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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3. 기속시인의 낭만(신유한)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3. 기속시인의 낭만(신유한)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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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기속시인(紀俗詩人)의 낭만(浪漫)

 

 

조선후기에 이르러 새로운 조선시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여러 가지 방면에서 나타난다. 엄격한 관풍(觀風)의 의지로 풍속을 징험하고 세태를 반영하려는 시작(詩作)들이 나타나는가 하면 죽지사(竹枝詞) 또는 악부풍(樂府風)으로 변방의 풍속이나 민간의 서정을 사실적이면서 낭만적으로 그려내려는 노력들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유한(申維翰)일본죽지사(日本竹枝詞), 신광수(申光洙)관서악부(關西樂府), 홍양호(洪良浩)북새잡요(北塞雜謠), 김려(金鑢)사유악부(思牖樂府)등도 이에 속하는 것들이다.

 

신유한(申維翰, 1681 숙종7~1752 영조28, 周伯, 靑泉)은 한미한 가문출신서류(庶流)로 생각되기도 했음으로 평생을 말단에서 전전하며 가난하게 지냈다. 그러나 그는 1719년 제술관으로 통신사 홍치중(洪致中)을 따라 일본에 가서 이름을 떨치는 등 그의 문명(文名)과 시명(詩名)은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청천은 최성대(崔成大)이병연(李秉淵)ㆍ남태량(南泰良) 등과 교유하면서 많은 시들을 주고받고 있는데, 특히 10년 연하인 최성대(崔成大)와는 부부 같다는 평을 들을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청천의 작품으로 유명한 것은 그가 일본에 갔을 때의 일을 기록한 해사동유록(海槎東遊錄)일본죽지사(日本竹枝詞)를 꼽을 수 있다. 그의 산문은 대체로 명쾌(明快)를 결여하고 있어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지 못하지만 그의 해사동유록(海槎東遊錄)50여 편의 시와 일본죽지사(日本竹枝詞)는 이국(異國)의 물색(物色)을 자세하게 관찰하여 흥미롭게 묘사한 기행시(紀行詩)이다. 청천은 이들 시에서 여속(女俗), 남녀애정(男女愛情) 등을 특히 많이 다루어 이국적이면서 낭만적인 시정의 세계를 이룩하고 있다. 그러한 것의 대표작으로 일본죽지사(日本竹枝詞)를 들 수 있다.

 

黃金船舶紫綾帷 황금 선박 붉은 휘장은
大坂繁華第一奇 번화한 오사카 제일 장관이라.
二十四橋紅橘裏 이십사교 붉은 귤숲 속에
家家珠箔鎖名姬 집집마다 구슬발에 계집애들 가두었네.

 

 

한편 청천 신유한(申維翰)최성대(崔成大)산유화녀가(山有花女歌)를 보고 감탄하여 산유화곡(山有花曲)을 지었다. 이 작품은 구곡(九曲)으로 나뉘어져 있는 140행의 장편시이다.

 

숙종(肅宗) 28(1702)에 선산(善山) 농민의 딸 향랑이 20세의 나이로 정절을 지키기 위해 전래하던 민요인 메나리곡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가사를 붙여 노래 부른 뒤 낙동강에 투신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당시 문인들에게 커다란 문학적 반향을 불러일으켜, 많은 전()과 시()가 지어졌다. 청천은 다른 문인들의 시가 향랑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꽃과 여인의 한을 비유로써 깊이 있게 표현하고 있다. 청천이 시의 앞에 붙인 글에서 한() 악부(樂府) 구장(九章) 비무(菲蕪)에 자신의 시를 비기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이 산유화곡은 우리의 민요적 정서를 악부체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산유화곡중 제2수를 들어보기로 한다.

 

歷歷山有荍 離離阪有枸 산에는 금규화 역력하고 언덕엔 구기자 드리웠네.
祁祁析薪女 澹澹愁思婦 여기저기 나물캐는 아가씨 아련히 시름하는 아낙네.
交交集卷阿 濯濯褰兩袖 옹기종기 언덕에 모여 훌훌 두 소매 걷었네.
不知羅縠裡 鴛鴦爲誰有 비단무늬 속은 알지 못하지만 원앙침 누구를 위해 있나?
眄睞物亦好 棄捐人已醜 이리저리 보면 물건도 좋은데 버리면 남들도 더럽게 여기네.
長歎舍此去 勿復衣文繡 길게 탄식하며 버리고 가니 다시는 수놓은 옷 입지 말지니라.
君但視草木 逝者同衰朽 그대 저 초목을 보라, 죽어서 썩는 건 마찬가지라네.

 

이밖에도 널리 회자된 시로 애국적인 정열과 기개가 넘치는 제촉석루(題矗石樓)를 꼽을 수 있다. 청천은 노년에50대 후반부터 70대를 전후해서 이르러서는 도교적, 불교적 색채를 띤 작품을 많이 썼는데, 이는 청천이 만년에 가야산에 들어가 불경을 공부하고 불승과 교유했기 때문이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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