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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시사, 서설(序說) - 3. 작품의 평가 문제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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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시사, 서설(序說) - 3. 작품의 평가 문제③

건방진방랑자 2021. 12. 19.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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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李奎報)백운소설(白雲小說)은 수백 년 뒤 홍만종(洪萬宗)시화총림(詩話叢林)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것은 이규보(李奎報) 자신이 찬술(撰述)한 것인지 혹은 후대인에 의하여 편집된 것인지 확증을 잡아낼 수 없으나 이규보(李奎報)의 문집(文集)에 전하는 다른 글, 예를 들면 논시중미지약언(論詩中微旨略言)이나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등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규보(李奎報)의 것이라 하여 잘못될 것은 없다. 또는 이미 있었던 백운소설(白雲小說)이라는 잡록(雜錄)홍만종(洪萬宗)시화총림(詩話叢林)을 편찬할 때 시화만 따로 뽑아낸 것이라 해도 이규보(李奎報)의 것임에는 틀림없다.

 

백운소설(白雲小說)의 요체(要諦)는 의기론(意氣論)이다. ()에 대해서 2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엇을 나타내어야 할 것인가를 문제 삼은 것이 가장 높은 곳이다. 그래서 그는 ()는 의(, 意境)가 주()가 되므로 의경(意境)을 설정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꾸미는 것은 그 다음이다. 의경(意境)은 또한 회를 위주(爲主)로 하기 때문에 기()의 우열에 따라 의경(意境)의 심천(深淺)이 결정될 따름이다. 그러나 있는 천성(天性)에 근본한 것이어서 후천적으로 배워서 얻을 수는 없다.

夫詩以意爲主, 設意最難, 綴辭次之. 意亦以氣爲主, 由氣之優劣, 乃有深淺耳. 然氣本乎天, 不可學得.

 

 

()는 의경(意境)의 표현이며 그것은 외의 심천(深淺)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수식(修飾)과 같은 것은 후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의 시이의위주(詩以意爲主)’는 원시주의적인 시언지(詩言志)’를 다시 천명한 것이며 의역이기위주(意亦以氣爲主)’는 조비(曹丕)의 문기론(文氣論) 이후 개성주의 쪽으로 기울어진 표현론의 경향을 심화하여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그의 기론(氣論)이다. ()의 청탁(淸濁)은 아버지라도 자식에게 넘겨 줄 수 없다고 한 조비(曹丕)의 생각을 그는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不可學得] 표현하고 있으며 조비(曹丕)가 막연한 개념으로 써 보았던 문기(文氣)’를 그는 재기(才氣) () 개인(個人)의 개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시()는 의()가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함축성 있게 표현하는 것은 외의 권능(權能)에 속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는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백운소설(白雲小說)의 다른 곳에서 자신의 체험적인 사실을 통하여 이를 간명(簡明)하게 논증하고 있다.

 

그는 젊어서부터 구속받기를 싫어하여 육경(六經)과 자사(子史) 같은 글도 섭렵만 하였을 뿐 그 근원을 궁구(窮究)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옛 성현(聖賢)의 말에 익숙하지 못하고 또한 옛 시인의 체()를 모방하기 부끄러워 창졸간에 시를 읊조릴 때라도 의사가 고갈하여 써먹을 말이 없으면 반드시 새로운 말을 만든다고 하였으며 때문에 말이 생소하고 난삽한 것이 많아 남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 옛시인들은 뜻만 창조하고 말은 창조하지 않았지만, 자기는 뜻과 말을 함께 창조하고도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자만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규보(李奎報)는 자신의 천재(天才)를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신어(新語)를 만들고 신의(新意)를 창출(創出)한다고 한 것이다. 겉으로는 남의 것을 훔치거나 모방하기가 싫어서 부득이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고 있지만, 내면으로는 스스로 자기 시의 개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이러한 합리화를 기도한 것이다. 동파(東坡)를 근대(近代)의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추어 올리면서도 그는 끝내 동파(東坡)를 본받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동파(東坡)를 모방하면 동파(東坡)와 비슷해지거나 동파(東坡)와 꼭 같아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파시(東坡詩)일 뿐 자신의 시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

 

그가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에서,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백거이(白居易) 등이 일시(一時)에 나와 천고(千古)에 높이 이름을 남기고 있지만 이백(李白)두보(杜甫)ㆍ왕발(王勃)을 모방하지 않았으며 구양수(歐陽修)ㆍ매성유(梅聖兪)소식(蘇軾)이 일세(一世)에 이름을 빛내었지만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백거이(白居易)를 본뜨지 않고도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기서도 시()로써 일세(一世)에 이름을 떨치고 빛내려 한 그의 의지를 읽어 낼 수 있다. 동파시(東坡詩)로 대표되는 중국시를 수용함에 있어 풍골(風骨)과 의경(意境), 사어(辭語)와 용사(用事)의 기술에 이르기까지 그 예술적인 경계를 포괄적으로 배운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므로, 문언(文言)으로 중국시를 배운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사어(辭語)나 성률(聲律)과 같은 형식적인 기교에서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이규보(李奎報)는 일찍이 간파한 것이다. 당시의 시인과 묵객(墨客)들의 동파시(東坡詩)에 대한 일반적 관심이, 동파(東坡)의 시세계를 우리 것으로 극복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동파(東坡)를 한갓 시수업(詩修業)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보면 이규보(李奎報)의 의기론(意氣論)은 일단 시대사의 의미를 부여받아 마땅할 것이다. 이인로(李仁老)의 시학(詩學)이 점수돈오(漸修頓悟)의 점진적인 단련형 취향이라면 이규보(李奎報)의 그것은 천재(天才)로써 시()를 깨친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경지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용

목차

서사한시

한시미학

16~17세기 한시사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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