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문진보에게서 도망만 다니다
한문 과목을 임용고사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 하는 책들이 있다. 『대학(大學)』ㆍ『중용(中庸)』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와 같은 주희(朱熹)가 사서(四書)라는 카테고리로 묶은 유학(儒學)의 기본서는 매우 당연하고, 여기에 덧붙여 중국 문학의 정수들만 뽑아놓았다고 자랑하는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後集) 같은 경우는 중국에서보다 한국에서 더욱 오랜 기간 학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글짓기의 교범(敎範)’으로 여겨져 이어내려온 전통 때문에라도 필수서의 목록에 들어간다.
▲ 한문 공부 중 사서는 기본이기 때문에 누구나 본다.
봐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참 쉽지 않네
그런데 사서(四書)야 중국, 한국 작품을 막론하고 여기저기 인용되기 때문에 당연히 알아야 하고, 그만큼 내용을 안다면 글의 본의에 다가가기 쉽기 때문에 알아둬서 나쁠 게 없어 한문과 임용고시생 치고 읽지 않은 사람은 없지만,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後集)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아예 까놓고 말해서 ‘이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어보고 시험을 보러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지경’이라고 표현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만큼 여기에 실려 있는 문장들의 양이 어마무시하게 많고 고문(古文)이라고 써놓은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이소경(離騷經)』과 같은 매우 난해한 글부터 명문(銘文), 그리고 약간의 변려체(騈儷體) 적인 기풍을 지닌 글까지 다양한 문체의 글들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백을 하자면 예전에 임용시험을 준비하며 5번 시험을 봤을 때와 새롭게 임용시험에 도전하며 작년까지 2번 시험을 봤을 때는 여전히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後集)을 완독하지 않았을뿐더러, 읽은 글보다 읽지 않은 글이 많을 정도였다. 너무도 방대한 양에 엄두가 안 났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 외에도 공부할 게 늘 많았던 까닭에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늘 『고문진보(古文眞寶)』는 ‘언제든 한 번 정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하는데....’라는 부담만 느낀 채 감히 도전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첫 임용을 보러갈 때의 사진이다. 엄청 떨렸지만 그만큼 기대감도 컸다.
실패할 명분을 찾다
더욱이 여기에 더하여 심리적인 합리화까지 작용하다 보니 『고문진보(古文眞寶)』는 마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채처럼만 느껴졌다. 예전에 임용을 준비할 때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대학(大學)』ㆍ『중용(中庸)』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도 다 보고, 거기에 『고문진보(古文眞寶)』까지도 다 봤는데도 임용시험에 떨어지면 마음의 상처가 클 테니 다시 임용공부를 하긴 힘들겠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이 책들을 다 본다고 임용에 합격하는 건 아니다. 이 외에도 전혀 범위조차 정해져 있지 않은 한국의 수많은 산문들과 소설들, 그리고 한시도 있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저런 생각을 했으니, 몇 차례 낙방을 경험하며 얼마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는지를 여실히 볼 수 있다.
저런 생각을 전형적인 ‘성취동기가 낮은 사람의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성취동기가 높은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도전적인 과제를 찾아 하나씩 해결해나가며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한 걸음씩 꾸준히 자신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가지만, 성취동기가 낮은 사람은 ‘열심히 했음에도 성적이 안 좋으면 어쩌지?’라는 불안을 안은 채 과도한 목표를 설정하고 아예 안 할 빌미를 찾아 꾸준히 자포자기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그 당시엔 이미 여러 번 시험에서 떨어지며 자신감은 바닥을 기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안 해도 될 이유를 찾아, 떨어졌을 때 충분히 자위할 명분을 찾아 위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고문진보(古文眞寶)』는 정말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5번의 임용시험을 보면서 한 번도 1차에 붙어본 적도 없었다.
▲ 길고 길던 장마가 끝나고 무더운 여름이 왔다. 코로나19로 지금은 어딜 가든 마스크도 필수다.
누구에게나 시기는 도래한다
그런 방식으로 『고문진보(古文眞寶)』로부터 늘 도망다녔던 것인데, 그건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임용시험으로부터의 도피’라고 보아야 맞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임용시험은 마치 떨어지기 위해 보는 시험처럼 인식이 되었고, 그만큼 시험에 직면하여 나의 한문실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객관화시켜 나를 평가하고 한계치를 명확하게 할수록 자신이 더욱 더 보잘 것 없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반면에 최근에 공부를 하며 믿게 된 것이 있다. 그건 어떤 것이든 ‘자신에게 맞는 시기가 도래한다’는 생각이다. 한때는 망나니처럼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던 사람이, 어떤 계기나 변화로 시간이 도래하고 나면 급변하여 공부를 한다던가, 아니면 자신만의 여행을 떠난다던가 하는 180도 다른 삶을 사는 경우를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건 그 사람도 어쩔 수 없는 시기가 도래했기 때문이고 그 사람조차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시기와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그런 때가 왔을 때는 누구도 감히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일에 몰두하며 그 일을 해나가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청춘의 꿈으로 시작하여 비극의 해탈로 끝난다. 꿈과 해탈을 연결하는 외나무다리는 모험이다. 인생의 오직 모험이 있을 뿐이다. 끊임없는 도전이 없이 젊음은 유지되지 않는다.
-『사랑하지 말자』, 김용옥, 통나무, 2012, 144쪽
시기란 누구에게 왜 다가왔는지, 그리고 그 순간을 통해 내가 왜 그걸 하게 됐는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찌 보면 위의 인용문에서 나오듯이 ‘인생의 오직 모험이 있을 뿐’이라는 말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험을 통해 사람은 끊임없이 도전하게 되며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침내 그렇게 늘 도망 다니기 바쁘던 시간들을 보내고 세월이 돌고 돌아 다시 한문공부를 하는 이 시간으로 나를 밀어 넣었고 그렇게 한 지 2년 만에 마침 『고문진보(古文眞寶)』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하고 말았다. 무려 예전에 임용공부를 하던 때로부터 10년이나 더 흘러서 말이다. 이쯤되면 인생은 참 가혹하다고 해야 하려나, 참 다채로워서 좋다고 해야 하려나?
▲ 사랑이란 단어가 얼마나 많은 걸 옥죄게 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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