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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논어 양화 - 1. 양화를 피하려다가 길에서 딱 마주친 공자 본문

고전/논어

논어 양화 - 1. 양화를 피하려다가 길에서 딱 마주친 공자

건방진방랑자 2021. 10. 1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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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화를 피하려다가 길에서 딱 마주친 공자

 

 

凡二十六章.

 

陽貨欲見孔子, 孔子不見, 歸孔子豚. 孔子時其亡也, 而往拜之, 遇諸塗.

, 如字, 一作饋.

陽貨, 季氏家臣, . 嘗囚季桓子而專國政. 欲令孔子來見己, 孔子不往. 以禮, 大夫有賜於士, 不得受於其家, 則往拜其門. 故瞰孔子之亡而歸之豚, 欲令孔子來拜而見之也.

 

孔子: “! 予與爾言.” : “懷其寶而迷其邦, 可謂仁乎?” : “不可.”

懷寶迷邦, 謂懷藏道德, 不救國之迷亂.

 

好從事而亟失時, 可謂知乎?” : “不可.”

, , , 並去聲.

, 數也. 失時, 謂不及事幾之會.

 

日月逝矣, 歲不我與.” 孔子: “. 吾將仕矣.”

將者, 且然而未必之辭. 語皆譏孔子而諷使速仕. 孔子固未嘗如此, 而亦非不欲仕也, 但不仕於貨耳. 故直據理答之, 不復與辯, 若不諭其意者.

陽貨之欲見孔子, 雖其善意, 然不過欲使助己爲亂耳. 孔子不見者, 義也. 其往拜者, 禮也. 必時其亡而往者, 欲其稱也. 遇諸塗而不避者, 不終絶也. 隨問而對者, 理之直也. 對而不辯者, 言之孫而亦無所詘也.

氏曰: “揚雄孔子陽貨, 敬所不敬, 爲詘身以信道. 非知孔子. 蓋道外無身, 身外無道. 身詘矣而可以信道, 吾未之信也.”

 

 

 

 

해석

凡二十六章.

모두 26장이다.

 

 

陽貨欲見孔子, 孔子不見, 歸孔子豚. 孔子時其亡也, 而往拜之, 遇諸塗.

양화는 공자가 찾아와 보게 하고자 하였으나 공자는 보지 않았다. 그러자 양화는 공자에게 삶은 돼지고기를 보냈고 공자는 양화가 없는 때를 엿보아 가서 사례하려 하다가, 길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 如字, 一作饋.

陽貨, 季氏家臣, .

양화는 계씨의 가신으로 이름은 호().

 

嘗囚季桓子而專國政.

일찍이 계환자를 가두고 국정을 전횡하였다.

 

欲令孔子來見己, 孔子不往.

공자가 와서 자기를 봤으면 했지만 공자가 오려하지 않자,

 

以禮, 大夫有賜於士,

양화는 예()대부는 사()에 하사했는데

 

不得受於其家, 則往拜其門.

()가 집에서 직접 받지 않았으면 가서 대부(大夫)의 집에 가서 사례해야 한다고 했다.

 

故瞰孔子之亡而歸之豚,

공자가 없는 때를 엿보다 찐 돼지고기를 보냄으로

 

欲令孔子來拜而見之也.

공자로 하여금 찾아와서 절하고 보도록 한 것이다.

 

양화가 공자를 알현하려고 했으나 공자가 만나주지 않자, 공자에게 삶은 돼지를 선물로 보냈는데, 공자도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사례하러 갔다가 도중에 그를 만났다.

논어’ ‘양화(陽貨)’1장이다. 양화(陽貨)는 노나라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이면서 권력을 마음대로 했던 양호(陽虎)와 동일 인물인 듯하다. 혹은 양화는 본래 맹씨(孟氏)로서 계씨의 가신으로 있었지만, 얼마 후 대부의 자리에 올라 노나라 정치를 멋대로 하였다고 한다.

양화는 공자로 하여금 자기 쪽으로 오게 해서 만나보려 했으나, 공자는 가지 않았다. 그러자 양화는 공자가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삶은 돼지를 보냈다. 욕견(欲見)의 견()을 교정청본은 으로 읽었다. 공자가 양화보다 덕이 높았으므로 양화가 공자를 알현하려 했다는 뜻으로 본 것이다. ()는 보낼 궤()와 같다. ()은 어린 돼지이지만 맹자의 기록에 따라 증돈(蒸豚)으로 본다.

예기에 따르면, 대부(大夫)가 사()에게 선물한 것을 사()가 자기 집에서 직접 받지 못했다면 대부(大夫)의 집으로 찾아가 사례해야 한다고 한다. 양화는 공자가 집에 없는 틈을 엿보아 삶은 돼지를 선물해서 공자로 하여금 와서 사례하게 만든 것이다. 공자도 양화가 없을 때 가서 사례하려 했는데, 길에서 양화를 만나고 말았다. 시기망야(時其亡也)의 시()는 기회를 엿봐 틈을 탄다는 뜻이고 망()은 무()와 같다. 우저도(遇諸塗)의 저()그를 에서이며, ()이나 도중(途中)’이다.

양화(陽貨)가 공자를 만나려 한 것은 좋은 뜻이지만 결국은 공자로 하여금 자신을 도와 난()을 일으키게 하려는 데 불과했다. 공자가 그를 만나주지 않은 것은 의()로운 행동이고, 양화가 없는 틈에 거처로 사례하러 간 것은 예()에 부합한다. 옛사람은 남과의 작은 만남에서도 의()와 예()를 중시했으니 우리가 배울 점이 적지 않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孔子: “! 予與爾言.” : “懷其寶而迷其邦, 可謂仁乎?” : “不可.”

양화가 공자에게 오시오, 내가 그대와 말하겠오라고 말하고, 공자가 가까이 오자 보물을 품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게 인()하다고 할 만하오?”라 하니, 공자께서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懷寶迷邦, 謂懷藏道德,

회보미방(懷寶迷邦)은 도덕을 품고 감추고서

 

不救國之迷亂.

나라의 어지러움을 구제하지 않는 것이다.

 

好從事而亟失時, 可謂知乎?” : “不可.”

종사하길 좋아하되 잃기만 하니 지혜롭다 할 만하오?”하니, 공자께서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 , , 並去聲.

, 數也.

()은 자주라는 뜻이다.

 

失時, 謂不及事幾之會.

실시(失時)는 일의 기미에 따른 기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日月逝矣, 歲不我與.” 孔子: “. 吾將仕矣.”

양화가 세월은 가버려 나를 기다려주지 않소.”라고 말하니, 공자께서 알겠습니다. 제가 장차 직위를 맡겠습니다.”라고 대답하셨다.

將者, 且然而未必之辭.

장차란 또한 그러하나 기필하진 않는 말이다.

 

語皆譏孔子而諷使速仕.

양화의 말은 다 공자를 비난하며 풍자하여 속히 벼슬하게 하려는 것이니,

 

孔子固未嘗如此, 而亦非不欲仕也,

공자는 일찍이 이와 같지 않았고 또한 벼슬하고자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但不仕於貨耳.

다만 양화에 밑에서 벼슬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故直據理答之, 不復與辯,

그래서 곧 이치에 따라 대답하였고 다시 함께 변론하지 않아

 

若不諭其意者.

마치 그 뜻을 깨닫지 못한 것처럼 하였다.

 

陽貨之欲見孔子,

양화가 공자를 보고자 한다는 것은

 

雖其善意, 然不過欲使助己爲亂耳.

비록 그게 선이라도 자기를 도와 난을 일으키게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孔子不見者, 義也. 其往拜者, 禮也.

그렇기 때문에 공자가 보지 않았던 것은 의()이고 그에게 가서 절한 것은 예().

 

必時其亡而往者, 欲其稱也.

그리고 반드시 그가 없을 때에 간 것은 알맞게 하고자 해서이고

 

遇諸塗而不避者, 不終絶也.

길에서 만나 피하지 않은 것은 마침내 끊어내지 않음이다.

 

隨問而對者, 理之直也.

또한 물음에 따라 대답하는 것은 이치의 곧음이고,

 

對而不辯者, 言之孫而亦無所詘也.

대답하되 변론치 않은 것은 말은 공손히 하되 또한 굽히지 않은 것이다.

 

氏曰: “揚雄孔子陽貨, 敬所不敬,

양시(楊時)가 말했다. “양웅은 공자가 양화에 대해 공경하지 않아야 할 것에 공경했으니

 

爲詘身以信道. 非知孔子.

자신의 몸을 굽혀 도()를 편 것이다라 했으니, 공자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蓋道外無身, 身外無道.

대체로 도 바깥에 몸이 없고 몸 바깥에 도가 없으니,

 

身詘矣而可以信道, 吾未之信也.”

몸이 굽혀지면서 도를 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공자는 출타의 때에 노나라 대부 양화(陽貨)가 삶은 돼지고기를 보내온 것을 알고 예법에 따라 양화의 집으로 가서 사례하되 그가 없는 사이에 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중에 양화를 만나고 말았다. 양화는 이리 오시오. 그대에게 할 말이 있소라고 하고는 공자를 넌지시 비판하고 공자더러 속히 벼슬하게 하려 했다. , 공자왈(孔子曰) 이하만 공자가 마지못해 대답한 것이고 위의 문답은 양화(陽貨)의 자문자답(自問自答)일 수 있다. 중국의 이탁오(李卓吾)와 모기령(毛奇齡), 조선의 정약용이 이 설을 주장했다. 여기서는 잠시 주자의 설을 따랐다.

양화는 보배를 품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것이 인()이냐고 물었는데, 이것은 공자가 도덕을 품고 나라의 미란(迷亂)을 구원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이다. 불가(不可)는 각각 불가위인(不可謂仁)과 불가위지(不可謂知)의 준말이다. 종사(從事)는 정사(政事)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자주’, 실시(失時)기회에 미치지 못함이다. ()는 지()와 같다. 세불아여(歲不我與)는 세월이 나와 함께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공자는 양화의 비판과 재촉에 대해 이치에 근거해서 대답하였지, 그와 굳이 변론하려 하지 않았다. 공경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공경한 것도 아니다. 큰 이념을 위한다면서 일시나마 불의(不義)에 굴복하는 일은 결코 옳다 할 수 없으리라.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양화는 노나라의 대부였다고도 하나, 그보다는 계씨의 가신으로서 노나라의 전권을 장악하기에 이른 전문적 정치인이었을 것이다. 그가 세력을 잡기 시작한 것은 정공 원년(BC 509), 공자 43세 때였다. BC 505년에는 계환자(季桓子)를 감금시키고 다른 사신인 중량회(仲梁懷) 등의 세력을 축출하고 노나라의 독재자가 되었다(공자 나이 47). 그리고 정공 8(BC 502), 그는 실각하여 노나라의 제후 군위(君位)의 상징인 보옥(寶玉)과 대궁(大弓)을 훔쳐 제나라로 망명한다. 이 사건은 춘추경에 기록될 만큼 중대한 사건이었다. 결국 그는 제나라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양호는 송()나라로 다시 도망갔다가 진()나라로 가서 결국 조간자(趙簡子)의 심복이 된다. 공자는 결국 양호가 떠나면서 노나라에서 대사구가 되었고, 대사구가 된 후에는 결국 양호와 똑같은 전철을 밟고 망명길에 오른다. 가는 곳마다 공자는 양호로 오인되거나 그의 환영을 만난다. 그리고 공자가 조간자를 만나려고 했을 때에는 조간자 곁에는 양호가 있었던 것이다. - 김용옥, 논어한글역주3, 495

 

 

인용

목차 / 전문 / 편해 / 역주

생애 / 공자 / 유랑도 /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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