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계환자가 여악(女樂)에 빠져들다
齊人歸女樂, 季桓子受之. 三日不朝, 孔子行.
歸, 如字, 或作饋. 朝, 音潮.
○ 季桓子, 魯大夫, 名斯. 按『史記』,“定公十四年, 孔子爲魯司寇, 攝行相事. 齊人懼, 餽女樂以沮之”.
尹氏曰: “受女樂而怠於政事如此, 其簡賢棄禮, 不足與有爲可知矣. 夫子所以行也, 所謂見幾而作, 不俟終日者與?”
○ 范氏曰: “此篇記仁賢之出處, 而折中以聖人之行, 所以明中庸之道也.”
해석
齊人歸女樂, 季桓子受之. 三日不朝, 孔子行.
제나라 사람이 미녀들과 악사들을 보내니 계환자가 그걸 받고서 3일 동안 조회하지 않아 공자께서 떠나셨다.
歸, 如字, 或作饋. 朝, 音潮.
○ 季桓子, 魯大夫, 名斯.
계환자는 노나라 대부로 이름은 사다.
按『史記』,“定公十四年,
『사기』를 살펴보면 ”정공 14년에
孔子爲魯司寇, 攝行相事.
공자는 노나라 대사구가 되어 재상의 일을 대행했다.
齊人懼, 餽女樂以沮之”.
제나라 사람은 두려워하여 여인과 악사를 보내어 저지했다.”
尹氏曰: “受女樂而怠於政事如此,
윤순(尹淳)이 말했다. “여인과 악사를 받고 정사를 게을리 함이 이와 같았으니
其簡賢棄禮, 不足與有爲可知矣.
어진 이를 소홀히 하고 예를 버려 족히 더불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만하다.
夫子所以行也, 所謂見幾而作,
부자께서 이러하기에 떠났으니 이른바 ‘기미를 보고 일어나서
不俟終日者與?”
하루가 마치길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 范氏曰: “此篇記仁賢之出處,
범조우(范祖禹)가 말했다. “이 장에선 인자와 현인의 출처를 기록하고
而折中以聖人之行, 所以明中庸之道也.”
성인의 행실을 절충했으니 중용의 도를 밝힌 것이다.”
○ ‘논어’ ‘미자(微子)’편의 제4장은 공자가 노(魯)나라의 사구(司寇) 직을 그만두고 노나라를 떠나게 된 이유를 알려준다. 공자가 사구로서 재상의 일을 겸행하자 제나라는 노나라가 패권(覇權)을 쥘까 봐 나라의 정치를 훼손시키려고 80명의 미녀 악단을 보냈다. 노나라 상경대부(上卿大夫)인 계환자(季桓子)는 악단을 받아들여 주악(酒樂)에 탐닉(耽溺)하고 노나라 군주 정공(定公)과 함께 조정(朝廷)의 정치를 사흘이나 중단했다. 공자는 도(道)를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구 직을 사직하고 노나라를 떠났다고 한다.
귀(歸)는 드릴 궤(饋)와 같다. 여악(女樂)은 음악과 무용을 하는 여성을 말한다. 공자는 정공(定公) 때 중도(中都)의 재(宰)로부터 사공(司空)이 되고 다시 대사구(大司寇)가 되었으며 제나라와 협곡(夾谷)에서 회합을 할 때 나라의 위신을 세웠다. 또 악독한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죽였으며 마침내 재상의 직무를 겸하였다. 이때 제나라는 미녀 80명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강악(康樂)에 맞춰 춤을 익히게 하고는 좋은 말 120필과 함께 보내어 곡부(曲阜)의 성 밖에 정렬시켰다. ‘사기’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나온다.
계환자와 정공이 정치를 소홀히 하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려고 결심하되 당장 떠나게 되면 군주의 현명하지 못함을 온 천하에 공표하는 셈이 되므로 떠날 기회를 엿보았다. 얼마 뒤 교제(郊祭)가 거행된 후 정공이 대부들에게 희생의 고기를 나누어주어 오던 관례(慣例)를 지키지 않자 공자는 재상의 일을 대행하는 자신의 책임이라 하면서 마침내 노나라를 떠났다. 이 역시 ‘공자세가’에 나온다. 출처진퇴(出處進退)의 자세를 현대의 정치가는 배워야 하리라.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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