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의 왕소군에 관한 시를 비판하다
『소화시평』 권하 6번에 나온 왕소군은 한나라 궁궐에 있던 궁녀로 미모가 빼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외모가 빼어나다고 해서 임금의 눈에 쉬이 뜨일 리는 없었다. 궁궐 안에만 3000명의 궁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임금에 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원제(元帝)의 측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직책을 맡거나 그도 아니면 궁중 화공(畵工)의 눈에 들어야 한다. 왜 갑자기 화공이 등장하냐면 이 당시 원제는 궁녀를 일일이 볼 수 없었기에 화공들이 그린 초상화를 보고 합방할 궁녀들을 선택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화공이 예쁘게 그려주면 간택될 확률이 높은 건 자명한 이치였고, 이에 따라 궁녀들은 화공에게 여러 뇌물을 건네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왕소군은 화공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 않았고 그에 따라 그녀의 초상화는 더욱 더 추하게 그려지게 됐던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흉노족에선 배필로 삼을 만한 사람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한나라에 보낸다. 그러니 원제는 자신의 맘에 드는 사람을 제외하고서 나머지 중에 보낼 생각을 하게 된 것이고, 결국 화공이 그린 그림만 보고서 별로라고 여겼던 왕소군을 흉노족에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왕소군이 출발하는 날 그녀의 미모를 보고선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됐고, 그에 분개한 나머지 그림을 그려 바쳤던 화공인 모용연을 비롯한 모든 화공을 죽였다고 한다. 자신의 게으름이나 안목에 대해 돌아보려하지 않고 화공만을 탓하는 모습에서 원제의 그릇도 보이는 듯하다.
그렇게 흉노족의 왕비가 된 왕소군은 흉노에서 한나라에선 절대로 받지 못할 온갖 대우를 다 받았으며 그의 남편이 죽자 독약을 마시고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례를 치루고 잘 묻어줬는데 보통은 흰풀이 주로 남에도 왕소군의 무덤에선 푸른풀이 나서 그녀의 무덤을 청총(靑冢)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三千粉黛鎖金門 | 삼천 궁녀들이 금문에 갇혀 |
咫尺無因拜至尊 | 지척인데도 지존 뵐 길 전혀 없었으니, |
不是當年投異域 | 당시에 이역땅에 버려지지 않았다면, |
漢宮誰識有昭君 | 한나라 궁궐에서 누가 왕소군을 알았겠는가. |
世間恩愛元無定 | 세간에 은혜와 사랑은 원래 정해진 게 없어, |
未必氊城是異鄕 | 흉노의 궁궐이 이향이라고 기필할 수 없으니, |
何似深宮伴孤月 | 깊은 궁궐에서 외로운 달과 벗하며, |
一生難得近君王 | 한 평생 임금을 가까이 하기 어려운 것과 어찌 비슷하랴. |
이런 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미 여러 문인들은 왕소군에 대한 시들을 많이 지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왕소군을 이야기할 때 그녀의 슬픈 삶을 말하고 그녀의 기구한 운명에 동정하는 식의 시를 쓴다고 한다. 궁녀라는 신분으로 다른 나라에서 존경 받는 왕비로 살다가 죽고 나선 숱한 미담까지 만들어낸 사람이니 시인의 입장에선 좋은 소재였을 것이다.
이산해도 왕소군에 대한 시를 썼는데 일반적인 관점과는 완전히 관점을 달리했다. 오히려 왕소군은 한나라 왕실에 있는 것보다 흉노족의 왕비로 가는 게 여러모로 나았다는 관점을 담은 것이다. 한나라 왕실에 있어봤자 원제(元帝)를 지척에 두고서도 볼 기회조차 없어 그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살다가 갔을 텐데, 흉노족에선 오히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최고의 지위도 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그렇게 타국에서 왕소군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오히려 한나라 궁궐에까지 그녀의 이름이 알려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새옹지마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꺼리는 일이었기에 왕소군이 발탁되었다고 했을 땐 모두 ‘내가 선택되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다’라고 생각했겠지만, 결국 그녀가 흉노족 왕비가 됨으로 누리지 못할 것들을 누릴 수 있었고 만고에 남을 이름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산해는 아예 ‘흉노족의 궁궐인 전성(氊城) 또한 타향이라 생각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한나라 궁궐에서 외로움에 시름겨워하는 것보다 나았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에 대해 홍만종은 그런 시각은 왕안석의 시에서 차용해온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이런 내용의 시가 홍만종의 눈엔 좋아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산해의 시각을 깊이 있게 살펴보면 그 안엔 이미 조정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짙게 깔려 있는 비판적인 시각이기 때문이다. ‘한나라 조정은 인재도 놓칠 정도로, 대우도 안 해줄 정도로 별로이니 차라리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곳에서 행복하게 사는 게 낫다’는 메시지가 깔려 있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단순히 한나라 조정만을 타켓으로 하는 게 아니란 걸 알 수가 있다. 그건 그 당시의 조선의 조정으로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홍만종은 나대경과 주희가 왕안석의 시에 대해 평가한 내용을 그대로 끌고 온다. 그래서 왕안석의 시야말로 근본을 어그러뜨리고 지켜야 할 기본을 망각한 시라고 혹평을 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들을 통해 왕안석의 시를 차용한 이산해의 시도 이런 혹평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내용을 통해 홍만종이 생각하는 시란 무언지 두 가지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첫째는 조정을 비판하는 시는 되도록 쓰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의 생각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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