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金富軾, 1075 문종29~1151 의종5, 자 立之, 호 雷川)은 최충(崔沖)ㆍ이자연(李子淵)ㆍ김근(金覲) 등 최(崔)ㆍ이(李)ㆍ김(金) 삼대명문(三大名門)의 하나인 경주김씨(慶州金氏) 출신이다. 김근(金覲)의 아들로서 4형제가 모두 등제한 부필(富弼)ㆍ부일(富佾)ㆍ부의(富儀) 형제 가운데 셋째다. 정중부란(鄭仲夫亂)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김돈중(金敦中)은 그의 아들이며, 시(詩)로써 일대(一代)에 이름을 드날린 김군수(金君綏)는 손자다.
송사(宋使) 노윤적(路允迪)의 보좌관(補佐官)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김부식(金富軾)이 이자겸(李資謙)과 함께 당대의 인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을 보면 문무를 겸비한 정치가로서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몸이 부섬(富贍)하고 검은 얼굴에 눈이 부리부리하며 기괴낙이(奇魁樂易)하여 큰 그릇을 타고났다고 한다.
특히 김부식(金富軾)과 김부철(金富轍, 富儀의 初名)이 송(宋),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의 명자(名字)를 따서 그들의 이름으로 하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시사하는 것이 많다. 소식(蘇軾)과 김부식(金富軾)은 연대차(年代差)가 겨우 40년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식(蘇軾)이 그의 「논고려매서이해차자(論高麗買書利害箚子)」에서, 고려의 서적 청매(請買)에 대하여 이를 오해(五害)라 하여 허락하지 말라고 한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당시의 국교관계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였지만 오만무례(傲慢無禮)한 그 어구로 보아 동방인(東方人)으로서는 타매(唾罵)하지 않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식(富軾) 형제 가운데서도 특히 문장으로 이름을 울린 부식(富軾)ㆍ부철(富轍)이 이들을 사모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일이다. 이는 소씨(蘇氏)로 대표되는 송대(宋代) 문장의 전파속도가 그만큼 빨랐던 것을 알게 하는 증좌(證左)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종횡분방(縱橫奔放)한 그들의 문장에 부식(富軾) 형제가 심열성복(心悅誠服)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문선(文選)』 문(文)이 모범문장으로 행세하던 당시의 속상(俗尙)에서 김부식(金富軾) 개인의 문장 취향을 크게 자극했을 것은 물론이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의 문장을 예고하는 역사적인 사실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로써 보면 앞에서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의 「답인논청구문장원류(答人論靑丘文章源流)」에서 보인 바와 같이, 여초(麗初)에도 그대로 『문선(文選)』 문(文)이 통용되었지만 명신들의 장주(章奏)와 비문(碑文)에는 더러 양한(兩漢)의 기미가 있다고 한 것이 곧 질박(質朴)한 김부식(金富軾)의 문장을 두고 암시적으로 말한 것임을 확실하게 알게 해 준다. 김부식(金富軾)의 문장은 표전(表箋)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그러나 그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과시한 기사문(記事文)의 솜씨는 사필(史筆)로써 시범한 문장가의 권능임에 틀림없다.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이 그의 「온달전(溫達傳)」을 가리켜 여조제일(麗朝第一)의 걸작으로 평가한 것도 이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김부식(金富軾)의 시에 대해서도 조선초기의 서거정(徐居正)은 『동인시화(東人詩話)』 권상 4 ‘김부식(金富軾)과 정지상(鄭知常)은 시(詩)로써 일시에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金文烈富軾. 鄭諫議知常 以詩齊名一時]’고 하였으며, 성현(成俔)도 그의 『용재총화(傭齋叢話)』 1권 2번에서 ‘김부식(金富軾)은 풍부하나 화려하지 못하고 정지상(鄭知常)은 빛나지만 드날리지 못한다[金富軾能贍而不華 鄭知常能曄而不揚].’고 평가하여 두 사람을 함께 비기고 있지만, 그러나 김부식(金富軾)의 문(文)과 정지상(鄭知常)의 시(詩)가 함께 일세를 울렸다는 것이 적평(適評)이 될 것이다.
김부식(金富軾)의 시작중(詩作中)에서 시선집(詩選集)에 전하고 있는 것만 하여도 32편이나 되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 것은 「감로사차혜소운(甘露寺次惠素韻)」(五律)과 「등석(燈夕)」(七律)이다.
「감로사차혜소운(甘露寺次惠素韻)」를 보면 다음과 같다.
俗客不到處 登臨意思淸 | 속객(俗客)이 이르지 않는 곳, 올라보니 생각이 맑아지네. |
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 | 산형(山形)은 가을에 다시 좋고 강색(江色)은 밤에 더 밝다. |
白鳥孤飛盡 孤帆獨去輕 | 흰 새는 멀리 다 날아가고 외로운 배 홀로 가벼이 가네. |
自慚蝸角上 半世覓功名 | 좁디 좁은 이 세상에서 반평생 공명(功名) 찾던 일 부끄럽기만 하네. |
이 작품은 차운시(次韻詩)가 감내해야만 하는 구속을 극복하고 우선 군졸(窘拙)함이 없어 여유가 있어 좋다. 속객(俗客)의 발자국이 지나가지 않은 높은 것에 올랐다가 악착하게 환해(宦海)에서 살아온 반생을 돌이켜 보는 것으로 끝맺고 있는 결구(結句)의 처리도 돋보인다.
그러나 경련(頸聯)은 이백(李白)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의 ‘중조고비진 고운독거한(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에서 따온 것이 틀림없다. 특히 이백(李白)이 기구(起句)에서 ‘중조고비진(衆鳥高飛盡)’이라 한 것을 김부식(金富軾)은 이를 경련(頸聯)에서 차용(借用)하고 있어 단순한 경물(景物) 묘사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있으며, ‘고(孤)’, ‘독(獨)’, ‘경(輕)’도 겹치고 있어 전편의 균형이 여기서 깨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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