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이 담긴 멋진 시를 쓴 이행
순서대로 진행되기에 권상 57번 이후의 시들을 준비해갔다. 그런데 그걸 맡은 학생들이 업로드를 하지 않아 과연 수업이 진행될 수 있을지 우려스럽긴 했다. 하긴 그래도 예전에도 아이들 시험 기간 때면 교수님이 그냥 진행한 적도 있었으니, 이번에도 그렇게 나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더욱이 오늘은 예비 TO까지 나왔고, 22명을 뽑는데 무려 전북에서 6명이나 뽑는 대이변이 일어났다. 나야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올해 될 리는 없고 내년에나 바라볼 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니.
그런데 이번에 한참이나 순서가 뒤로 처져 있지만, 동원이가 ‘71번’ 준비한 것을 올렸었다. 너무나 멀기에 보지도 않았는데, 교수님은 이번엔 순서를 아예 바꿔서 이 시부터 하자고 하시며 진행하셨다. 세상에나 누구도 봐오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나가시면 어쩌란 말입니까~ 이럴 때 참 재밌어지긴 한다. 어쩔 수 없이 그냥 맞닥뜨려야 하니 말이다. 이걸 실력이라 할 순 없다. 누구나 그냥 닥쳐보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고 어버버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多難纍然一病夫 | 숫한 어려움이 계속되는 일개의 병든 사내. |
人間隨地盡窮途 | 인간 가는 곳마다 궁벽한 길뿐이었네. |
靑山在眼誅茅晩 | 푸른 산 눈에 들어오나 띠풀 베기에도 늦었고 |
明月傷心把筆孤 | 밝은 달 마음을 상하게 하나 붓 잡기에 외로웠지. |
短夢無端看蟻穴 | 짧은 꿈에 공연히 개미굴을 찾아보다가 |
浮生不定似檣烏 | 깨어보니 뜬 삶 정처 없이 풍향계만 같았지. |
祗今贏得衰遲趣 | 다만 이제 쇠하였어도 느지막한 정취를 충분히 얻어 |
聽取兒童捋白鬚 | 아동이 흰 수염을 잡아당겨도 내버려두네. |
『소화시평』 권상 71번의 이 시는 매우 재밌게도 1구부터 6구까지 매우 기구한 삶을 얘기한다.
1~2구는 마치 온갖 고난을 겪으며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는 듯 스산한 바람이 부는 기분이 느껴지고, 3~4구는 늙음에 대한 애잔한 감정이 느껴진다. 특히 3구가 재밌었다. 동원인 ‘청산은 눈앞에 있어서 풀 베다보니 날 저물고’라고 번역을 했다. 내가 번역했어도 이것과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교수님이 ‘주모(誅茅)’라는 단어를 풀이해준다. 모(茅)에는 ‘은둔할 집을 만들 재료’라는 뜻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띠풀을 그냥 베는 게 아니고 여기엔 은둔의 뜻이 같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긴 이행이 농부가 아닌 이상, 글만 읽던 사람이 띠풀을 벤다고 할 땐 의심하고 봤어야 하는 게 맞았다. 그 얘기를 듣고 생각해보니 마침내 확 보이더라. 그때 교수님이 해석을 시켜서 바로 해석할 수 있었고, 교수님도 맘에 드는 대답이었던지, “한 번에 확 해석해버렸네요”라고 해서 은근히 어깨에선 산이 솟았다[肩聳山].^^
靑山在眼誅茅晩 | |
청산은 눈앞에 있어서 풀 베다보니 날 저물고. | 푸른 산 눈에 들어오나 띠풀 베기에도 늦었고 |
5~6구는 ‘남가일몽(南柯一夢)’이란 고사를 알고 있어야 했다. ‘당(唐)의 순우분(淳于棼)이 생일에 친구들과 모여 잔치를 했고 대취하자 친구들이 행랑에 눕혀둠→보라색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왕명으로 왔다며 데려감→홰나무 아래 큰 굴로 들어가 대괴안국(大槐安國)에 도착함→남가군(南柯郡) 태수가 되어 30년간 잘 다스림→단라국(檀羅國)이 쳐들어 연전연패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서울로 옴→순우분의 명성에 세력이 커지자 왕이 잠시 고향에 다녀오라고 함→집에 오니 행랑에 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함→해나무 아래를 파보니 개미굴이 보임’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인생무상이 담겨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개미굴[蟻穴]은 바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바람이라 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 5구에선 꿈속에서조차 부귀영화를 꿈꾸며 이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6구에선 꿈에서 깨고 보니 더욱 현실이 가혹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이런 식의 정감으로 미련까지 진행되었다면 이 시는 정말 끔찍한 시가 되었을 거다. 그리고 그건 흔하디 흔한 신세한탄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7, 8구에서 팍 터뜨려 버린다. 마치 이 마지막 구를 위해 앞부분을 최대한 끔찍하고도 매우 처절하게 묘사했다는 듯이. 그래서 이곳에서 ‘그런 힘든 시기들이 있었지만, 난 괜찮아. 지금은 행복하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아이가 수염을 잡아 당겨도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런데 7~8구엔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이곳에서 교수님은 한참 생각해보라고 하며 이 사람 저 사람 해석을 시키고 있었고 마침내 나를 시켰다. 난 확신에 찬 듯 말하려 했는데, 지인이가 “교수님, 그렇다면 청(聽)을 동사로 봐야 하는 건가요?”라고 말을 했고 그게 정답에 가까웠던지 내 순서는 휙 지나간 것이다. 근데 재밌는 점은 난 완전히 엉뚱하면서도 이상한 해석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인이가 말해준 덕에 완전히 헛다리 짚는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
聽取兒童捋白鬚 | |
아동이 흰 수염을 잡아당겨도 내버려두네. | 늦둥이 배었다는 소리를 듣고 흰 수염을 뽑네. |
난 늦은 임신과 그에 따라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고 싶은 마음에 수염을 뽑는 정도로 해석한 것이다. 교수님이 1~6구까진 과거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자꾸 얘기해줬기에, 7~8구에선 반전이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 반전을 생각해볼 때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생기는 것도 반전일 거 같아 그렇게 생각했던 건이다. 이 상황이야말로 ‘이쯤 되면 막 나가자는 거지요~’라고 할 정도로 예습도 하지 않고 처음 보는 한시의 어려움을 몸소 보여준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이 시를 읽고 나선 ‘멋진 시. 마지막 연을 위해 아껴두며 그 전까지 비극성을 더욱 극대화시켰다’라고 썼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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