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아래에 목란을 심으며
매하종목란(梅下種牧丹)
조식(曺植)
栽得花王來 廷臣梅御史
재득화왕래 정신매어사
孤鶴終何爲 不如蜂與蟻
고학종하위 불여봉여의 『南冥先生集』 卷之一
해석
栽得花王來 廷臣梅御史 | 화왕 모란을 심고 오니 조정 신하는 매화 어사라네. |
孤鶴終何爲 不如蜂與蟻 | 외로운 학은 끝내 무엇 하나? 벌과 개미만 못하니. 『南冥先生集』 卷之一 |
해설
이 시는 매화 아래에 모란(牧丹)을 심고서 지은 시이다.
이 시는 상당히 난해하여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화왕인 모란은 왕이고, 매화는 신하이다. 신하인 매화 아래에 왕인 모란을 심은 것부터 시상(詩想)이 기이하다. 매화와 왕은 무능한 왕과 절개 있는 신하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벌이나 개미는 모란꽃과 매화꽃에 모여드는 권력에 기생하는 소인배일 것이다. 그러면 학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고고한 학은 벌이나 개미를 잡는 역할인가? 그런데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비난하고 있는 것인가?
남명과 가장 가까이 지냈던 성혼(成渾)은 남명의 「묘비문(墓碑文)」에서 “지은 글이 기초(崎峭)하여 기력이 있다[爲文崎峭 有氣力]”라 말했고,
제자인 정인홍(鄭仁弘)도 「남명선생집서(南冥先生集序)」에서 “기사오의(奇辭奧意)는 비록 숙유라도 간혹 그 뜻을 알 수 없다[奇辭奧意 雖宿儒 或不能看透]”라 하였다. 위의 시와 이러한 언급을 통해서 남명의 글이 상당이 기험(崎險)함을 알 수 있겠다.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남명에 대해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호걸스런 선비이다. 그의 언론과 풍채는 사람을 용동(聳動)시키는 점이 많았다. 그의 문집 중 한 편의 상소【『明宗實錄』 제10권에 나온다. 조식이 1555년 11월 19일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제수되어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예리하면서도 직설적이어서 명종이 심히 화를 냈으나 그의 명성 때문에 차마 처벌하지 못하고 승정원만 나무랐다. 그 후에 여러 차례 천거한 뒤에야 겨우 6품직을 내렸고 도성에 불러올려 면대(面對)한 것은 명종 말년인 21년 10월 7일 한 차례뿐이다. 물론 이때 예우를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신하들의 간곡한 권유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정조가 대성인의 국량으로 죄주지 않고 융숭히 예우했다고 한 것은 사실과 어긋나는 점이 있다】에 대해서는 대성인이 수용해 주시는 국량으로 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누차 간절히 불러 다스리는 도를 묻고 예우를 융숭히 하였으니, 아! 성대하도다. 대저 그의 학문은 기상을 숭상하고 기이한 것을 좋아하여 병폐가 적지 않았다. 말단의 폐해로는 심지어 정인홍(鄭仁弘)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순경(荀卿)의 문하에 이사(李斯)가 나온 경우【이사(李斯)는 초(楚)나라 상채(上蔡) 사람으로 순경(荀卿)에게 제왕의 학문을 배웠다. 뒤에 진시황을 섬기면서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실시하여 학통을 끊어 버렸고 끝내는 처형을 당하였다. 정인홍(鄭仁弘)도 남명에게서 유학(儒學)을 배웠으면서 결국은 광해군을 섬겨 권세를 누리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잡혀 참형되었다】인 것이다. 그러나 영남(嶺南)에서 절의(節義) 있는 선비가 배출된 것은 실로 이 사람의 힘 때문이니, 후세에 어찌 중도의 선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은 또한 얻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曹南冥豪傑士也 其言論風采 多有聳動人處 文集中一疏 大聖人容受之量 非徒不以爲罪 屢勤旌招 咨訪治道 禮遇隆摯 猗歟盛哉 大抵其學尙氣好異 弊病亦不少 末流之害 至有仁弘 此所謂荀卿之門 出李斯也 然而嶺南節義之輩出 實賴此人之力 後世安得中行之士 此等人亦自不易矣].”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년, 318~319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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