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권력
Cultural Power
권력에는 공식적인 것과 비공식적인 것이 있다. 공식적인 권력은 법을 토대로 행사되는 정치권력과 공권력이다. 이 권력은 의미나 용도가 명백하다. 그러나 비공식적 권력은 정확히 정의되지 않고 행사되는 방식도 모호하다. 대표적인 예는 신분에서 비롯되는 권력이다. 오늘날은 신분사회가 아니지만 비공식적인 신분은 엄연히 존재한다. 투표할 때는 누구나 1인 1표를 행사한다 해도 평범한 시민의 발언이 재벌그룹 회장의 발언과 같은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비공식적 권력 중에서도 가장 비공식적인 것은 신분이 아니라 문화에서 나온다. 바로 문화권력이다. 문화는 삶의 양식을 반영하므로 문화권력의 기반은 무척 다양하다. 지식. 정보, 미디어처럼 가시적인 게 있는가 하면 연고(緣故)나 명성(名聲)처럼 은밀하게 작용하는 것도 있다.
가시적인 문화권력자는 이른바 ‘전문가’라는 집단이다. 교수, 의사, 판사 등 사회의 엘리트 직업에 속한 이들은 자신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비공식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문제는 이 권력이 공식적으로 허용된 범위를 넘어서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점이다.
분명히 심장만을 다루는 전문의임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심장과 무관한 환자의 버릇과 기호까지 간섭하고 충고하며, 환자 역시 그 간섭과 충고를 받아들인다【물론 의사의 행위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어쨌든 의사가 윤리 교사는 아니다】. 법정에서 판사는 범죄라고 추정되는 행위만을 재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피의자에게 생활양식에 관한 부분까지 훈계하며, 피의자도 대개 그 훈계를 받아들인다. TV 뉴스의 앵커는 뉴스를 전달하는 기능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사회 전반에 관한 전문가인 것처럼 처신하며,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그에게 그런 역할을 주문하고 의지한다. 의사와 판사는 지식과 정보가 권력을 낳는 경우이고, TV 앵커는 미디어가 권력을 낳는 경우다.
은밀하게 작용하는 문화권력은 이보다 더 일상적이다. 사회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는 인물을 알고 지낸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문화권력자가 될 수 있다. 흔히 인맥(人脈), 학맥(學脈), 지연(地緣) 등으로 표현되는 연고의 권력이 그런 예다. 청와대 비서관이 사돈의 팔촌이라는 이유로 파출소에서 큰소리를 친다든가, 재벌그룹 회장이 고등학교 동문이라는 이유로 하청을 따낸다든가, 심지어 감방에서 큰 주먹과 함께 지냈다는 이유로 나이트클럽의 영업부장이 되는 게 그런 권력행사다.
유명 작가나 연예인은 명성에서 나오는 문화권력을 향유한다. 이들 역시 자신의 직업 분야를 넘어서는 전문지식을 가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방면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청소년 문제의 전문가가 아닌데도 베스트셀러 소설을 썼다고 해서 미디어의 아동 학대 프로그램에 나와 발언하는 작가, 인기를 끈 영화의 주인공일 뿐인데도 시사적인 현안에 관해 깊이 있는 견해를 가진 것처럼 착각하는 배우가 그런 예다.
문화권력은 비공식적이기 때문에 문제시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욱 위험한 측면이 있다. 정치권력이나 공권력 같은 공식적 권력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게 마련인데, 문화권력자는 권력을 행사하기만 할 뿐 책임은 지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넷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권력의 작용은 뚜렷하지만 권력의 주체가 은폐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문화권력의 위험성은 더욱 크다【일종의 여론으로 간주되는 ‘댓글’도 익명성을 이용한 문화권력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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