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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사, 조선전기의 다양한 전개 - 1) 문학관념의 성립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조선전기의 다양한 전개 - 1) 문학관념의 성립

건방진방랑자 2021. 12. 20.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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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학관념(文學觀念)의 성립(成立)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건국은 처음부터 이성계(李成桂) 일파(一派)에 의한 왕권(王權)의 도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고려(高麗) 왕권(王權)이 사실상 그 권능(權能)을 상실하고 있을 때, 정쟁(政爭)의 수습에서 성공한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낡은 왕권의 회복과 새 왕조의 창업을 놓고 그들의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후자쪽을 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로 고려 왕권을 옹호하던 무력한 문벌관료층(門閥官僚層)이 퇴진하고 개국공신(開國功臣)을 추종하는 신진관료(新進官僚)들이 대거 진출하여 정치판도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신분질서의 재편성이 용이하게 이루어져 지방에서 오랫동안 세력을 부식해온 향리층(鄕吏層, 戶長 )이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하게 된 것과 같은 것이 그러한 것 중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다. 이른바 삼노팔리(三奴八吏)삼노팔리(三奴八吏): 종 출신의 세 집안과 아전 출신의 여덟 집안. 삼노는 정도전, 서기, 송익필의 집안이고, 팔리는 동래 정씨, 반남 박씨, 한산 이씨, 흥양 유씨, 진보 이씨, 여흥 이씨, 여산 송씨, 창녕 서씨의 집안이다. 모두 처음에는 종 또는 아전이었으나 뛰어난 자손의 덕으로 양반이 되었다팔리(八吏)’가 정치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도 대부분 이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의 건국은 역사적인 개념에서 보면 국성(國姓)이 왕씨(王氏)에서 이씨(李氏)로 바꾸어진 것을 의미하게 되지만 여초(麗初)에서부터 과거제도를 실시한 이래 사류정치(士類政治)로 일관해온 정치풍토의 기본성격에는 큰 변혁을 가져온 것이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성립으로 우리나라 근대사의 성격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은 송대(宋代)의 성명철학(性命哲學)주자학(朱子學)을 정치이념으로 채택한 사실이다. 이 주자학적(朱子學的) 질서는 신왕조(新王朝)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제도ㆍ문화의 사상적 제체계(諸體系)를 사변적(思辨的)인 윤리철학(倫理哲學)으로 개편하는데 중요하게 구실했기 때문이다. 서둘러 과거제도를 개혁한 것도 그러한 것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이성계(李成桂)는 국초(國初)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먼저 인사정책(人事政策)의 중핵이 되어온 과거제도를 바꾸는 일부터 착수한다【「太祖卽位敎書참조. 새로이 문무산계(文武散階)를 실시하고 문무양과제(文武兩科制)를 단행하여 명실(名實)이 상부(相符)한 양반관료제(兩班官僚制)의 확립을 꾀하게 된다. 사장(詞章)을 주로 하던 고려 이래의 감시(監試, 조선조의 進士試)를 혁거(革去)하고 그 대신 경전의 기송(記誦)을 시험과목으로 하는 생원시(生員試)를 중시한 것도 같은 뜻에서 나온 것임은 물론이다. 이러한 주자학(朱子學)의 철학적 사고는 문학의 세계당시의 표현대로 따른다면 사장학(詞章學)이라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에 있어서도 문학을 문학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문학 위에 사상을 올려놓고 문이재도(文以載道)’문이관도(文以貫道)’와 같은 세련된 표현을 빌려, ()은 도()를 나타내는 수단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같이 사상이 문학의 기능을 규제하는 지배원리로 군림함에 따라 문학은 스스로의 내적 질서에 따라 그 본질을 변별하는 제구실을 다할 수 없게 되고 문학외적인 사상적 표준에 의하여 문학이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고려말 이전까지도 당시의 유학은 한()ㆍ당()의 사장학(詞章學)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나라 역사상 일찍이 보지 못한 사장학(詞章學)의 전통이 수립되었으며, 때문에 사상과 같은 것이 문학을 논하는 표준이 된 일이 없다. 주자학(朱子學)을 처음으로 수입한 여말(麗末)에 있어서도 문학에 대한 요구는 시경(詩經)의 정신을 강조하는 수준 이상의 것이 아니다민병수, 朝鮮前期 漢詩樣相), 韓國文學史爭點, p.318 참조.

 

 

조선조에 이르러 정도전(鄭道傳)이 직접 자기 목소리로 재도관(載道觀)도은문집서(陶隱文集序)에서 개진하게 되며 이것이 선성(先聲)이 된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은 하늘의 문(, 文飾)이요, 산천초목(山川草木)은 땅의 문()이요, 시서예악(詩書禮樂)은 사람의 문()이다. 그러나 하늘은 기()로 나타내고 땅은 형()으로써 나타내지만, 사람은 도()로써 나타낸다. 그러므로 문()이란 도()를 싣는 그릇이다.

日月星辰, 天之文也; 山川草木, 地之文也; 詩書禮樂, 人之文也. 然天以氣, 地以形, 而人則以道, 故曰: “文者, 載道之器.”

 

 

이 글에서 그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은 천()의 표현으로 산천초목(山川草木)은 땅의 표현으로, 그리고 시서예악(詩書禮樂)은 인()의 표현으로 보았으며, 그 표현 질서는 천()에 있어서 기(), ()에 있어서 형(), 인간(人間)에 있어서는 도()에서 구함으로써, 인간에게 시서예악(詩書禮樂)을 나타내는 질서는 도(). 이 도()의 질서를 표현하는 수단이 곧 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정도전(鄭道傳)이 앞에서 명료하게 재도관(載道觀)을 선창(先唱)했지만 권근(權近)만큼 효용론(效用論)을 실천한 시인(詩人)이나 문장가(文章家)도 찾아보기 어렵다. 정삼봉문집서(鄭三峯文集序)에 드러난, 그의 진술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은 천지간(天地間)에 도()와 더불어 소장(消長)을 같이 하므로, ()가 위에서 행하면 문()은 예악(禮樂)과 정교(政敎)의 사이에 나타나고, ()가 아래에서 밝혀지면 문()은 간편(簡編)과 필삭(筆削) 속에 깃든다. 그러므로 전모(典謨)ㆍ서명(誓命)의 문()과 산정(刪定)ㆍ찬수(贊修)의 서()가 그 도()를 싣기는 마찬가지이다.

文在天地間, 與斯道相消長, 道行於上, 文著於禮樂政敎之間, 道明於下, 文寓於簡編筆削之內. 故典謨誓命之文, 刪定贊修之書, 其載道一也.

 

 

이와 같이 스스로 재도(載道)를 말하고 있지만, 특히 문()의 효용성(效用性)을 강조한 그는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을 하나의 도()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그의 시작(詩作)의 도처에서 유로(流露)되고 있는 시경시(詩經詩)의 정신으로도 알 수 있거니와 이첨(李詹)이 쓴 목은선생문집서(牧隱先生文集序)에서 그의 목소리를 통하여 직접 들어볼 수도 있다.

 

 

문사(文辭)는 덕()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다. 화순(和順)한 기운이 쌓이는 것과 빛나는 문장이 발현되는 것은 가릴래야 가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문사(文辭)와 정화(政化)가 서로 유통하게 되어 시대의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움에 따라 그 소리가 슬프게도 되고 즐겁게도 되나니, 이는 다 성정(性情)을 읊어 그 속에 쌓여 있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文辭德之見乎外者也. 和順之積, 英華之發, 有不容揜者矣, 夫文辭與政化, 相爲流通, 人世之治亂, 而音響有哀樂之殊, 皆所以吟詠性情, 以達其所蘊者也.

 

 

이 글에서 그는 문장을 한갓 도()의 부용(附庸)으로만 생각하는 형식적인 재도관(載道觀)으로 떨어지지 아니하고 문장(文章)은 덕()의 외화(外華)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그가 시천견록(詩淺見錄)에서 시의 근본을 인도(人道)로서 파악하여 그 실현범위를 가족(家族)ㆍ국가(國家)ㆍ천하(天下)로 보고 부부(夫婦)나 조정(朝廷)이 바른 길을 가도록 이끌어가는 것을 시경(詩經)의 용()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관념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는 국초 이래의 문치(文治)에 힘입어 이후 100여년 동안 문풍이 크게 떨쳤으며 많은 문사들이 배출되었다.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을 비롯하여 양성지(梁誠之)조운흘(趙云仡),성현(成俔) 등이 모두 목청을 돋우어 문학의 효용성을 강조했지만 조선조 사장학(詞章學)의 전통이 그들에 의하여 이룩되었으며 막중한 창업의 정지 작업에 문장을 필요로 하는 현실적 요구를 외면하지 않았다.

 

특히 권근(權近)은 태종(太宗) 7년에 관학사목(觀學事目)을 올려 과거제도의 개혁을 꾀한 바 있다. 문과초장(文科初場)의 제술론(製述論)을 골자로 한 문과개정안(文科改正案)이 그것이다. 강경(講經)을 파()하고 제술(製述, 글짓기)로써 고시(考試)할 것을 주장한 그는 문장의 본래적 기능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성지(梁誠之)성현(成俔) 등이 사장은 편폐(偏廢)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옹호론(擁護論)을 개진한 것도 그 궤철(軌撤)을 같이하는 것이다.

 

서거정(徐居正)계정집서(桂庭集序)에서 문장의 기능적 특성을 구별하여 대각(臺閣)의 문장(文章)과 초야(草野)의 문장(文章), 선도(仙道)의 문장(文章)으로 삼분(三分)한 바 있거니와 대각(臺閣)의 문장(文章)이 크게 떨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정은 다른 것이 없다. ()를 인식하는 시대인의 의식은 역사단계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지만, 문장의 본래적 기능을 따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문장을 하찮은 기술이라 생각한 이때의 시는 문장 가운데서도 더욱 미미한 것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으며 그것도 호걸지재(豪傑之才)가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김종직(金宗直), 윤선생상시집서(尹先生祥詩集序)」】.

 

다만, 세교(世敎)에 관계되는 것은 마땅히 군자(君子)가 취해야 할 것이라 하여 전통적인 시()의 기능만은 구제 받을 수 있는 여지를 터 놓았을 뿐이다서거정, 동인시화(東人詩話)』】.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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