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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 5. 지훈과 목월의 거리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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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 5. 지훈과 목월의 거리②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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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지훈과 목월의 거리

 

 

한시도 지을 줄 알았고 예스러운 표현을 즐겨 쓴 조지훈의 시보다, 박목월의 시가 한시의 기맥에 더 닿아 있다. 사실 청록파 세 사람 중에 한시의 정서에 가장 밀착되어 있는 시인은 단연 박목월이다. 윤사월이나 산도화는 조촐한 왕유(王維) 풍의 5언절구에 가깝다.

 

 

흰 달빛

자하문(紫霞門)

 

달안개

물소리

 

대웅전(大雄殿)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범영루(泛影樓)

뜬 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소리

물소리

 

 

박목월의 불국사. 작품 전체는 흐는히 젖는데를 제외하고 모두 명사구만이다. 달빛 어린 자하문은 안개에 잠겨 물소리만 들린다. 대웅전 큰 보살상을 솔바람이 휘돌아 나간다. 범영루 뜬 그림자는 달빛에 젖고, 자하문엔 온통 바람 소리 물소리뿐이다. 시인은 다른 한 마디 보태지 않는다. 보여줄 따름이다. 그런데도 안개 낀 달밤, 불국사의 몽환적 분위기 속에서 바람소리 물소리가 풍경으로 되살아난다. 마법 같다.

 

원나라 때 시인 마치원(馬致遠)의 사() 추사(秋思)와 견줘 읽어보자.

 

枯藤老樹昏鴉 앙상한 등나무, 늙은 나무, 저물녘 까마귀
小橋流水人家 작은 다리, 흐르는 물, 사람 사는 집.
古道西風瘦馬 옛 길, 가을 바람, 비쩍 마른 말.
夕陽西下 석양은 지고
斷腸人在天涯 애끊는 사람은 하늘 가에.

 

역시 서술어는 내려오고뿐이다. 나머지는 토막토막 명사만 잇대었다. 황혼 무렵이다. 마른 등나무 늙은 나무 등걸에 까마귀가 내려앉아 운다. 작은 다리 아래로 물이 졸졸 흘러간다. 물길 따라 눈길 주니 멀리 인가가 보인다. 갈바람에 옛길엔 먼지만 날린다. 긴 여행에 피골이 상접한 말, 그 위에 앉아 길을 묻는 나그네. 해자 져서 그는 이제 묵어갈 곳을 찾는다. 고개 돌려 고향 쪽 하늘을 보면 애끓으며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아내 모습이 떠오른다. 풀면 이렇듯 진진한 사연인데 시인은 끝까지 말을 아껴 여백을 넓혔다.

 

두 작품 모두 서술어 없이 명사들 저희끼리 포개져 놓였다. 박목월의 시가 갖는 한시와의 천연성은 좀 더 깊이 있게 다뤄볼 필요가 있다.

 

 

마조흥(馬祖興), 소하척령도(疎荷鶺鴒圖)부분, 송나라.

연밥 줄기에 앉은 할미새다. 물가를 돌아다닐 때는 긴 꼬리가 쉴 새 없이 아래위로 방정을 떤다. 까칠한 다리로 종종걸음을 치면서.

 

 

 

 

인용

목차

한국한시사

1. 동서양의 수법 차이

2. 한시와 모더니즘

3. 한시와 모더니즘

4. 지훈과 목월의 거리

5. 지훈과 목월의 거리

6. 밤비와 아내 생각

7. 밤비와 아내 생각

8. 밤비와 아내 생각

9. 낯선 마을의 가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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