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논어 미자 - 6. 나루터 가는 길을 묻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 미자 - 6. 나루터 가는 길을 묻다

건방진방랑자 2021. 10. 14. 15:22
728x90
반응형

6. 나루터 가는 길을 묻다

 

 

長沮桀溺耦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 七餘反. , 乃歷反.

二人, 隱者. , 並耕也. 孔子反乎. , 濟渡處.

 

長沮: “夫執輿者爲誰?” 子路: “孔丘.”

, 音扶.

執輿, 執轡在車也.

 

: “魯孔丘?” : “是也.” : “是知津矣.”

, 音扶. , 平聲.

蓋本子路御而執轡, 今下問津, 故夫子代之也. 知津, 言數周流, 自知津處.

 

問於桀溺, 桀溺: “子爲誰?” : “仲由.” : “是魯孔丘之徒與?” 對曰: “.”

徒與之與, 平聲.

 

: “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且而與其從辟人之士也, 豈若從辟世之士哉?” 耰而不輟.

, 吐刀反. , 去聲. , 音憂.

滔滔, 流而不反之意. , 猶與也. 言天下皆亂, 將誰與變易之? , 汝也. 辟人, 孔子. 辟世, 自謂. , 覆種也. 亦不告以津處.

 

子路行以告. 夫子憮然曰: “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不與易也.”

, 音武. , 如字.

憮然, 猶悵然, 惜其不喩己意也. 言所當與同群者, 斯人而已, 豈可絶人逃世以爲潔哉? 天下若已平治, 則我無用變易之. 正爲天下無道, 故欲以道易之耳.

程子: “聖人不敢有忘天下之心, 故其言如此也.”

張子: “聖人之仁, 不以無道必天下而棄之也.”

 

 

 

 

해석

長沮桀溺耦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장저와 걸익이 함께 밭을 갈고 있는데 공자께서 그곳을 지나다가 자로를 시켜 나루터 가는 길을 묻게 했다.

, 七餘反. , 乃歷反.

二人, 隱者. , 並耕也.

두 사람은 은자다. ()은 아울러 밭을 간다는 것이다.

 

孔子反乎.

이때에 공자는 초나라부터 채나라로 돌아왔다.

 

, 濟渡處.

나루터는 물을 건너는 곳이다.

 

長沮: “夫執輿者爲誰?” 子路: “孔丘.”

장저가 고삐를 잡고 있는 이가 누군가?”라고 물으니, 자로가 공구입니다.”라고 말했다.

, 音扶.

執輿, 執轡在車也.

집여(執輿)는 고삐를 잡고 수레에 타고 있다는 것이다.

 

: “魯孔丘?” : “是也.” : “是知津矣.”

장저가 노나라의 공구인가?”라고 말하니, “맞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장저가 그러하다면 나루터 가는 방법을 알 것이다.”라고 말했다.

, 音扶. , 平聲.

蓋本子路御而執轡,

대개 본래 자로가 몰아 고삐를 잡지만

 

今下問津, 故夫子代之也.

이제 나루터를 묻기 위해 내렸기 때문에 부자께서 대신하신 것이다.

 

知津, 言數周流, 自知津處.

나루터를 안다는 것은 자주 천하를 주유해서 스스로 나루터를 안다는 말이다.

 

한자성어의 문진(問津)은 학문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는 것을 뜻한다. 그 출전이 논어’ ‘미자(微子)’의 제6장이다. 공자는 제()나라에서 뜻을 펴지 못하고 경공(景公)이 죽은 다음 해부터, ()로 향하였다가 채()로 돌아오고 또 섭()으로 떠났다가 다시 채()로 돌아오는 등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는데 그 무렵에 은자인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을 만난 듯하다.

우이경(耦而耕)은 쟁기로 두 사람이 함께 밭을 가는 것을 말한다. ()3인칭의 . 접여자(執輿者)는 마차 고삐를 쥔 사람이란 말이다. 수레를 몰던 자로(子路)가 나루를 물으러 간 사이에 공자가 대신 고삐를 쥐고 있었다. 지진(知津)이란 공자가 천하를 주류(周流)하여 스스로 나루를 알 것이란 말인데 무도(無道)한 세상을 구원하려고 철환천하(轍環天下)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 것이다.

공자의 일생은 참으로 기구했다. 노나라 애공 때 기린이 서쪽에서 잡히자 공자는 나의 도가 곤궁하다고 탄식하며 옷소매를 뒤집어 눈물을 훔쳐야 했다. 장현광(張顯光)은 그 사실을 두고 지은 장편 시에서, ‘세상은 낮고 도는 크거늘 끝내 어찌 용납되겠나, 솜씨가 있어도 끝내 경륜할 수가 없었네[世卑道大竟何容, 有手不可以經綸]’라고 했다. 올바른 도를 실천하는 사람이 핍박받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슬프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問於桀溺, 桀溺: “子爲誰?” : “仲由.” : “是魯孔丘之徒與?” 對曰: “.”

걸익에게도 물었다. 걸익이 자네는 누군가?”라고 말했고 중유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하다면 노나라 공구의 무리인가?”라고 말하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徒與之與, 平聲.

 

: “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且而與其從辟人之士也, 豈若從辟世之士哉?” 耰而不輟.

그러자 도도히 흘러가는 것이 천하가 모두 그러하다. 누가 그것을 함께 바꿀 수 있겠는가? 또한 너는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기보단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말하며, 밭 갈기를 멈추지 않았다.

, 吐刀反. , 去聲. , 音憂.

滔滔, 流而不反之意.

도도(滔滔)는 흘러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 猶與也.

()는 참여한다는 말과 같다.

 

言天下皆亂, 將誰與變易之?

천하가 다 어지러워져 누가 함께 변역시키겠냐는 말이다.

 

, 汝也.

()는 너란 뜻이다.

 

辟人, 孔子.

사람을 피하는 사람은 공자를 말한다.

 

辟世, 自謂.

세상을 피하는 사람은 장저와 걸익 스스로를 말한다.

 

, 覆種也.

()는 씨앗을 덮는 것이다.

 

亦不告以津處.

또한 나루터를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공자는 채()ㆍ섭()ㆍ초() 부근을 여행할 때 은둔자인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을 보고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를 묻게 했다. 장저가 공자야말로 나루를 잘 알고 있으리라고 했으므로 자로는 다시 걸닉에게 물어야 했다.

도도(滔滔)는 물이 콸콸 흐르듯 천하가 혼란한 모습니다. 개시야(皆是也)의 시()는 도도(滔滔)를 가리킨다. 수이(誰以)누구와 함께, ()는 여()와 같다. ()은 변역(變易)이다. 걸닉은 공자가 누구와 함께 난세를 바꾸려 하는가라고 조롱한 것이다. 차이(且而)의 이()2인칭의 여()와 같다. ‘여기(與其)기약(豈若)은 둘을 비교하면서 후자를 긍정하는 어법이다. ()은 피()의 옛 글자다. 벽인지사(辟人之士)란 함께 도를 행할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는 선비란 뜻으로 공자를 가리킨다.

정약용은 공자가 진()과 채() 대부(大夫)들의 해코지를 피해 샛길로 가고 있었으므로 걸닉이 그를 사람 피하는 선비라고 말했다고 풀이했다. 벽세지사(辟世之士)란 난세를 피해 은둔한 걸닉 자신이다. 우는 씨 뿌리고 흙 덮는 일이다. ()은 지()와 같다.

천하가 모두 도도한 상황이거늘 누구와 함께 바꾸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 자신이 변역의 주체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직도(直道)의 인물이리라.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子路行以告. 夫子憮然曰: “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不與易也.”

자로가 돌아가 그 상황을 고했다. 부자께서 슬픈 빛을 띠시며 새와 짐승과 더불어 무리 지어 살 수 없으니 내가 이 사람의 무리와 함께 하지 않고 누구와 함께 하겠는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나도 바꾸려 하진 않았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

, 音武. , 如字.

憮然, 猶悵然,

무연(憮然)은 슬픈 듯하다는 뜻이니

 

惜其不喩己意也.

자기의 뜻을 깨우치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言所當與同群者, 斯人而已,

마땅히 함께 무리 지어야 할 이들은 이 사람들일 뿐이라는 말이니,

 

豈可絶人逃世以爲潔哉?

어찌 사람을 끊고 세상에 은둔하는 것을 순결함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天下若已平治, 則我無用變易之.

천하가 이미 고르게 다스려졌다면 나는 그것을 변역시키려 할 필요가 없다.

 

正爲天下無道, 故欲以道易之耳.

그러나 바로 천하가 무도해졌기 때문에 도로써 그것을 변역하려 할 뿐이다.

 

程子: “聖人不敢有忘天下之心,

정명도(程明道)가 말했다. “성인은 감히 천하의 마음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故其言如此也.”

그 말이 이와 같다.”

 

張子: “聖人之仁,

장자가 말했다. “성인의 어짊은

 

不以無道必天下而棄之也.”

무도하다고 천하를 단정하여 천하를 버리진 않는다.”

 

공자는 채()ㆍ섭()ㆍ초() 부근을 여행하다가 은둔자인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을 보고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를 묻게 했다. 장저는 공자 자신이 나루를 알고 있으리라고 하면서 가르쳐주지 않았다. 걸닉은 온 천하가 물이 콸콸 흐르듯 혼란하거늘 누구와 함께 변역시킬 수 있겠느냐, 너도 나를 따라 은둔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면서 가르쳐주지 않았다. 자로가 돌아와 그 사실을 공자에게 알리자 공자는 그들이 자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함을 애석해하였다.

무연(憮然)은 실의(失意)한 모습, 혹은 창연(悵然)과 마찬가지로 서글퍼하는 모습이다. 여동군(與同群)은 새 짐승과 한 무리를 이루어 산다는 말이니, 산림에 은둔(隱遁)함을 뜻한다. 사인지도(斯人之徒)는 천하의 민중을 가리킨다. ()은 변역(變易)이니, 세상을 정도(正道)로써 바꾸는 것을 가리킨다.

공자는 온 천하가 도도(滔滔)하다고 해서 세상을 피해 새 짐승과 무리를 이루어 살아갈 수는 없다고 했다. 천하에 도가 쇠퇴했기 때문에 내가 세상을 바꾸고 민중을 구원하려 하는 것이지, 천하에 도가 있다면 구태여 철환천하(轍環天下)하고 동분서주(東奔西走)할 필요도 없다고도 했다. 결국 인간의 길이란 이 세상이 아무리 혼란하다고 해도 이 세상에 남아 이 혼란의 상황을 변역시키고 고통받는 민중을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지 않겠는가? ‘조수(鳥獸)는 불가여동군(不可與同群)이라는 구절에서 인간의 숭고한 과업을 깨닫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된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인용

목차 / 전문 / 편해 / 역주

생애 / 공자 / 유랑도 / 제자들

09112 / 11119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