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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Ⅱ. 한계가 없는 앎과 한계가 있는 삶 - 2. 나는 누구인가?, 엄마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최초의 초자아 본문

고전/장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Ⅱ. 한계가 없는 앎과 한계가 있는 삶 - 2. 나는 누구인가?, 엄마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최초의 초자아

건방진방랑자 2021. 7. 2.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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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엄마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최초의 초자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의 규칙을 초자아로 내면화하게 되었을까?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쉽게 그것이 우리에게 가해진 공동체의 폭력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히려 우리는 주체로서 탄생하기 위해서 공동체적 규칙을 기꺼이 수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우리는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하기 위해서 공동체의 규칙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선악의 규칙을 내면화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과연 공동체 속에서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초자아를 기존의 공동체 속에서 안정적으로 살기 위한 인간이란 동물의 자기 배려라고 이해해야 한다.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가 아니면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초자아를 공동체의 폭력이라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이란 동물의 생존전략의 일환으로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더 타인들의 애정과 관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라깡(J. Lacan)에 따르면 갓난아이 때부터 우리는 타자가 원하는 대상, 즉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고자 한다. 우리에게 최초의 타자는 물론 어머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머니의 관심과 애정이 없다면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 어머니가 구체적으로 나를 낳아준 어머니일 이유는 전혀 없다. 단지 아직 걷지도 못하고 먹이를 스스로 구하지도 못하는 나를 보살펴주고 돌봐줄 수 있는 그 누구라도 이 어머니의 자리에 들어올 수 있다. 어쨌든 타자의 관심과 애정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그 타자를 지속적으로 유혹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을 타자가 사랑하는 대상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래야 최초의 타자인 그 어머니는 나를 계속 사랑할 것이고 따라서 내게 안정과 평화를 계속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최초의 타자, 즉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갓난아기는 전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만약 아이가 울 때마다 안아주면 아이는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 슬프게 우는 자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 만약 아이가 웃을 때마다 안아주면 아이는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 밝게 웃는 자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이는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상상한다. 그리고 이렇게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라고 상상된 것이 그 아이에게는 최초의 초자아로 등장하게 된다. 이 경우 아이의 초자아는 어머니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이라는 판단의 기준이 된다. 어쨌든 이렇게 되면서 아이는 주체로 만들어지게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주체란 기본적으로 분열된 존재다. 달리 말하면 주체는 초자아에 입각해서 자신을 초자아에 맞게 가꾸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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