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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Ⅱ. 한계가 없는 앎과 한계가 있는 삶 - 3. 공동체에서의 삶, ‘나는 이런 사람이다’란 자의식이 확고해지는 두 가지 상황 본문

고전/장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Ⅱ. 한계가 없는 앎과 한계가 있는 삶 - 3. 공동체에서의 삶, ‘나는 이런 사람이다’란 자의식이 확고해지는 두 가지 상황

건방진방랑자 2021. 7. 2.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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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이런 사람이다란 자의식이 확고해지는 두 가지 상황

 

 

장자의 탁월한 점은 충효라는 유가적 이념이 비록 꿈과 같이 근거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특정 공동체에서는 현실적인 물리력을 갖는다는 것을 그가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데 있다. 충효가 삶의 규칙인 공동체에서 충효를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공동체의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고 심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만약 그 공동체의 규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공동체로 떠나야 한다. 그러나 새로 도착한 공동체도 그 나름대로의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공동체를 완전히 떠날 수는 없는 존재다.

 

그러나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있지 않을까? 산 속에서 혼자 사는 방법을 우리는 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산 속에서도 다른 삶의 규칙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산 속에서도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의 법칙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달생(達生)편에 실려 있는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자.

 

 

전개지(田開之)가 주()나라 위공(威公)을 보자 위공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축신(祝腎)은 양생(養生)을 배웠다 합니다. 선생께선 축신과 함께 배웠다는데 어떤 얘기를 들으셨는지요?”

田開之見周威公, 威公曰: “吾聞祝腎學生, 吾子與祝腎游, 亦何聞焉?”

 

전개지가 말하였다. “저는 비를 들고서 뜰 앞에서 시중을 들었을 뿐이니 선생님으로부터 무엇을 들었겠습니까?”

田開之曰: “開之操拔篲以侍門庭, 亦何聞於夫子!”

 

위공이 말하였다. “선생은 너무 겸손하십니다. 나는 듣고 싶소이다.”

威公曰: “田子無讓, 寡人願聞之.”

 

전개지가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양생을 잘하는 사람은 양을 치는 것과 같아서, 그 중 뒤지는 놈을 발견하여 채찍질을 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開之曰: “聞之夫子曰: ‘善養生者, 若牧羊然, 視其後者而鞭之.’”

 

위공이 말하였다. “무슨 뜻이지요?”

威公曰: “何謂也?”

 

전개지가 말하였다. “()나라에 선표(單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위 굴 속에 살면서 골짜기 물을 마시고 지냈습니다.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지 않고, 나이가 70이 되어도 어린아이 같은 얼굴빛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굶주린 호랑이를 만나 그 굶주린 호랑이에게 잡아먹혀 버렸습니다. 또 장의(張毅)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부잣집이건 가난한 집이건 어디에나 뛰어다니며 사귀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이 40세에 열병에 걸려 죽어 버렸습니다. 선표는 그의 속마음을 길렀으나 그의 외형을 호랑이가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장의는 그의 외부와의 사귐을 잘하였으나 그의 내부에서 병이 그를 공격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그 중 뒤지는 놈에게 채찍질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田開之曰: “魯有單豹者, 岩居而水飮, 不與民共利, 行年七十而猶有嬰兒之色, 不幸遇餓虎, 餓虎殺而食之. 有張毅者, 高門縣薄, 無不走也, 行年四十而有內熱之病以死. 豹養其內而虎食其外, 毅養其外而病攻其內. 此二子者, 皆不鞭其後者也.”

 

 

사실 이런 모든 한계 상황들은 인간이 유한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해서 외적인 것과 관계해야만 하는 유한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도 아니며, 자신의 실존을 위해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실체(substance)도 아니다. 중국 위진(魏晋) 시대에 현학(玄學)이라는 풍조가 있었다. 한마디로 이 풍조는 정치 및 사회와 관계하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며 시나 지으면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현학이 추구하였던 자유는 허구적이고 관념적인 것에 불과하다. 당시의 정취를 그린 중국화를 보면, 현학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꽃이 가득 핀 들판에 나가 뜻이 맞는 친구들과 화사한 얼굴로 술을 마시는 그림들이 많다. 그러나 자세히 그림을 살펴보면 그들에게 술과 안주를 날라다주는 하인들,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아주 작게나마 묘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이들은 호족들이었던 것이고, 이런 경제적인 풍족함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발제 원문의 후반부를 읽을 준비가 된 것 같다. 불가피하게 어떤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방법으로 장자는 다음과 같은 것을 권고하고 있다. 우리는 선을 행해도 이름이 날 정도로 하지 말고, 악을 행하더라도 벌 받을 정도로 행해서는 안 된다[爲善無近名, 爲惡無近刑]’. 선한 사람으로 유명해지거나 악한 사람으로 벌을 받아 유명해지게 되면, 우리는 자신이 지금 속한 공동체의 규칙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된다. 왜냐하면 유명해지게 되면, 우리의 운신의 폭은 그만큼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명해지게 되면 우리가 그만큼 부자유스럽게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마련이다. 선한 사람 혹은 능력 있는 사람으로 유명해지면 우리는 자신이 마치 주체적으로 선을 실천하는 인격자나 혹은 본질적으로 천재인 줄로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이런 나는 공동체의 규칙을 자신의 규칙인 양 잘 따르는 사람, 혹은 공동체가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 우리가 악한 행위로 공동체의 처벌을 받게 되면, 우리는 전과자라는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살거나 아니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살게 된다. 결국 좋은 방향으로나 나쁜 방향으로나 유명해지게 되면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야라는 자의식을 확고하게 가지게 될 것이고, 그만큼 우리는 부자유스럽게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장자의 진단이다.

 

 

 

 

인용

목차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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