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 잠에 빠진 해당화
숙수해당(熟睡海棠)
신숙주(申叔舟)
高人睡起掩朱扉 月轉長廊香霧霏
獨繞芳叢燒短燭 沈吟夜久更忘歸 『保閑齋集』 卷第六
해석
高人睡起掩朱扉 고인수기엄주비 |
고인이 자다가 일어나 사립문 닫으니 |
月轉長廊香霧霏 월전장랑향무비 |
달은 긴 회랑을 돌고 향내 나는 안개비 내리네. |
獨繞芳叢燒短燭 독요방총소단촉 |
홀로 꽃 가득한 풀숲을 돌고서 짧은 촛대 켜며 |
沈吟夜久更忘歸 침음야구갱망귀 |
나직히 읊조리니 밤이 오래되어 다시 돌아갈 생각 잊었네. 『保閑齋集』 卷第六 |
해설
이 시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저택과 그 주변의 사물들을 제재로 하여 지은 시 가운데 깊은 잠에서 깨어 해당화를 보고 노래한 것이다.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신숙주(申叔舟)ㆍ성삼문(成三問)ㆍ김수온(金守溫)ㆍ서거정(徐居正) 등은 유미적(唯美的) 성향의 시를 짓는다. 최항(崔恒)의 「산곡정수서(山谷精粹序)」에, “비해당은 학문이 해박하고 견식이 높은데, 평소 황산곡의 시를 좋아하여 늘 읊조리며 감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단편 가운데 좋은 작품을 뽑고 뛰어난 것을 모아서 평론을 더하고 『산곡정수」라 하였다. ……뒤에 시를 배우는 자들이 만일 이 한 질의 시집에 나아가 숙독하여 깊이 체득할 수 있다면 고인들이 깨달은 법도를 마땅히 이로부터 얻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천근하고 비루한 기운을 제거하여 청신하고 기묘한 골수로 바꿀 수 있을 것이고, 고장 난 거문고 소리가 남의 귀를 거스르는 일을 걱정하지 않게 될 것이며, 사광과 종자기(鍾子期)가 잠깐 사이에 얼굴빛을 바꾸고 음식 맛을 잃게 될 것이다. 재덕(才德)을 겸비한 군자가 오묘하게 살펴보고 정밀하게 모았으니, 정성을 다해 선인들을 빛나게 하고 후진들을 이끌어 주려는 아름다운 뜻이 이에 다소 실현될 것이다[匪懈堂學該識高 雅愛涪翁詩 每詠玩不置 遂采其短章之佳者 粹而彙之 就加評論 名曰山谷精粹 …… 後之學詩者 苟能卽此一帙 熟讀而深體之 則古人悟入之法 當自此得之 祛淺易鄙陋之氣 換淸新奇巧之髓 枯絃弊軫 不患其不滿人耳 而師曠 鍾期俄爲之改容忘味 大雅君子妙覽精輟 惓惓焉發輝前英 啓迪後進之美意 於是乎少酬矣].”라 하였는데, 이를 통해 안평대군의 후원 아래 기존의 시풍(詩風)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서거정(徐居正)ㆍ강희맹(姜希孟)ㆍ이승소(李承召)ㆍ신숙주(申叔舟) 등의 관각문인(館閣文人)들은 화려한 수사와 세련된 감성을 위주로 시를 창작하였다. 문학에 있어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했던 이들이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인 취향을 드러내는 것은, 왕정(王政)의 분식(粉飾)과 대명(對明) 외교의 필요성으로 인해 기교적인 시문(詩文)의 창작이 요구되었고, 한미(寒微)한 출신에서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어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사람으로서의 엘리트 의식이 귀족적인 성향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위의 시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년, 46~47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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