自栽 아리따운 창가의 버드나무, 옛날 우리 님이 손수 심으신 것.
柳帶已堪結 長年郞不廻 버드나무 휘늘어져 이미 서로 감고 있건만 그 긴 세월 님은 돌아오지 않는구나.

 

염체는 대개 여성화자의 목소리로 채워지는 사랑의 노래로 보편화되어 왔으며, 여기서도 버드나무를 심어놓고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낭군을 기다리는 아쉬움을 읊고 있다. 이와 유사한 시로 원사(怨詞)가 있다. 이외에도 최기남(崔奇男)이 남긴 시편들은 대체로 궁핍한 자신의 처지나 유유자적하는 삶을 노래한 것이 많다.

 

 

한편 최기남(崔奇男)는 특히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하여 귀거래(歸去來)를 노래한 시가 많다. 도연명을 본떠 자전(自傳) 졸옹전(拙翁傳)을 짓고 있으며 자제문(自祭文), 자만시(自挽詩)를 남기고 있는 것으로도 그 추종의 정도를 알 수 있다.

 

다음에 보이는 독도정절시(讀陶靖節詩)는 도연명(陶淵明)과 같은 은일(隱逸)을 좋아하여 스스로 위로하고 있는 작품이다.

 

吾愛陶元亮 脫落違世務 내 일찍 도연명(陶淵明)을 사랑하여 홀로 떨어져 세속의 일 멀리 하였네..
有酒輒成醉 所樂在田圃 술 있으면 문득 바로 취하고 즐기는 일이란 전원에 있는 것 뿐이라네.
豈不寒與餒 耿介懷貞度 어찌 춥고 배고프지 않으리오마는 꼿꼿이 곧고 넓은 맘 품고 있느니.
文章頗夷曠 足以見平素 문장은 자못 평범하고 넓어 평소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네.
所嗟生苦晩 異代不相遇 슬픈 것은, 세상에 뒤늦게 태어난 것 세대가 달라서 서로 만나지 못하네.
已矣無此士 有懷將焉訴 이 선비 이미 가고 없으니 이 회포 어떻게 하소연하리.

 

이러한 은일에의 향수는 최기남(崔奇男)만이 아니라 이 시기 위항시인들의 시작(詩作)에서 흔하게 발견되고 있는 것들이다. 위항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좌절감의 한 자위적 표출이라 하겠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꾸밈이 없고 진솔하여 도리어 속기(俗氣)를 벗어나지 못한 부분도 없지 않다. 어법(語法)에도 맞지 않는 기불한여뇌(豈不寒與餒)’와 같은 것이 그러한 것 중의 하나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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