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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어 사전 - 익명성(Anonymity) 본문

어휘놀이터/개념어사전

개념어 사전 - 익명성(Anonymity)

건방진방랑자 2021. 12. 1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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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성

Anonymity

 

 

실이 끊어진 연은 자유를 얻지만 동시에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다. 오늘 점심으로 뭘 먹을까를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내 마음이지만 때로는 차라리 내 의지와 상관없이 메뉴가 늘 고정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다. 자유는 선택인데 선택은 늘 부담스럽다. 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의 그늘을 떠나 사회에 진출하게 되면 해방감과 동시에 이제부터 모든 일을 홀로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초창기에 이중의 자유토지로부터의 자유와 신분상의 자유를 얻은 농민들의 심정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은 법적인 자유를 얻고 농노의 신분에서 풀려났으나 그 대신 생계의 터전이 된 토지를 빼앗겼다. 그들의 무거운 발걸음이 향하는 도시에는 임금노동자로서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자본가도 그들에게 노동력을 팔라고 강요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어떤 자본가에게는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농촌 공동체와 달리 도시는 익명성의 세계다.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

중세 말기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자치도시에서 유행한 이 말은 도시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나타내는 동시에 도시에는 농촌처럼 지연이나 혈연 같은 비빌 언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시에서는 과거에 내가 어느 집 농노였는지 머슴이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익명성은 근대 도시의 출범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신분의 관념이 완전히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는 익명성이 더욱 광범위해지고 대중화된다. 분업이 세분화된 탓에 개인은 사회 내 각종 조직의 톱니바퀴와 같은 역할을 맡고, 미디어가 발달한 덕분에 모든 사회 구성원은 같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이로 인해 개인들 간에 외견상의 차이가 없어지므로 익명성은 더욱 강화된다.

 

익명성이 결정적으로 부각된 것은 인터넷 시대에 이르러서다. 인터넷은 흔히 도로에 비유되듯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실체도 가지지 않고 오로지 정보 소통의 기능만 가진 순수한 매체다. 주인도 없고, 신분도 없고, 지배나 종속 관계도 없다. 이렇게 절대적인 자유의 공간이므로 인터넷에서는 누구나 완벽한 익명성을 누릴 수 있다.

 

익명성의 관점에서 보면 인터넷의 중요성은 지식과 정보를 얻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자신의 일상적이거나 사적인 문제를 남에게 드러낼 때, 여론의 반응을 미리 타진하려 할 때, 심지어 울적한 감정을 내키는 대로 발산하고자 할 때도 인터넷의 익명성은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놀지 않듯이 누구나 자신이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때 더욱 솔직한 의견을 개진하게 마련이다. 특히 다른 사람의 글에 익명으로 댓글을 달아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수 있다는 것은 인터넷 특유의 여론 형성 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자유가 해방감만을 주는 것은 아니듯이 익명성도 장점만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익명의 자유는 책임과 의무를 잊게 만든다. 남의 글에 어떤 내용의 댓글을 쓴다 해도 익명이기 때문에 자신의 글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인터넷은 주인이 없고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하므로 어떤 통제력도 작용하지 않는다. 대학(大學)에는 혼자 있을 때도 행동거지를 조심하라는 신독(愼獨)이라는 도덕이 나오지만, 사실 익명성의 보호를 받을 때는 대부분 평소보다 과감해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악의를 가진 사람이 익명성을 의도적으로 악용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익명성과 알코올은 적당히 누릴 줄 알아야 유용하다.

 

익명성의 더 큰 문제는 획일화를 초래하기 쉽다는 점이다. 일단 익명성의 외피를 두르면 모두가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다양한 견해가 나올 수 있다. 누구나 평등한 관계이고 불특정 다수의 일원이므로 자기 마음대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양한 견해들 중에서 특정한 견해가 압도적으로 우세할 경우 익명의 개인들은 대세에 동참하고 싶은 심리를 느끼게 된다. 그 순간 다양성의 원칙은 무너지고 오히려 익명성이라는 장치가 없을 때보다 더 가속적으로 획일화가 일어난다.

 

과거에 세계대전을 유발한 파시즘은 오늘날 국지적으로만 남아 있지만 미시적 파시즘은 눈에 보이지 않게 자라나고 있다. 마침 익명성은 미시적 파시즘이라는 세균이 자라나기에 아주 좋은 토양이다. 익명성을 배경으로 파시즘의 세균은 일상생활 속에 섬세하게 침투해 개인들을 사로잡는다. 파시즘에 감염된 자유로운 개인들은 스스로 자유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자유를 이용해 획일화를 강화시킨다. 마치 자유의 부담에 짓눌리면 스스로 또 다른 구속 - 이를테면 종교나 마약 - 을 만들어내는 심리와 같다. 그런 사람들은 익명성으로 자유를 누린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스스로를 노예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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