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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하 - 송정생래교독서우협서(送鄭生來僑讀書牛峽序) 본문

산문놀이터/조선

신정하 - 송정생래교독서우협서(送鄭生來僑讀書牛峽序)

건방진방랑자 2021. 4. 3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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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협에 독서하러 떠나는 정래교를 전송하며

송정생래교독서우협서(送鄭生來僑讀書牛峽序)

 

신정하(申靖夏)

 

 

가난하기에 배움을 그만 둔 사람과 그럼에도 배운 사람

余嘗見世之有志於學而貧者, 往往有奔走於口腹, 以不能自振而墮其業者. 未始不惜其人之窮厄, 亦有以竊歎其誠之不篤也. 夫貧固可憂也, 學而不能忘貧之爲憂, 則其所謂學之淺深, 盖可見矣.

故古之爲學者, 未聞以其貧廢學, 良以好學之心, 能勝其惡貧之心故也.不則不足以言學也.

 

가난을 극복하고 학문에 뜻을 둔 정래교

鄭生潤卿, 志于學有年矣, 然顧貧甚, 恐其不能有以自振而墮其業也. 將棄去家事, 與同學數子, 讀書於牛峽, 以行日告余, 願有言勖之.

嗚呼! 生之志可謂勇哉! 然余觀其色而聽其言也, 悒悒然似不能忘貧之憂者. 余恐生之過於憂貧而遂不能篤於爲學也, 生其戒之哉.

 

안연의 마음으로 학문하길

孔子曰: “朝聞道, 夕死可矣.” 言道之急於身也如此.

今生之所憂於貧者, 不過口體之奉而已, 甚則惡其死而已, 未見其急於所謂道與學也.

古之嗜學而安貧者, 無過顔氏. 然世之病於貧者曰: “彼猶有簞食瓢飮之供, 吾之貧甚於, 則安得不以動吾心?”

嗚呼! 是徒知顔氏之有簞瓢, 而不知其樂之嘗在二者之外也. 夫顔氏之學, 視道急於生, 故不以口腹爲心, 如使氏無此二者, 其樂固將自如. 然則氏之樂, 非有待於二物者也, 不然, 曷足可稱哉?

嗚呼! 士之志於學而不以氏自期者, 果可以言學乎? 生能審於此而知所取捨, 則庶乎少瘳其憂矣. 恕菴集卷之十

 

 

 

 

 

 

해석

 

가난하기에 배움을 그만 둔 사람과 그럼에도 배운 사람

 

余嘗見世之有志於學而貧者,

내가 일찍이 보니 세상에 학문에 뜻을 뒀지만 가난한 사람이

 

往往有奔走於口腹, 以不能自振而墮其業者.

이따금 먹고 사는 일[口腹之累]에 분주하여 스스로 진작시킬 수 없어 학업을 포기한다.

 

未始不惜其人之窮厄,

처음엔 그 사람의 궁핍을 안타까워하지 않음이 없었고

 

而亦有以竊歎其誠之不篤也.

또한 속으로 성실함이 돈독하지 못함을 탄식했다.

 

夫貧固可憂也,

대체로 가난함은 진실로 걱정할 만하지만

 

學而不能忘貧之爲憂,

배우면서도 가난이 근심이 됨을 잊을 수 없다면

 

則其所謂學之淺深, 盖可見矣.

말했던 학문의 얕고 깊음을 대개 볼 수 있다.

 

故古之爲學者, 未聞以其貧廢學,

그러므로 옛날에 학문을 했던 사람들은 가난으로 학문을 그만뒀다는 것을 듣지 못했으니

 

良以好學之心, 能勝其惡貧之心故也.

진실로 호학하는 마음으로 가난을 미워하는 마음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不則不足以言學也.

그렇지 않았다면 배움이라 말하기엔 부족하다.

 

 

 

가난을 극복하고 학문에 뜻을 둔 정래교

 

鄭生潤卿, 志于學有年矣,

정윤경졍생윤경(鄭生潤卿): 정래교(鄭來僑). 1681(숙종 7)1757(영조 33). 조선 후기의 시인·문장가.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윤경(潤卿), 호는 완암(浣巖). 출신은 비록 한미한 사인(士人)이었으나 시문에 특히 뛰어나 당대 사대부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1705(숙종 31) 역관으로 통신사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갔을 때 독특한 시문의 재능을 드러내 더욱 명성을 얻었다. 그의 시문은 홍세태(洪世泰)의 계통을 이은 것으로서 시와 문장이 하나같이 천기(天機)에서 나온 것과 같은 품격을 지녔다는 평을 들었다. 저서로 완암집(浣巖集)24권이 전한다.이란 사람이 학문에 뜻을 둔 지 여러 해지만

 

然顧貧甚, 恐其不能有以自振而墮其業也.

돌이켜보면 가난이 극심해 스스로 진작시킬 수 없어 학업을 그만둘까 걱정했었다.

 

將棄去家事, 與同學數子,

장차 집안 일을 버려두고 동학 몇 사람과

 

讀書於牛峽, 以行日告余,

우협에서 책을 읽을 적에 가던 날에 나에게 고하여

 

願有言勖之.

말을 지어 그를 권면해주길 원했다.

 

嗚呼! 生之志可謂勇哉!

! 정생의 뜻이 용맹하다 할 만하구나!

 

然余觀其色而聽其言也,

그러나 내가 그 얼굴색을 보고 말을 들어보니

 

悒悒然似不能忘貧之憂者.

근심스레 가난의 근심을 잊진 못한 사람인 듯했다.

 

余恐生之過於憂貧而遂不能篤於爲學也,

나는 정생이 가난을 걱정함에 지나쳐 마침내 학문하는 데에 성실하지 못할까 걱정되니

 

生其戒之哉.

정생은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안연의 마음으로 학문하길

 

孔子曰: “朝聞道, 夕死可矣.”

공자께서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괜찮다.”라고 했으니

 

言道之於身也如此.

도가 몸에 급선무임이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今生之所憂於貧者, 不過口體之奉而已,

이제 정생이 가난을 근심하는 것은 입과 몸의 받듦에 불과할 뿐이고

 

甚則惡其死而已,

심해봐야 죽음을 미워할 뿐이지

 

未見其急於所謂道與學也.

말했던 도와 학문에 급히 하는 건 보질 못했다.

 

古之嗜學而安貧者, 無過顔氏.

옛적에 학문을 즐기면서 가난을 편안히 여긴 사람은 안연을 넘어서질 못했다.

 

然世之病於貧者曰:

그러나 세상에 가난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말들 한다.

 

彼猶有簞食瓢飮之供,

저 안연이란 사람은 오히려 한 대나무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에 물의 제공이 있었지만

 

吾之貧甚於,

나의 가난은 안씨보다 극심하니

 

則安得不以動吾心?”

어찌 나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嗚呼! 是徒知顔氏之有簞瓢,

! 이것은 다만 안씨의 대나무와 표주박이 있음만 아는 것이지

 

而不知其樂之嘗在二者之外也.

그 즐거움이 일찍이 두 가지 바깥에 있음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夫顔氏之學, 視道急於生,

대체로 안씨의 학문은 도를 봄을 사는 것보다 급하게 여겼기 때문에

 

故不以口腹爲心,

입과 배를 채우는 것으로 마음을 삼지 않은 것이니

 

如使氏無此二者, 其樂固將自如.

만약 안씨에게 이 두 가지가 없게 했더라도 즐거움은 진실로 장차 절로 그러했으리라.

 

然則氏之樂, 非有待於二物者也,

그러하다면 안씨의 즐거움은 이 두 가지 사물에 기대지 않은 것이니

 

不然, 曷足可稱哉?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칭송받을 만했겠는가?

 

嗚呼! 士之志於學而不以氏自期者,

! 선비로 배움에 뜻을 두고서 안씨로 스스로 기약하지 않는 사람은

 

果可以言學乎?

과연 배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

 

生能審於此而知所取捨,

정생이 여기에서 살펴 취하고 버릴 것을 알 수 있다면

 

則庶乎少瘳其憂矣. 恕菴集卷之十

그 근심을 적게 하고 줄이는 데에 가까우리라.

 

 

인용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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