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에서 시를 짓다
왕경작고(王京作古)
권근(權近)
王氏作東藩 維持五百年
왕씨작동번 유지오백년
衰微終失道 興廢實關天
쇠미종실도 흥폐실관천
慘澹城猶是 繁華國已遷
참담성유시 번화국이천
我來增歎息 喬木帶寒烟
아래증탄식 교목대한연 『陽村先生文集』 卷之一
해석
王氏作東藩 維持五百年 | 왕씨가 동쪽 번방(藩邦)을 일으켜 500년을 유지했지만 |
衰微終失道 興廢實關天 | 쇠미해져 끝내 도를 잃었으니 흥함과 폐함은 실제 하늘에 관계되어 있구나. |
慘澹城猶是 繁華國已遷 | 참담한 성은 아직 있지만 번화한 나라는 이미 천도했네. |
我來增歎息 喬木帶寒烟 | 내가 와 탄식을 더하니 교목엔 차가운 연기 에워쌌네. 『陽村先生文集』 卷之一 |
해설
이 시는 응제시(應製詩) 24수 가운데 첫 수로, 외교시(外交詩)의 백미(白眉)이다.
조선의 요동공벌계획을 감지한 명(明)나라가 그 계획의 주역인 정도전(鄭道傳)을 소환하려고 하자, 정도전이 거부함으로써 긴장이 야기되었다. 이러한 외교적 마찰을 해소하려고 권근(權近)이 1396년에 명나라로 가서 명(明) 황제의 명에 의하여 창작한 시가 응제시이다.
500년을 이어 온 고려의 역사는 도를 잃고 마침내 쇠약해져 참담하고 황폐한 성터만 남겨 두고 나라가 바뀌었다. 이렇게 쇠약해져 도를 잃은 원인은 민심의 배반에 있다. 그런 고려를 보니 탄식이 나온다.
『해동잡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황제가 8수(首)를 명하여서 지어 바치도록 명하였다. 모두 「왕경작고(王京作古)」ㆍ「이씨이거(李氏異居)」ㆍ「출사(出使)」ㆍ「봉조선명지경(奉朝鮮命至京)」ㆍ「도경서경(道經西京)」ㆍ「도압록(渡鴨綠)」ㆍ「유요좌(由遼左)」ㆍ「항래주해(航萊州海)」 등이다. 또 제18수를 지어 바치도록 명하였다. 그 정화(精華)하고 아름다운 음향이 옥구슬 같아 황제가 두루 살펴보고 칭찬하며 상을 내렸다.
帝命題八首使製進. 曰「王京作古」, 曰「李氏異居」, 曰「奉使至京」, 曰「道經西京」, 曰「渡鴨綠江」, 曰「由遼左」, 曰「航萊州海」. 又命題十六首, 使之製進. 其精華炳蔚, 音響鏗鏘, 帝覽稱賞.
『동인시화(東人詩話)』 권하 25에는 응제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문충공 양촌 권근이 지은 시는 온화하고 순일하며, 전아하고 엄정하다. 홍무 연간에 중국 천자의 부름을 받아 명나라에 들어갔는데, 고황제가 제목을 주어 24편의 시를 지어 올리도록 명령을 내리니, 지어 올리라는 시 전편을 시지를 받자마자 곧장 써 내려갔는데, 말의 이치가 정밀하고 주도하여 더 이상 손을 댈 곳이 없었다. 「변한(弁韓)」 시에 ‘어지러이 만과 촉이 싸우고, 소란스럽기는 변한과 진한일세.’라고 하였는데, 고황제가 이를 기뻐했다. 그가 지은 『대동강」 시에 ‘힘차게 바다도 흘러 들어감은 조종의 뜻이니 정말 우리 왕의 사대하는 정성과 같네.’라 하니, 고황제가 ‘신하된 자의 말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면서 특별히 은총을 내렸다. 어떤 이가 호정 하륜(河崙)에게 ‘도은의 시문은 단련하고 다듬는 것에 힘써 정심ㆍ아고하고, 양촌의 시문은 평담ㆍ온후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 같으니, 필경 도은의 시문이 양촌의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호정이 ‘도은의 단련하고 다듬는 일은 양촌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나, 양촌의 천기(天機)는 도은이 끝내 미칠 수 없는 것이라네. 또 응제시 24편을 양촌은 쉽게 지을 수 있었지만, 도은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네.’라고 답하였다.
陽村權文忠公詩. 溫醇典嚴. 洪武年間被徵入朝. 高皇帝命題賦詩二十四篇. 皆操紙立就. 詞理精到不加點綴. 其賦弁韓云. 紛紛蠻觸戰. 擾擾弁辰韓. 帝悅之. 其賦大同江云. 霈然入海朝宗意. 政似吾王事大誠. 帝曰人臣之言當如是. 大加寵異. 或問於浩亭河公曰陶隱詩文. 刻意鍊琢精深雅高. 陽村詩文. 平淡溫厚成於自然. 畢竟陶優於陽乎. 浩亭曰陶之鍊琢. 陽爲之有裕. 陽之天機. 陶終不能及也. 且應制詩二十四篇. 陽村爲之. 而陶隱必不能也.
원주용, 『고려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09년, 367~369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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