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한시와 모더니즘②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여 세우고,
죵죵 다리 깟칠한
산(山)새 걸음거리.
여울 지여
수척한 흰 물살,
갈갈히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빗날
붉은 닢 닢
소란히 밟고 간다.
정지용의 시를 한 수 더 읽어보자. 인용한 작품은 「비」다. 16행 8연이다. 의미로 구분하면 두 연을 단위로 한 기승전결의 구조다. 돌에 그늘이 졌다. 소소리바람이 몰려든다. 모두 소나기가 쏟아질 조짐이다. 꼬리를 치날려 세우고 까칠하게 종종걸음을 걷는 것은 할미새다. 꼬리를 치들고 연신 흔들며 물가를 쏘다녀서 오죽하면 ‘할미새 꼬리 방정’이란 말까지 있다. 수척하던 흰 물살이 갈갈이 손가락을 편 것은 위쪽에서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난 증거다. 잠시 멎는 듯 소강상태를 보이던 빗줄기가 다시금 되살아나 붉은 나뭇잎을 후드득 밟으며 저편으로 건너간다. 상쾌하고 경쾌하다.
한시로 치면 7언 절구에 해당한다, 통사 구조를 조금 바꿔 한시의 방식으로 옮겨본다.
소소리바람 몰려 돌 그늘 서늘한데
종종 다리 꼬리 세운 산새의 걸음걸이.
여울 진 흰 물살은 갈갈이 손을 펴고
붉은 잎 밟고 가는 새삼 돋는 빗낯일세.
그대로 멋드러진 한 수의 한시다. 1ㆍ2연을 억탁으로 맞춘다면 ‘소소량풍석음한(蕭蕭凉風石陰寒)’쯤 될 테고, 7ㆍ8연은 ‘난답적엽신우각(亂踏赤葉新雨脚)’ 쯤 될 수 있을까?
정지용은 해방 직후 해방기념 조선문학가대회 때 자식을 대신 보내 왕유의 한시 한 수를 낭송하게 했다 한다. 선문답 같은 이 장면은 내게 무슨 상징 같이 읽힌다. 그는 「녹음애송시(綠陰愛誦詩)」에서 『시경』과 범성대ㆍ왕안석ㆍ사마광의 한시를 애송시로 들고, 끝에 가서 다시 한시 한 수를 들었다. 그 시는 이렇다.
榴花映葉未全開 | 석류꽃 잎에 어울려 봉오리 지고 보니 |
槐影沈沈雨勢來 | 느티나무 그늘 침침하니 비 올 듯도 하이. |
小院地偏人不到 | 집 적고 휘진 곳이라 오는 이도 없고야 |
滿庭鳥跡印蒼苔 | 삿삿히 밟은 새 발자욱 이끼마다 놓였고녀. |
번역도 그의 솜씨다. 위 「비」의 의경과 어지간히 닮아 있다. ‘비 올 듯도 하이’나 ‘삿삿히 밟는 새 발자국’은 특히 그렇다. 비가 오려는지 느티나무 그늘이 차다. 사실 1구는 “잎에 비친 석류꽃 아직 벌지 않았는데”의 뜻이다. ‘봉오리 지고 보니’는 오역이다. 석류꽃은 저 비를 맞고야 봉우리를 활짝 피어낼 태세다. 뜨락 이끼에 도장 찍는 새 발자욱은 깟칠한 산새의 종종 걸음을 연상시킨다. 금세라도 느티나무 그늘의 석류 잎을 소란스레 밟고 지나는 빗방울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정지용의 시에는 이렇듯 한시의 구문과 어법이 또렷이 살아 있다. 9연으로 된 「비로봉(毘盧峯)」도 끝 연 ‘바람에 아시우다’를 위에 붙이고 보면 7언절구의 구문을 벗어나지 않는다. 「옥류동(玉流洞)」은 7언율시의 호흡으로 읽어도 큰 차이가 없다. 「인동차(忍冬茶)」도 비록 5연이되, 시상이 놓인 자리는 의연 7언절구의 호흡이다. 가장 모던한 그의 시가 가장 한시와 닮았다. 재미있는 역설이다.
인용
1. 동서양의 수법 차이
2. 한시와 모더니즘①
3. 한시와 모더니즘②
4. 지훈과 목월의 거리①
5. 지훈과 목월의 거리②
6. 밤비와 아내 생각①
7. 밤비와 아내 생각②
8. 밤비와 아내 생각③
9. 낯선 마을의 가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