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후사가(後四家)와 죽지사(竹枝詞)
천기(天機)ㆍ진기(眞機)ㆍ본색(本色)ㆍ진색(眞色) 등을 강조하면서 진솔(眞率)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해야 한다고 주장한 삼연(三淵)의 문학론은, 홍세태(洪世泰)를 필두(筆頭)로 한 위항시인(委巷詩人)들과 정선(鄭敾)ㆍ이병연(李秉淵)ㆍ조영석(趙榮祏) 등의 백악사단(白岳詞壇)으로 이어지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왕성한 활동을 벌인 연암(燕巖)과 후사가(後四家)는 국내적으로는 삼연(三淵)의 문학론을 잇고 있다.
백악산(白岳山) 밑을 중심거점으로 동호인 그룹을 형성했던 동국진경산수화(東國眞景山水畵)의 거장 정선(鄭敾), 동국진경풍속화(東國眞景風俗畵)의 대가 조영석(趙榮祏), 동국진체(東國眞體)로 유명한 이병연(李秉淵) 등이 똑같이 백악산 아래에 위치해 있던 노론계(老論系)의 김수항가(金壽恒家)와 잦은 교유를 통해 학문과 사상의 원천을 제공받았으므로, 이들은 자연히 김창협(金昌協)ㆍ김창흡(金昌翕) 형제의 학맥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문학(文學)과 회화(繪畵)를 동시에 추구했던 이들 백악사단(白岳詞壇)은 크게 문인(文人)과 화가(畵家)의 사승(師承), 교우관계(交友關係) 및 중국(中國)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수용을 계기로 시서화(詩書畵) 일치(一致)를 추구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동국진경(東國眞景) 즉 조선풍(朝鮮風)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시서화(詩書畵) 일치(一致)를 추구했던 백악사단(白岳詞壇)의 활동은 이덕무(李德懋)의 『청비록(淸脾錄)』과 유득공(柳得恭)이 조영석(趙榮祏)의 「동국풍속도(東國風俗圖)」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지금의 파고다 공원인 백탑(白塔)을 지연(地緣)으로 동호인 그룹을 형성했던 박지원(朴趾源)ㆍ이덕무(李德懋)ㆍ二柳(柳得恭ㆍ柳琴)ㆍ박제가(朴齊家)ㆍ이서구(李書九) 등의 백탑시파(白塔詩派)로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연암(燕巖)과 후사가(後四家)는 한편으로는 국외의 문인들에게서도 심대(深大)한 영향을 받았다. 백악사단이 국내적으로는 김창협(金昌協)ㆍ김창흡(金昌翕) 형제의 학맥을 이으면서 중국 남종화풍(南宗畵風)에 자극받았듯이, 연암(燕巖)과 후사가 역시 국내적으로는 김창협(金昌協)ㆍ김창흡(金昌翕) 형제의 맥을 이으면서도 중국의 문인들에게서 일정한 영향을 받아들이고 있다. 무엇보다 후사가는 연행(燕行)을 통해 청대문물(淸代文物)을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으므로 사상적으로는 북학파(北學派)로 일컬어지기도 하거니와, 문학적으로는 명대의 창신파(創新派)인 서위(徐渭)와 공안파(公安派)ㆍ장릉파(章陵派) 제가(諸家)의 시설(詩說), 그리고 명말청초(明末淸初)의 고염무(顧炎武)ㆍ전겸익(錢謙益)ㆍ왕사정(王士禎)의 시학(詩學)을 포괄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으며, 특히 왕사정의 신운설(神韻說)은 이덕무(李德懋)ㆍ박제가(朴齊家)ㆍ유득공(柳得恭)ㆍ이서구(李書九) 등 후사가에게 직접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유득공(柳得恭)의 숙부인 유금(柳琴)이 청(淸)에 가지고 간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는 이른바 신운풍(神韻風)의 시를 추구한 시편(詩篇)들이 많았고, 청(淸)의 걸출한 문인이었던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廷筠)의 평어(評語) 역시 왕사정의 신운설에 합치되는 ‘묘(妙)’, ‘청(淸)’, ‘고담(古淡)’ 등이 많다.
연암(燕巖)과 후사가(後四家)의 시세계는 그 창작정신에서 보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이상으로 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정작 그들이 실천한 것은 ‘창신(創新)’에 기울고 있다.
이들이 이처럼 특징적인 시세계를 형성하게 된 데는 그 설명 가능한 이유들이 여러 가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사실은 이들에게 신분상의 제약과 학풍의 특이성이 배후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는 서얼출신의 신분적 제약 때문에 ‘한품서용(限品敍用)’ 의 규제에 걸려 청요직(淸要職)으로의 진출이 어려웠고, 농공상업(農工商業)으로 영달할 길도 차단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당대의 사대부 지식인들의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청(淸)의 사조(思潮)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도 보다 적극적일 수 있었는가 하면, 일본(日本)ㆍ안남(安南)ㆍ유구(琉球) 등 외국문학의 동향에도 관심을 표명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실제 시창작을 실천할 때에는 정통 사대부들로서는 바라볼 수 없는 민간의 물태인정(物態人情)을 사실적, 회화적으로 묘사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으며, 이것을 담고 있는 것이 죽지사(竹枝詞)다. 이들은 사대부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도 있었으며 사대부들로서는 듣지도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사대부들에게는 보아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지만, 이들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죽지사(竹枝詞)와 같은 노래틀을 빌려 세태(世態)와 인정(人情), 삶의 구석구석까지 두루 찾아내어 시(詩)로써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이들에게는 서얼(庶孼)이라는 생득적(生得的) 지위가 그들의 사회적 진출을 제한하는 질곡이 되기도 하지만, 반면에 이들은 양반 사대부들과는 스스로 구별되는 사회적 규범과 생활권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문학의 향유방식에 있어서도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 시세계의 또 다른 특징은 이들이 학문예술의 세계에 탐닉하게 되면서, 시가 가진 예술적 가치를 매우 중시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시적 정서가 주정적(主情的) 시어(詩語)를 통해 표면에 노출되기를 꺼려한 대신, 시의 예술적 기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므로 시어의 자과 단련(鍛鍊), 제재(題材)의 선택과 운용, 의상(意象)의 표출방식에 있어 인공적(人工的) 기교(技巧)를 중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매우 맑지만 과하게 깨끗하다[太淸而過潔]’이라 평가되기도 하였지만, 당송시풍(唐宋詩風)을 의방(擬倣)하려던 당시의 시단에서는 ‘신체(新體)’, ‘신조(新調)’, ‘별재시풍(別裁詩風)’, 혹은 ‘검서체(檢書體)’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박지원(朴趾源)과 이서구(李書九)는 현벌가(懸閥家) 태생(胎生)이면서도 당대의 사류(士類)와는 남다른 길을 걸었다. 박지원(朴趾源)은 반남박씨(潘南朴氏)의 명문 출생이면서도 과거를 통한 관료진출을 미루고 홍대용(洪大容)과 사귀면서 북학론(北學論)을 창도(倡導)하였다. 반골적(反骨的)ㆍ현실비판적 기질이 강했던 그는 한때 노론벽파(老論僻派)의 몰락으로 당대 실력자인 홍국영(洪國榮)의 미움을 사서 황해도(黃海道)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피세(避世)하기도 하였거니와, 44세에 삼종형인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연행(燕行)을 다녀와서 유명한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저술했다. 따라서 연암(燕巖)이 후사가(後四家)와 내밀(內密)한 관계를 맺게 된 이유는 그의 진보적 사상이 서얼출신인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의 그것과 상통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그들의 지연(地緣)이 백탑(白塔)을 근거지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이서구(李書九)는 증령의정(贈領議政) 이원(李遠)의 자제로 사가(四家) 가운데 유일한 적출(嫡出)이었지만 20대에는 관리로서의 영달보다는 학문과 시수업에 매진하였다. 그는 박지원(朴趾源)과 홍대용(洪大容)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와 교유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과 백탑을 근거지로 한 시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가 중 가장 어렸다는 사실로 미루어 사가의 주도적 인물은 아니었다고 보이며, 아울러 명문거족의 자제로서 타삼가(他三家)와는 다른 시세계를 보였다. 즉 이덕무(李德懋)가 진경산수도(眞景山水圖)의 시적변용을 꾀하여 당대의 풍속도를 즐겨 취재(取材)하고 회화성 짙은 시작을 남겼으며, 유득공(柳得恭)이 시의 소재를 역사 쪽으로 확대하여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였고, 박제가(朴齊家)가 사회비판이나 북학사상을 핍진하게 시에 담아내었던 것과는 달리 이서구(李書九)는 전통적인 자연시를 신운설(神韻說)의 입장에서 답습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 '백탑시파'는 백탑 서쪽이 이들의 주무대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석치 등이 이 모임을 주도하며 '북학사상'을 폈다.
인용
'책 > 한시(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6. 후사가와 죽지사(이덕무) (0) | 2021.12.21 |
---|---|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6. 후사가와 죽지사(박지원) (0) | 2021.12.21 |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5. 경세가의 시편(김매순) (0) | 2021.12.21 |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5. 경세가의 시편(홍석주) (0) | 2021.12.21 |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5. 경세가의 시편(이가환) (0) | 2021.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