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 제십팔(微子 第十八)
편해(篇解)
아주 래디칼한 생각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시라카와(白川靜)는 『논어』의 최종 편집자는 「미자편(微子篇)」의 편찬자일 것이라고 말한다. 「미자」편이 『논어』 중에서 가장 늦은 층대에 속하는 편 중의 하나임이 확실하기 때문에 『논어』의 많은 편들이 기존해 있었다 해도 최종편집은「미자」편이 성립하면서, 「미자」편을 편찬한 사람들이 『논어』라는 서물을 완성시켰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논어』는 실제로 「미자」편에서 끝난다. 「미자」편 이후의 2편은 「미자」편에서 완성된 『논어』에 대한 사족(蛇足)적인 첨가일 수가 있다.
「미자」편의 편찬자들에 의해서 『논어』가 마무리되었다는 것이 왜 중요한 의미를 지닐까?
세계의 사대성인으로 꼽히는 예수, 싯달타, 소크라테스, 공자를 비교해볼 때 공자를 제외한 나머지 3인과 공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들의 삶을 구성하는 드라마 속에서 나머지 3인은 모두 한결같이 ‘죽음’이라는 테마를 결정적인 삶의 요인으로 활용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도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의 이데아적 이상을 증명했고, 싯달타도 죽음을 통하여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이상을 완성하고, 예수도 죽음을 통하여 부활을 구현시킨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공자의 드라마에는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그냥 살았을 뿐이다. 그의 자연사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경험하는 생명에너지의 종료일 뿐이다. ‘죽음’이라는 테마는 종교적 이상과 관련되며 불멸의 영원성, 즉 현상을 초월하는 이데아적 세계와 관련된다. 이데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죽음’을 필요로 한다. 죽음을 통하여 현상적 삶을 죽여버린 자리에 영원, 즉 관념적 이데아를 건립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테마가 없이는 영원성의 종교나 철학이나 문학은 잘 장사가 되지 않는다. 공자는 전혀 그런 장사를 할 필요가 없었다. 공자는 영원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관념적 이상을 삶의 목표로 삼지 않았다. 공자는 오직 삶의 순간들을 째즈적으로 살았을 뿐이다. 그 째즈가 그에게는 인(仁)이었다. 공자는 사랑이나 초월이나 해탈이나 이성적 완성의 복음을 선포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오직 인(仁)의 복음을 선포했을 뿐이다.
인(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원하기만 해도 금방 달려오는 것이다[我欲仁, 斯仁至矣. 7-29]. 그것은 하루만 극기복례(克己復禮)해도 천하가 다 인하게 되는 것이다[天下歸仁焉]. 그가 말하는 인(仁)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노모스(nomos, 규범윤리)적 세계를 파괴하는 데서 생겨나는 새로운 윤리였다. 째즈가 기존의 모든 화성을 파괴함으로서 자유로운 변조와 변주를 시도하듯이, 인(仁)은 인간의 모든 삶의 상황의 순간순간에 생명을 불어넣는 감수성의 극치였다.
그러나 공자의 사후, 공자학단의 진행방향은 공자가 부정했던 노모스적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그 노모스적 세계의 상징이 다름 아닌 안회(顔回)류의 유교였다. 비례 물시(非禮勿視)하고, 비례물청(非禮勿聽)하고, 비례물언(非禮勿言)하고, 비례물동(非禮勿動)하는 안회류의 극기복례의 해석은 이러한 비극적 방향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비극적 방향의 정점에 있는 공자의 모습이 바로 「향당(鄕黨)」편 속의 공자이다. 상론과 하론이란 근원적으로 의미 없는 구분이지만 상론이 「향당」으로 끝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향당」 속의 공자에게서도 배울 것은 많다. 그러나 도정이 잘된 흰쌀 밥을 먹고 날고기는 가늘게 썰어야 먹고, 바르게 자르지 않은 것은 먹지 않고, 합당한 소스가 있어야 식사를 하고, 자다가도 천둥번개가 치면 일어나서 안색을 변하고 의관 을 정제하는 시아버지를 모시는 것을 좋아할 며느리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없을 것이다. 「향당」편은 유교의 노모스화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다. 바로 이 「향당」편의 대척점에 서있는, 「향당」편이 상징하고 있는 모든 노모스적 윤리를 벗어버리는 새로운 스트림으로서 등장한 것이 바로 「미자(微子)」편이다. 상론이 「향당」으로 끝났다면, 하론이 「미자」로 끝나고 있는 것은 『논어』를 위대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심층구조를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미자」는 은둔자의 이야기며, 방외인들의 이야기며, 출처진퇴(出處進退)에 있어서 현명하게 처신한 현인들의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자왈파편’이 거의 없다. 정지된 공자가 아니라 유랑하는 공자이며, 영원한 이데아를 내뱉는 공자가 아니라, 삶의 꿈과 좌절을 이야기하는 허무한 공자이다. 이 「미자」편 공자의 모습에는 장자(莊子)의 모습이 겹치고 있다. 장자의 출현이야말로 노모스화 되어가는 모든 윤리체계에 대한 반동이라고 한다면 「미자」편의 공자야말로 그러한 새로운 방외의 윤리를 시사하는 공자인 것이다. 공자는 결코 방외인(方外人)이 아니다. 공자는 자기 삶의 모든 고뇌와 열정을 휘감아 내심 속에 수렴하고 간직한 권회인(卷懷人, 15-6)이었다. 공자는 현실정치의 경기장에서 본다면 실패한 자이다. 그러나 위대한 사상은 실패한 자의 것이다. 실패와 좌절과 갈등 속에서 자기를 새롭게 일으켜간 권회(卷懷)의 과정이 없이는 인간의 정신의 고양(高揚)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미자(微子)」 속의 공자는 이러한 고양된 공자이다. 그리고 「미자」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고뇌하는 공자를 비웃는 방외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공자를 동정하고 공감하는 같은 권회인(卷懷人)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자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던 사람들이 『논어』를 최종 편집하였다는 데, 바로 노모스적 이데아적 고정성을 탈피한 위대한 『논어』가 탄생될 수 있었던 비밀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미자」편은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키무라는 매우 세심한 분석을 가했다. 그리고 11장을 어군의 성격에 따라 4부분으로 분류했다: a(3ㆍ4), b(5ㆍ6ㆍ7), c(1ㆍ2, 8ㆍ9), d(1, 10ㆍ11). 이 중에서 『논어』가 기본적으로 공자와 제자들의 언행록의 성격을 지닌다면, 3ㆍ4는 공자의 생애의 사건을 기술한 것이며 5ㆍ6ㆍ7은 공자가 천하를 유력(遊 歷)할 때에 은사(隱士)들과 문답한 내용인데 aㆍb가 모두 공자의 출처진퇴(出處進退) 문제를 테마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따라서 aㆍb는 「미자」편의 중핵(中核)을 형성하며 『논어』의 성격에 부합되는 언행록이다. 이 aㆍb(3~7)를 가운데 놓고 앞뒤로 배열된 것이 c이다(1ㆍ2, 8ㆍ9). 이 1ㆍ2ㆍ8ㆍ9 네 장은 난세에 현명하게 처신한 고래의 명사들의 이야기가 공문 내에 전해내려오던 전송이 수집된 것이다. 내용적으로 보면 1-8이 대응하고, 2-9가 대응한다. 보다 객관적인 형태의 기술인 c를 이분(二分)하여 공자의 출처진퇴를 논한 aㆍb 몸통 앞뒤로 배열함으로써, 공자의 출처진퇴를 보다 의미 있게 만드는 참고자료로서 활용한 편집의도가 간파된다.
c (1~2) | 은(殷)나라 현인(三人)과 노나라 대부 유하혜(柳下惠)의 현명한 선택 |
aㆍb (3~7) | 공자의 출처진퇴(出處進退) |
c (8~9) | 고래 일민(逸民)의 현명한 생활태도와 주(周) 왕실 악사(樂師)들의 난세진로 |
이 aㆍbㆍc에 비하여 최후의 d(10ㆍ11) 파편은 언뜻 성격이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 제10장은 주공이 아들 백금(伯禽)에게 타이르는 말이며, 제11장은 주나라의 훌륭한 선비 8명을 나열한 것으로 출처진퇴라는 「미자(微子)」편의 전체 테마와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선 제일 마지막인 제11장은 ‘주유팔사(周有八士)’로 시작하고 제일 첫 장인 제1장은 ‘은유삼인(殷有三人)’을 말하고 있어서 양식적인 공통성이 있다. 그리고 제10장의 백금(伯禽)은 공자의 조국 노나라 시조이며 그 시조인 백금에게 주공이 ‘한 사람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지 말고[無求備於一人]’ 다양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알라는 부탁과 제11장에서 ‘주유팔사(周有八士)’라 하여 다양한 인재들을 열거한 것은 무엇인가 공통된 테마의식이 있다. 제1장은 은말(殷末)의 난세의 상황이며 마지막 제10, 11장은 주초(周初)의 건설적 상황이다. 그러니까 제1장의 은말(殷末)의 난세상황으로 시작하여 공자의 출처진퇴를 사이에 끼워넣고 결국 마지막 제10, 11장에서 인재의 활발한 등용에 관한 긍정적인 면모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암암리, 난세에 은둔하며 결백을 지키는 자들이야말로, 언젠가는 바른 역사(治世)에 바른 참여를 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은사(隱士)나 일사(逸士)의 처신은 단순한 정치의 거부나 현세의 부정이 아니며, 더 중요한 것은 치자(治者)의 덕(德)ㆍ부덕(不德)이며 주나라의 본래정신은 인재의 바른 등용을 통한 문명의 창달에 있었다고 하는 긍정적 테마를 전체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앞에서도 암시했듯이 『맹자』의 문헌 속에 인용된 공자의 말 중에서 『논어』에 나오는 것이 10군데 정도 되는데, 자세히 뜯어보면 오늘의 우리가 알고 있는 『논어』라는 텍스트가 전제되어 있지는 않다. 공유된 전승만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순자(荀子)』에 ‘공자왈(孔子曰)’로 인용되고 있는 것이 30군데에 이르고 있으나 정확하게 현재의 『논어』 문헌과 일치하는 것은 거의 없다. 순자가 자기 말로써 이야기하는 것들 중에 『논어』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 있지만 그것도 문자의 출입이 있다. 그러니까 『맹자』나 『순자』라는 문헌 이전에 『논어』라는 하나의 완정한 서물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맹자와 장자(莊子)는 대체로 동시대로 간주되지만 서로 언급이 없다. 『장자』라는 서물의 성립은 보다 긴 시간에 걸친 것이다. 「미자(微子)」편과 아주 유사한 성격의 파편으로서 우리는 『논어』 중에서 「헌문」 39~42 어군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헌문어군은 「미자(微子)」 편에 비하면 매우 간결하고 이야기적 성격이 적다. 「헌문」이 비교적 빠른 공문 내의 전승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자」편은 「헌문」편의 성립보다는 뒤늦은 문헌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미자」 편 속의 공자의 은자들과의 대화에는 오직 자로(子路)만이 출현하고 있다. 「미자」편 을 만든 사람들은 자로(子路)를 몹시 경애(敬愛)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자」편을 만든 사람들은 공문의 후기 유자들 중에서 벼슬길과는 관계 없이 불우한 처지에 있었던 사람들, 그러면서 장자류의 자유분방한 새로운 사조에 마음이 열려있고, 공자와 자로를 마음속 깊이 경애하는 사람들, 그리고 증자계열의 맹자 학단이나 또 순자계열과도 다른 어떤 사람들, 그리고 『상서(尙書)』와 같은 정통자료에 지식이 있었던, 그 엑스(X)일 것이다. 그러나 그 엑스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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