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장서를 남기고 싶거든 친구들에게 빌려주게
『연암집』의 척독 중에 「여인與人」이라고만 된 편지글이 있다. 말하자면 수취인인 분명치 않은 편지인데, 윗글과 관련지어 읽을 때 유련에게 보낸 글이 분명하다.
그대가 고서古書를 많이 쌓아두고도 절대로 남에게는 빌려주지 않으니, 어찌 그다지도 딱하십니까? 그대가 장차 이것을 대대로 전하려 하는 것입니까? 대저 천하의 물건은 대대로 전할 수 없게 된지가 오래입니다. 요순이 전하지 않은 바이고 삼대三代가 능히 지키지 않았던 것인데도, 옥새를 새겨 만세에 전하려 했으니 진시황을 어리석다고 여기는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오히려 몇 질의 책을 대대로 지켜내겠다고 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책은 정해진 주인이 없고, 善을 즐거워하고 배움을 좋아하는 자가 이를 소유할 뿐입니다. 足下多蓄古書, 絶不借人, 何其謬也? 足下將欲以世傳耶? 夫天下之物, 不能傳世也, 久矣. 堯舜之所不傳, 三代之所不能守, 而秦皇帝之所以爲愚也. 足下尙欲世守於數帙之書, 豈不謬哉? 書無常主, 樂善好學者有之耳.
만약 후세가 어질어 善을 즐거워 하고 배우기를 좋아 한다면, 벽 사이에 간직해 두었거나 무덤 속에 비장해둔 귀한 책이나 여러 차례 번역해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의 책도 장차 남양南陽의 세가世家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만약 후세가 어질지 않아 교만 방일하고 나태하게 되면 천하도 또한 지킬 수가 없거늘 하물며 책이겠습니까? 말을 남이 타도록 빌려주지 않는 것은 공자께서도 오히려 장차 상심하셨거니와, 책을 지닌 사람이 남이 읽도록 빌려주지 않는다면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若後世賢, 樂善好學, 壁間所藏, 冢中所秘, 九譯同文, 將歸於南陽之世矣. 若後世不賢, 驕逸惰荒, 天下亦不可守, 而況於書乎? 馬不借乘, 仲尼猶且傷之, 有書者不借人讀之, 將若之何?
그대가 만약 자손이 어질든 어리석든 모두 대대로 지켜낼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더더욱 큰 잘못입니다. 군자가 창업하여 실마리를 드리움은 계승할만 것이 되는 까닭에 법으로 이를 분명하게 하고, 덕德으로 이를 이끌며, 모습으로 이를 보여주지 않음이 없는데도, 후세가 오히려 혹 이를 실추하여 계승함이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관석關石과 화균和勻을 하夏나라의 자손들이 진실로 대대로 지킬 수 있었다면 구정九鼎을 어찌 옮겼겠으며, 밝은 덕과 좋은 향기를 은나라의 자손들이 진실로 대대로 지킬 수 있었더라면 박사亳社를 어찌 고쳤겠습니까? 천자를 공경함을 주나라의 자손들이 진실로 대대로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면 명당明堂을 어찌 헐었겠습니까? 足下若言子孫無賢愚, 皆可以世守, 則是又大謬. 君子刱業垂統, 爲可繼也. 故莫不明之以法, 將之以德, 示之以容. 後世猶或失墜, 罔有承將. 關石和勻, 夏之子孫, 苟可以世守, 則九鼎何遷; 明德馨香, 殷之子孫, 苟可以世守, 則亳社何改; 天子穆穆, 周之子孫, 苟可以世守, 則明堂何毁?
이로 말미암아 보건데, 법을 밝게 하여 후세에 드리우고, 덕으로 이끌고 모습으로 보여주더라도 오히려 지키기가 어렵거늘, 이제 천하의 고서古書를 사사로이하여 남이 선하게 되도록 빌려주지 아니하면서 교만하고 인색하게 책을 끼고서 후세에 건네주려 하니,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군자는 글로써 벗을 모우고, 벗을 가지고 어짐을 보태나니, 그대가 만약 어짊을 구한다면 천 상자에 가득한 책을 벗들에게 주어 함께 닳아 없어지게 함이 옳을 것입니다. 이제 높은 누각에다 묶어 두고서 구차하게 후세의 계획을 세우려한단 말입니까? 由是觀之, 明法而垂之, 德容而目示之, 尙猶難守, 今乃私天下之古書, 不與人爲善, 挾驕吝以濟其世, 無乃不可乎? 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 子如求仁, 千箱之書, 與朋友共弊之, 可也. 今乃束之高閣, 區區爲後世計耶? |
이 편지로 보아 유련은 천 상자에 달하는 책을 소장했던 엄청난 장서가였고, 그 중에는 구해보기 힘든 책도 많았으되 남에게는 절대로 빌려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그는 그 책 마다 도장을 찍어 소유주를 밝히고, 그것으로 대대로 물려 전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 그가 『유씨도서보柳氏圖書譜』라는 인보집을 가져와 연암에게 서문을 부탁했던 것이다. 아마 당초 그의 마음은 연암의 서문에서 귀한 인장을 이리도 많이 모아 마침내 한권의 책으로 묶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장한 일이라는 식의 덕담을 기대했을 법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책 위에 찍힌 도장이 아니다. 그것들을 흩지 않고 대대로 잘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3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부자가 아니었던 집안이 없다. 결코 오래갈 수 없는 물질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진시황이 화씨의 구슬을 부수어 옥새를 만들었지만 만세는커녕 제 아들 대까지도 가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도장이 아니다.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다. 책은 정해진 주인이 있을 수 없다. 그 책을 읽어 제 삶의 자양을 삼을 수 있는 낙선호학樂善好學의 사람만이 책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 후손이 어질어 배우기를 좋아한다면 아무리 귀하고 구하기 어려운 책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구해볼 것이다. 그렇지 않고 교만 방일한데다 게으르기까지 하다면 그에게는 천하를 가져다주어도 보전하지 못할 터이니 하물며 책 따위이겠는가? 귀한 책이 있다 해도 아무 짝에 소용없이 좀 먹고 말거나, 하루 밤 술값에 쉬 팔아넘기고 말 것이다.
이 편지글에 보이는 연암의 어조는 상당히 격앙되어 있다. 그 사이에는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어떤 사연이 끼어 있을 법도 하다. 『과정록』에 보면 “선군의 문장 중에는 세상 유자儒者 가운데 거짓 꾸미고 명성을 훔치는 자를 나무라고 꾸짖는 것이 꽤 있다”고 했는데, 「유씨도서보서」나 「여인」같은 글이 바로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이 글을 받아든 유련은 당연히 몹시 불쾌했겠는데, 연암의 서문은 결국 자신의 『연암집』에만 실리고 만 글이 되고 말았을 터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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