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물명(物名) 유서(類書)의 편찬
18세기말과 19세기 초엽에 들어서면서 많은 물명(物名) 유서(類書)들이 편찬되었다.【홍윤표, 1988 「十八·九世紀의 한글 類書와 實學-특히 ‘物名攷’類에 대하여-」 『동양학』 18, 481~483면 참조.】 『물명고(物名攷)』, 『청관물명고(靑館物名攷)』, 『재물보(才物譜)』, 『물보(物譜)』, 『광재물보(廣才物譜)』, 『시명다식(詩名多識)』 등 다양한 물명(物名) 유서(類書)들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유서의 등장 배경에는 당시 유행한 명물도수지학(名物度數之學) 등의 영향 관계를 우선 상정해 볼 수 있다.【李晩永, 『才物譜』 序(金允秋),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3면) “吾友李成之 才高學博 老猶不懈 病世之學士 以名物度數爲不急 而卒然有所値 齎恨於固陋者有之”】 하지만 더욱 본질적으로 유서의 편찬에는 언문불일치 속에서 야기된 언어 구사의 어려움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다음은 이를 잘 보여준다.
중국의 언어는 문자와 다름이 없다. 우리나라는 곧 언어와 문자가 판연히 서로 상관하지 않아 조석(朝夕)으로 항상 칭하는 바와 기용의식(器用衣食) 가운데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왕왕 문자로서 쓸 수 없는 것이 있고 또한 그 뜻에 어두워 혼용하는 경우도 있다. 작문(作文)이 비록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고 루함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성문(聖門)의 공부(工夫)는 또한 격물(格物)에서부터 시작하여 종국에는 평치천하(平治天下)의 커다람에 이른다. 그러니 문장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명물도수의 상세함에 있어서 깊은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홍우건(洪祐健), 『원천집(原泉集)』 권5 「담문(談文)」
홍우건(洪祐健, 1811~1866)은 중국의 음성언어는 문자와 다름이 없지만 우리는 음성언어와 문자가 불일치하여 일상적인 소소한 단어들을 문자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많다고 하였다. 언문불일치가 표현의 한계를 야기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물명고(物名攷)』 서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죽란물명고(竹欄物名考)』 1권은 내가 편집한 것이다. 중국(中國)은 말과 글이 일치하므로 한 물건을 입으로 부르면 그것이 바로 문자가 되고, 한 물건을 문자로 쓰면 그것이 바로 말이 된다. 그러므로 이름과 실재가 서로 어긋나지 않고 아언(雅言)과 속언(俗言)이 구별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시험삼아 마유(麻油) 한 가지를 논하더라도, 방언으로는 참기름(參吉音)이라 하고, 문자(文字)로는 진유(眞油)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오직 ‘진유’라고 하는 것이 아언(雅言)인 줄만 알고, 향유(香油)ㆍ호마유(胡麻油)ㆍ거승유(苣蕂油) 등의 본명(本名)이 있는 줄은 모른다. 또 어려운 것이 있다. 내복(萊葍)은 방언으로 무채(蕪尤菜)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후채(武侯菜)의 와전임을 모르고, 숭채(菘菜)는 방언으로 배초(拜草)라고 하는데, 이것은 백채(白菜)의 와전임을 모른다. 이런 예로 말하자면 중국에서는 한 가지만 배워도 이미 족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세 가지를 배워도 오히려 부족하다. 내가 물명(物名)을 편집하는 데 있어서는 본명(本名)을 위주로 하고 방언으로 해석하여, 유별(類別)로 정리하고 모은 것이 모두 30엽(葉)인 데, 누락된 것도 반이 넘는다. 그러나 규모는 이제 정해졌으니, 아마 아이들이 이를 이어서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右竹欄物名攷一卷 余所輯也 中國言與文爲一 呼一物便是文 書一物便是言 故名實無舛 雅俗無別 東國則不然 試論麻油一種 方言曰參吉音 文字曰眞油 人唯知眞油之爲雅 而不知有香油胡麻油苣蕂油等本名也 又有難者 萊葍方言曰蕪尤菜 不知是武侯菜之訛也 菘菜方言曰拜艸 不知是白菜之誤也 由是言之 中國學其一已足 東國學其三猶不足也 余爲輯物名 主之以本名 釋之以方言 類分彙輯 共三十葉 其漏者過半 然規橅旣立 庶兒曹繼而成之 -丁若鏞, 『與猶堂全書』 第一集 詩文集 권14 「跋竹欄物名攷」
이를 통하여 언물불일치 문제로 야기된 표현상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하여 각종 어휘 관련 서 적들이 편찬되는 정황을 포착할 수 있다. 이로써 보면 당시 물명 유서의 편찬에 대한 관심은 한 문을 원활하게 구사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는 측면이 강했다. 언문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휘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갔고 이는 그들이 지향했던 한문체계의 완결과 깊은 관련성을 가졌던 것이다. 다음 이유원의 언급에서 이러한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천문(天文), 지리(地理), 신체(身體), 복용(服用), 궁실(宮室), 초목(草木), 조수(鳥獸), 충어(虫魚) 등을 모두 방언(方言)으로 부른다. 그러므로 글을 대하면 당황하여 하나로 하지 못해 실로 ‘글은 글대로 말은 말대로’라는 탄식이 있으니 천자(天字)의 경우 ‘하날’이라고 주(注)를 내는 따위가 바로 이것이다.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이 『물명고(物名攷)』를 편찬하였는 데, 그 예는 마치 불서(佛書)를 당나라 방융(房融)이 필수(筆受)한 것과 같으니 피리를 재보거나 쟁반을 두드려 보는 병통은 면하였다.
我國於一切天文地理身體服用宮室草木鳥獸虫魚之名 皆以方言呼之 故臨文惝怳 莫之歸一 實有書自書言自言之歎 如天字 注河湦之類是也 丁酉山學淵 纂物名攷 其例 如佛書之房融筆受 免有揣籥叩槃之病 -李裕元, 『林下筆記』 권33 「華東玉糝編 ; 方言」
이유원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천문, 지리, 신체, 복용 등 일상의 생활용어들은 방언으로 불러서 ‘한문화’ 시키지 못하여 ‘말은 말대로이고 글은 글대로’라는 탄식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 한 말과 글의 이원적 상황을 개선하고자 『물명고(物名攷)』와 같은 서적들이 편찬되었음을 언급하였다.【이러한 모습은 柳得恭에게서도 보인다. 유득공은 農器의 俗名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글에서, ‘지금 풍속에 매일 사용하는 농기계를 모두 方言으로 불러서 막상 글을 쓰고자 할 때에는 어느 글자를 써야할지 몰라 하는데, 우연히 『農政全書』를 보고서 십칠종을 訓譯하여 아이들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柳得恭, 『古芸堂筆記』 권5 「農器俗名譯」, 201면 “今俗日用器械 皆以方言呼之 臨文茫然不知其用何等字 偶閱農政全書 訓譯十七種 以授兒輩”】 이를 통하여 일상생활용어에서는 방언을 사용하고, 학문과 외교에서는 한문을 사용하는 이중언어체계를 교정하고자 물명(物名) 관련 어휘서들이 활발히 편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겉으로 보면 분명히 한문체계의 확장이었다. 박제가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러한 물명 유서의 편찬이 가졌던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조종조(祖宗朝)에 한어(漢語)를 교습시키고, 조회할 적에 본국 말을 금하는 패(牌)까지 설치하였다. 더욱이 백성들로 하여금 한어(漢語)로 소송하게 하였으니, 어찌 다만 중국과 교빙(交聘)하는 데에 통용하는 말로써 이용하려는 것뿐이었는가! 대개 장차 크게 한 번 해보려는 것이었는데, 미처 다 변화시키지 못하였던 것이다.
祖宗朝敎習漢語 朝會設禁鄕話牌 令民以漢語入訟 豈但爲交聘通話之用而 已哉 蓋將大有爲而未盡變也 -朴齊家, 『北學議』 內篇 「漢語」
박제가는 조종조에 중국어를 단순히 외교 목적뿐만 아니라 조선의 일상생활에까지 확장시켜 중국과 다를 바 없는 중화문명 국가를 이루려 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박제가의 언급은 물명 유서의 편찬이 의도한 목적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언문불일치 문제를 해결하고 일상생활에까지 한문의 사용을 확장하여 명실상부한 중화문명의 국가를 이룩하려고 하는 것이 당시 물명유서 편찬의 주요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물보(物譜)』를 편찬한 이재위(李載威, 1745~1826)가 한문 어휘 사용의 일상성을 강조한 것은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주었다. 그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서 한문 어휘를 잘 알지 못할 경우 일상 생활에 많은 장애가 따름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그는 음식 관련 어휘들과 예 관련 용어들을 정확히 모를 경우 겪게 되는 불편함을 언급하였다.【李載威, 『物譜』 序(동문사 영인본, 1-2면) “苟名物之不明 則不獨金根杖杜之差 貽笑萬代 或錯餌伏神 誤食 者有焉 所以資生者 反以殘生可不愼歟 夫衣食者 人生之大端 故吉凶之禮 奉生送死之際 亦不出冠婚燕 響襲殮祭奠之間 苟不講於?爵肴羞冠服堂室制制 則禮無所措矣”】
이처럼 일상생활의 어휘들까지 한문체계 속에 포섭하고자 하는 것은 이 시기 중화문명을 내면화하고자 하는 노력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기존에는 정치와 문헌·제도 부분이 중심이었던 유서(類書)가 이 시기에 오면 일상생활의 물명(物名)에까지 확장되었던 것은 이러한 변화된 세태의 반영이었다.【앞서 홍윤표의 연구는 ‘物名攷’類의 유서들이 실생활에 필요한 物名에 한하여 標題項을 선택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홍윤표, 앞의 논문, 486면.】 하지만 이러한 부분은 비록 결과적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기존 한문체계의 위상이 변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물명 유서의 편찬은 한문 중심의 언문일치 의식으로서 일면 한문체계의 확장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측면으로만 볼 수 없는 정황들이 곳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했다.
첫째, 일상생활용어에까지 한문이 침투하는 것은 곧 한문의 위상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학문과 외교 등의 문자로서 존재하던 한문이 이제 일상 생활에까지 들어오고 그러한 과정에서 한문은 예전에 누리던 지위와는 다른 차원의 위상이 요구되었다. 다시 말해서 예전 학문과 외교의 언어로서의 한문이 일상생활 용어로 들어가는 것은 한문체계의 확장인 동시에 한문체계의 권위가 기존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었다.【여기에서 신성로마제국의 Charles 5세가 말한 다음과 같은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I speak Spanish to God, Italian to women, French to men, and German to my horse”(이 문장은 박순함, 앞의 논문, 63면에서 재인용) 이는 중세시대에 언어가 사용되는 대상과 영역이 각각 존재했음을 시사해 준다. 이를 통하여 볼 때, 방언으로 영위되던 일상생활에 한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언어생활에 많은 변화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 일이며 그 언어가 가지는 권위에도 상당한 정도의 변화를 불가피하게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일상성’이 의미하듯이 그 권위는 기존에 비해서 불가피하게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한자가 조선의 일상 생활용어들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중국에 없는 조선식 한자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는 이옥(李鈺, 1760~1812)의 경우에서 보듯이 조선식 한자도 당당히 중국의 한자체계에 포함될 수 있다는 자부가 생겨났다.
일찍이 『강희자전(康熙字典)』을 보니 玏字가 실려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조선 종실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또한 畓字가 있었는데 “고려 사람들의 수전(水田)을 칭한다”라고 하였다. 우장주(尤長洲=尤侗)의 악부(樂府)에는 아국(我國)의 속어(俗語)를 많이 일컬었다. 그러니 자네는 어찌 훗날 중원에서 널리 채집하는 자가 내가 일컬은 물명(物名)을 기록하고 주석하여 조선(朝鮮)의 경금자(絅錦子)가 말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지 알겠는가! 우습도다! -이옥(李鈺), 『예림잡패(藝林雜佩)』 이언인(俚諺引) 삼난(三難)
이옥은 강희자전 에 보이는 玏字와 畓字는 모두 조선과 고려의 한자라고 하면서 우장주(尤長州)의 악부(樂府)에는 아국(我國)의 속어(俗語)를 많이 일컬었으니 훗날 중국에서 널리 채집하는 자가 자신이 말한 물명(物名)을 기록하여 조선의 경금자(絅錦子=이옥)가 말한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옥은 조선의 사물 들을 한자화 하는 과정에서 조선식의 한자도 중국의 한자와 대등한 지점에서 파악될 수 있는지 위를 얻게 되었음을 인지하고 이를 과감하게 인정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한자의 탈중심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상황들을 보여주며 바로 이전 세대인 유득공이 조선의 속자(俗字)를 부정적으로 파악한 것과는【柳得恭, 『古芸堂筆記』 권3 「俗字」, 309면 참조.】 구별되는, 이에서 한 단계 발전한 것이었다. 이옥뿐만 아니라 홍길주(洪吉周, 1786~1841) 또 한 太, 木, 畓, 娚妹, 媤家 등 조선식 한자 표현에 대해서 비리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洪吉周, 『孰遂念』 第15觀 「擧業念界」 “今之以黃豆爲太 以棉布爲木 以準爲丁 以挺爲臿 田沓之沓 有𩑠之𩑠 娚妹之娚 媤家之媤 以至于右謹陳所志矣段 使道分付內辭緣等語 俱用之於高文大冊碑碣序記 何不可之有”】 이제 한자는 중국만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도 그에 대한 일정한 지분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으며, 우리 주변의 일상 용어들을 친근하게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되어갔다. 이는 19세기 전반 일어난 중요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둘째, 한문과 조선의 고유 언어들을 대응하는 과정에서 언문이 상당 부분 활용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명고』의 경우 많은 부분 언문으로 주석을 달았고, 나아가 한자보다 언문을 기준에 두고 분류한 최초의 문헌인 『언음첩고(諺音捷考)』가 나오기도 하였다.【홍윤표, 앞의 논문, 488~489면.】 이처럼 한문 어휘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언문이 적극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한 교섭과정은 한자와 언문의 대응을 통해서 언문을 통한 세계의 표현도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류준필, 2008 「근대 계몽기 어문현실과 정약용: 조선후기 어문인식의 근대적 굴절 양상 연구 서설」 『흔들리는 언어들』(임형택 외 엮음),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193면 참조.】 조선의 고유한 소소한 것들을 한문체계 안으로 포섭시키는 과정에서 기존과는 대별되는 한문과 언문의 교섭이 활발히 이루어진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언문이 모국어인 한, 언문을 통하여 한문을 체득할 수밖에 없었고 이 시기 한문을 통하여 언문을 포섭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언문과 한문의 교섭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활발해졌다. 그 과정에서 한문으로 온전히 전달될 수 없는 조선의 고유한 영역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정동유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러한 상황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대저 개나리가 신이(辛夷)가 된 것도 이미 뜻밖인데, 지금 개나리와 이름이 같은 물건도 아울러 신이라고 이름하니 어찌 정말 뜻밖의 일이 아니겠는가! 이미 물명(物名)에 대하여 몽매하기가 이와 같다면 차라리 언문(諺文)으로 쓰는 것이 어찌 잘못을 줄이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鄭東愈, 『晝永編』 二
정동유는 물명(物名)을 한자로 표기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언문으로 표기하는 것이 오히려 잘못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한문 표현의 정확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모순되게도 한문으로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의미의 영역들이 발견되고, 그와 함께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언문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물명고(物名攷)』를 지은 유희(柳僖)가 『언문지(諺文志)』를 통하여 언문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이것과 관련이 깊었다. 유희는 정동유의 말을 빌어서 언문이 갖는 표현과 소통의 정확성을 설명하였다【柳僖, 『諺文志』 序(한양대학교 국학연구원 영인본, 1면) “鄭丈東愈工格物 嘗語不侫 子知諺文妙乎 夫以字 音傳字音 此變彼隨變 古叶今韻 屢舛宜也 若註以諺文 傳之久遠 寧失眞爲慮 況文章必尙簡奧 以簡奧通情 莫禁誤看 諺文往復 萬無一疑 子無以婦女學忽之”】. 결국 음성언어에 대한 관심을 통하여 언문불일치 문제의 자각, 언문불일치를 극복하기 위한 물명 유서의 편찬, 물명 유서의 편찬을 통하여 일상생활 용어에 대한 관심, 다시 이 과정에서 언문의 효용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정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정동유와 유희가 한문 어휘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동시에 언문에 대해서도 깊은 연구를 진행하였던 것은 이러한 상황들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요컨대, 동문(同文) 의식의 확대과정에서 단순히 학문과 외교 영역을 넘어서 일상 생활에서도 다양한 한문 어휘를 구사하고자 하는 의식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증대하였다. 다시 말해서 한문을 통 한 언문일치를 위해서 일상적 사유와 생활에까지 한문은 중요한 표현의 수단과 도구가 되어야만 했다. 이는 기존에 학문은 한문이, 일상생활은 방언이 담당하는 양층언어체계가 변화하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이것은 언뜻 보면 한문체계의 확대였지만 소소한 생활의 어휘들을 한문체계 속에서 구현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한문의 권위도 기존에 비해서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문으로 온전히 표현해 낼 수 없는 영역에서 언문이 사용될 수 있는 공간도 새롭게 형성될 수 있었다. 이는 한문체계의 권위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대로 유지되기는 어려웠을 정황들을 보여주며, 또한 이는 기존 한문체계가 만들어낸 사회적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문제였다.
인용
1. 머리말
2. 음성언어에 대한 관심 증대
3. 언문일치 인식의 대두
1) 언문불일치의 문제 제기
2) 물명류서의 편찬
4. 백화문학과 방언·향어·속어
1) 백화 문학의 확대
2) 방언·향어·속어의 사용
5.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