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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조성산,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조선 지식인의 어문 인식 경향 - 4. 백화문학과 방언·향어·속어, 1) 백화문학의 확대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조성산,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조선 지식인의 어문 인식 경향 - 4. 백화문학과 방언·향어·속어, 1) 백화문학의 확대

건방진방랑자 2019. 11. 30.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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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백화문학(白話文學)과 방언(方言향어(鄕語속어(俗語)

 

 

1) 백화(白話)문학의 확대

 

이 시기 음성언어의 문제는 언문일치의 영역뿐만 아니라 백화문학(白話文學)과 방언(方言향어(鄕語속어(俗語)의 사용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18세기 후반은 문체반정(文體反正) 등 글쓰기에 대한 다양한 고민이 표출되던 시기였다. 새로운 문체의 글쓰기 문제가 고민되고 제기되는 것은 기존 진한고문체(秦漢古文體)와 당송고문체(唐宋古文體) 등의 고문(古文)에 입각한 정형화된 문언적 글쓰기가 이 시기에 오면 다양한 현실적 요구와 솔직한 욕망들을 표현하는 데 점차 한계에 부딪치게 됨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세부적인 감정과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다른 종류의 글쓰기가 고민되었던 것이다. 명대(明代)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 등 음성언어에 가까운 백화문학(白話文學)이 조선에 전래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한 점에서 조선에서도 중국에서와 같이 백화(白話)문학의 수요가 급격하게 창출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중국과 조선의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하나, 조선에서도 백화문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주목해야 하는 현상이다. 앞서 박제가 등의 한어(漢語)를 통한 언문일치 주장 속에는 중국인처럼 자신의 의사를 자유자재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의식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에는 기존 문체에 대한 불만과 의사표현에 있어서 좀더 효율적인 문체를 찾고자 하는 생각도 함의되어 있었다. 기존 문언적(文言的)인 문체는 틀에 짜여져 있어서 복잡다단한 감정들과 사물의 세부적인 상황들을 전달하는 데 많은 한계를 노정하였던 것이다. 그 점에서 그들이 명청소품(明淸小品)의 대표적 작가들인 원굉도(袁宏道, 1568~1610)와 김성탄(金聖嘆, 1608~1661) 등을 수용하면서 정조(正祖)촉급(促急)’하다고 표현한正祖, 弘齋全書164 日得錄 四 文學 四 敎筵臣曰 文章與世道上下 代各不同 而至於明末之文 殺促 急 傾巧破碎 不忍正視 此專由於時勢風氣之使然 한문구사로 나아갔던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명말 원굉도(袁宏道)원중랑집(袁仲郞集)18세기 후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혔다.조선후기 한문학과 원굉도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심경호, 2004 조선후기 한문학과 袁宏道」 『한국한문학연구34 ; 남정희, 2005 조선후기 공안파 서적 수용실태의 탐색」 『한국고전연구12 ; 강명관, 2007,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 소명출판 참조. 원굉도는 양명좌파였던 이탁오(李卓吾, 1527~1602)의 제자로서 활달하고 세밀한 현실묘사로 지식인 사회의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다.원굉도의 문학사상에 대해서는 이기면, 2007 원굉도의 문학사상, 한국학술정보 참조.

 

많은 지식인들은 원중랑집에 담긴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용하고 이를 새롭게 발전시켰다. 또한 원굉도의 글쓰기와 동궤에 있던 김성탄(金聖嘆)의 작품들도 박지원을 포함하여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들을 참조할 수 있다. 한매, 2002 김성탄 문학비평에 대한 조선후기 문인의 수용양상」 『비교문학29 ; 한매, 2003 조선후기 金聖嘆 文學批評의 수용양상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 정선희, 2005 朝鮮後期 文人들의 金聖嘆 評批本에 대한 讀書 談論 硏究」 『東方學志129. 정조(正祖)는 근래 잡서(雜書)를 좋아하는 자들이 수호전(水滸傳)사기(史記)와 같이 여기고 서상기(西廂記)모시(毛詩)와 같이 여기니 가소롭다는 표현을 쓰기도 할 정도로 김성탄의 작품은 널리 읽히고 있었다.正祖, 弘齋全書163 日得錄 三 文學 三 近日嗜雜書者 以水滸傳似史記 西廂記似毛詩 此甚可笑 다양한 인물묘사와 세태에 대한 세부적인 풍자, 그리고 구어에 가까울 정도로 자유로운 문장표현 등은 조선 지식인 사회에 많은 공감을 얻었던 것이다. 이는 기존 글쓰기, 특히 모범적인 문체였던 한구정맥(韓歐正脈)으로 표현되는 의리 지향적인 글쓰기와는 구별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글쓰기는 정확한 의사 소통과 풍부한 어휘 사용의 문제와도 결합하고 있었다. 이상황(李相璜, 1763~1841)은 패관소품을 비판하는 힐패(詰稗)라는 글을 남겼다. 흥미롭게도 이 글에는 당시 사람들이 인식했던 패관소품이 갖는 장점들이 잘 드러나 있었다. 이상황은 패자(稗者)의 말을 빌어서 패관소품의 장점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패자(稗者)가 말하기를, “패관소품을 읽으면 대개 기자(奇字)와 오어(奧語)를 취하게 된다.” 패자(稗者)가 말하기를, “패관소품을 읽으면 장차 다식광문(多識廣聞)하게 된다.” 패자가 말하기를, “문장 가운데 가장 형용하기 어려운 곳은 항상 패신(覇臣)과 얼자(蘖子)가 버림받아 떠돌며 고생하는 부분에 있는데, 오직 패관소품만은 이를 핍진(逼眞)하게 묘사할 수 있으니 성조(聲調)가 청초(淸楚)하고 기상(氣象)은 처암(凄黯)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읽게 하면 자신도 모르게 알연(戛然)하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니 패관소품이 나온 뒤로 문장의 묘함은 극진해졌다.” -이상황(李相璜), 동어유집(桐漁遺集)』 「힐패(詰稗)

 

 

패자는 패관소품 문학의 장점으로 다식광문(多識廣聞)에 도움이 되고 핍진(逼眞)한 사물묘사가 가능하게 되고, 성조(聲調)가 청초하고 기상(氣象)은 처량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패관소품 문학 속에는 의성어, 의태어 등 다양한 형용사가 등장하여 사물에 대한 핍진한 묘사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음성언어가 가지고 있었던 기능, 즉 글로 다하기 어려운 사물의 정밀한 형용과 관련이 있었다. 또한 패자는 글에 소리가 첨부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다양한 일상의 어휘들이 등장함으로써 다식광문(多識廣聞)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다식광문은 앞서 언급한 물명 유서 편찬의 목적과도 같은 것으로서 패관소품체의 문장이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어문(語文)에 관련된 문제의식들과 얼마나 밀접하게 결합하고 있었던가를 보여준다.

 

 

 

 

인용

목차 / 지도

1. 머리말

2. 음성언어에 대한 관심 증대

1) 명청교체와 음성언어 인식의 계기

2) 음성언어 인식과 조선적인 것

3. 언문일치 인식의 대두

1) 언문불일치의 문제 제기

2) 물명류서의 편찬

4. 백화문학과 방언·향어·속어

1) 백화 문학의 확대

2) 방언·향어·속어의 사용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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