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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6. 후사가와 죽지사(이서구)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6. 후사가와 죽지사(이서구)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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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서구(李書九, 1754 영조30~1825 순조25, 洛瑞, 惕齋薑山席帽山人) 역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의 인연으로 후세에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와 더불어 후사가(後四家)로 일컬어지고 있지만, 그가 속한 사회적 신분이나 그가 향유한 문학세계는 이들과 함께 묶여지지 않는다.

 

그는 본관이 전주이며, 중종(中宗)7자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宣祖)12자인 인흥군(仁興君)의 후손이다. 나머지 삼가(三家)와 달리 적출(嫡出)인 그는 20대에 백탑(白塔)을 중심으로 시활동을 벌였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관료로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몇 차례의 유배 생활을 감수해야만 했던 그는 사환(仕宦) 중에도 늘 은거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저술로는 척재집(惕齋集)강산초집(薑山初集)이 대표적이지만, 이외에도 척재자술(惕齋自述), 척재병거록(惕齋幷居錄), 탑좌종정지(塔左從政志)등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는 특별한 사승(師承)관계 없이 홀로 양덕방(陽德坊) 고가(古家)에 있는 만고장(萬古藏)의 가장서(家藏書)를 읽었다고 한다. 다만 그가 관례(冠禮)를 올릴 때 빈객(賓客)으로 초빙된 사람이 김수항(金壽恒)5자인 창집(昌緝)의 아들 김용겸(金用謙)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가 일찌기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형제의 영향을 수용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20대를 전후하여 박지원(朴趾源)홍대용(洪大容)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 등과 교유하였고 환로에 나서면서부터는 심환지(沈煥之)ㆍ서용보(徐龍輔) 등과 사귀었다. 박지원(朴趾源)의 둘째 아들 박종채(朴宗采)과정록(過庭錄)125에 의하면, 그는 가장 어리면서도 재기가 뛰어나고 식견이 많아서 연암(燕巖)이 아꼈다고 한다[薑山, 年最少, 而潁拔出群, 沈靜有識量, 先君愛重之].

 

그러나 그가 타삼가(他三家)와 함께 20대의 왕성한 시절에 이우보인(以友輔仁)의 시작활동(詩作活動)을 펼쳤다고 하더라도 그의 시작(詩作)에 있어서 타삼가(他三家)의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시도와는 달리 16세기 사림에 비근한 강호자연의 시와 은거시를 많이 남겼다.

 

그의 시세계는 백탑동인시기와 그후 사환 및 은둔의 시기로 대별될 수 있지만, 1778년 경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강산초집(薑山初集)에는 560여수의 시편이 전하는 반면, 그의 시문을 총집한 척재집(惕齋集)에는 오히려 그보다 적은 544수의 시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20대의 젊은 시절에 시작(詩作)의 절정을 이루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서구(李書九)의 시세계에 대한 평으로는 그의 영직(榮職)과 성망(聲望)에 걸맞게 다채롭다. 사가시집(四家詩集)薑山諸作能工 …… 元本陶謝而時泛觴於儲孟之間.”이라든가, 청비록(淸脾錄)薑山爲詩, 心摹力追, 登堂入室 …… 爲東國魚洋.”이라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로써 보면 그가 왕사정(王士禎) 및 도잠(陶潛)ㆍ사령운(謝靈雲)ㆍ저광희(儲光羲)ㆍ맹교(孟郊) 등 중국시인에게서 영향받았음을 간취할 수 있으며, 그의 시가 무척 공교로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서구(李書九) 역시 우리나라 전래의 시가에도 관심이 있었던 바, 그가 이보온(李普溫)에게 탄핵당한 뒤 영평(永平)에 은거할 시기에 내놓은 호산음고(湖山吟稿)에 서()를 쓴 유득공(柳得恭)의 다음 기록, “出其所著, 湖山吟稿, 一卷以示之, 率皆漁歌樵唱.”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에 의하면 그 역시 우리의 풍속과 민간 시가에 관심을 보인 것이 사실로 드러난다. 실제로 그의 시편들 중에 수표교절구(水標橋絶句), 구마(驅馬), 누원도중(樓院道中), 우부이금언(偶賦二禽言)등은 이를 입증해주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한마디로 그의 시작(詩作) 수법은 객관적 경물을 묘사하는 데 승하였다.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이서구(李書九)의 시세계가 왕유(王維)의 자연시와 한정(閑情)에 닮아가는 모습은 그가 경중한(景中閑)과 은거(隱居)를 갈구하였던 데서 비롯한 것이라 하겠다.

 

후대의 시선집에 전하는 시편으로는 대동시선효기관창(曉起觀漲), 자백운계부지서강소와송음(自白雲溪復至西岡少臥松陰), 촌모(村暮)(이상 五絶) 산행(山行)(), 조종옥동소문입계상회인(早從屋東小門立溪上懷人), 추일전원(秋日田園), 수동도중(水洞道中)」 「한야증이산인덕화(寒夜贈李山人德和), 망압구정(望鴨鷗亭)(이상 七律) 등이 뽑혀 있다. 이 중에서 자백운계부지서강소와송음(自白雲溪復至西岡少臥松陰)을 보기로 한다.

 

讀書松根上 卷中松子落

솔 뿌리 위에서 책을 읽노라니 책 위에 솔방울이 떨어진다.

支筇欲歸去 半嶺雲氣白

지팡이 짚고서 돌아가려니 산허리에 구름이 희구나.

 

간결하고 청아한 묘사 때문에 절로 탈속한 분위기가 이는 시편이다. 고담(古澹)하고 청신(淸新)한 정조(情調), “언유진이의무궁 미재신함지외(言有盡而意無窮, 味在酸鹹之外).”의 신운(神韻)을 고집한 왕사정의 영향이 보이는 듯하다. 시서화(詩書畵) 모두에 능하였던 이서구(李書九)는 시를 쓸 때에도 역시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는 묘사의 운치를 중시하여 마치 한 폭의 수묵화와 같은 경지를 이루어 놓곤 한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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