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는 누구인가?
1. 주체란 초자아를 받아들이면서부터 존재한다
어느 여성이 화장을 하려고 거울을 본다. 그리고 그 거울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립스틱을 바른다. 이것은 너무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모습이라 그다지 신기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는데, 거울 안에 비친 얼굴이 내 얼굴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없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는 거울에 비친 얼굴이 자신의 얼굴인지를 알게 되었을까? ‘거울 속의 모습=자신의 모습’인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거울 속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제3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으로 불가능한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적으로 거울 안의 내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이 결코 자리잡을 수 없는 그 제3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역설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지만 상상적으로는 그렇게 되는 이 제3의 자리는 상상된 자리(= 믿음의 자리)라고 부를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 제3의 자리를 바로 초자아(superego)의 자리라고 부른다.
이 초자아의 자리는 우리가 공동체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내면화한 규칙의 자리다. 이 내면화된 규칙을 통해서만 나는 나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들로 분열되어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내면화된 규칙으로서의 초자아, 이 규칙을 적용하는 나, 그리고 이 규칙의 적용 대상인 나, 나는 최소한 이렇게 세 가지 차원의 나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장을 하는 여성은 아름다움의 내면화된 기준인 초자아, 화장을 바르는 나, 화장을 당하는 나로 분열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화장하는 여성의 초자아가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이 여성이 결코 화장할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화장을 한다는 것은 아름답지 않은 얼굴을 아름다운 얼굴로 변화시키는 행동인데, 위의 여성의 경우에는 아름다움의 기준이나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거울을 바라보는 그 여성의 시선은 결코 그녀 자신의 시선이 아니라 제3자의 시선, 즉 내 안에 내면화된 공동체의 미적 규칙이라는 시선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내면화된 공동체의 시선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화장한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화장이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아름다움과 추함[美醜]에만 적용되는 것일까? 그것은 선함과 악함[善惡]이나 참과 거짓[眞僞]에도 모두 통용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아름다움을 탐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며, 진리를 구하려는 주체는 누구인가? 나 자신인가? 아니면 공동체의 규칙인가?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오히려 잘못 제기되어 있다. 왜냐하면 나라는 주체는 결국 최소한 세 가지 차원에서의 분열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차원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제거된다면 나는 나로서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는 주체란 공동체의 규칙을 초자아로 받아들이면서부터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결국 주체란 본질적으로 분열되어 있어 주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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