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몸의 속삭임에 굴복한 마음
‘마음은 굴뚝같지만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고 말할 때, 중요한 것은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 ‘꿈쩍하지 않는 육체’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주장하지만 설거지나 빨래는 결코 돕지 않는 남편들. 아내를 향한 지고지순한 순정은 가상하지만 설거지나 집안청소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 ‘육체의 무관심’이야말로 갈등의 씨앗이다. ‘작업’ 중인 여자에게는 손발이 오그라들게 매너의 정수를 보여주면서, 직장에서 매일 마주치는 여성 동료에게는 ‘커피나 타 와, 프림 둘 설탕 하나!’라고 외치는 남성들. 뮤지컬 『헤드윅』에 열광하면서도 막상 실제 트렌스젠더와 마주치면 쭈뼛쭈뼛 움츠러드는 사람들. ‘학벌을 타파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막상 아이비리그 출신을 보면 ‘역시 달라’라고 느끼며 몹시 우러러 보는 우리의 무의식까지도.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은 무엇보다도 ‘몸의 철학’이다. 육체에 각인되어 있는 수많은 관습과 욕망의 문신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수천 년 동안 투쟁하며 합의해온 육체의 행동 패턴. 아비투스를 바꾸는 것이 그토록 힘든 이유는 그것이 성문화된 법전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합리적 이성의 명령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습관을 숨길 수 없는 ‘몸’이지 언제든 화려하게 분장할 수 있는 ‘마음’은 아닌 셈이다.
『순수의 시대』에서 좀처럼 변하지 않는 몸과 자꾸만 변해가는 마음 사이에서 격렬하게 갈등하는 인물은 뉴랜드 아처다. 엘렌은 뉴랜드의 인생에 있어 취향과 욕망 사이에 치명적인 충돌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가 오랜 시간 갈고 닦아온 취향의 공동체에서는 메이야말로 최고의 신부감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번도 목격한 적 없는 종류의 인간, 자신이 살아온 취향의 공동체와 승산 없는 싸움을 시작한 엘렌을 만나자마자 그의 인생은 바뀐다. 잔심부름하는 하녀가 심부름 나갈 때 추울까봐 자신의 오페라 망토를 직접 입혀주는 엘렌, 모두가 수군거리며 욕하는 유명인사 버포트와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는 엘렌. 뉴랜드는 자신도 모르게 꽃가게에서 한 번도 눈독 들인 적 없는 노란 장미를 사서 엘렌에게 선물하는가 하면, 엘렌이 직접 불 붙여준 담배에 흠칫 놀라면서도 그녀와 태연하게 맞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그녀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비난하는 여동생 앞에서 그녀를 열정적으로 변호하기도 한다. “그녀 덕분에 밴 더 루이든 가문의 파티가 그 갑갑한 장례식 분위기를 떨쳐버렸다고!”
그는 자신이 마치 엘렌 올란스카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 선언한다. “올렌스카 백작 부인은 자유를 찾고자 하는 것이 미국의 이상에 따르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메이의 어머니 웰렌드 부인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그건 외국인들이 우리에 대해 꾸며 낸 희한한 이야기일 뿐이지.” 엘렌의 출현으로 인해 그는 그의 인생 곳곳에 복병처럼 숨어 있는 취향의 올가미들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이혼을 허용하지 않던 유럽을 떠나 ‘자유의 땅’ 미국으로 돌아온 엘렌의 낭만적 이상은 끔찍한 허상이었음이 밝혀진다.
뉴랜드는 그녀가 더 이상 추문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녀의 이혼을 만류한다. 그러나 엘렌의 이혼을 막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녀는 그에게 있어 남자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워대고 ‘품위 없이’ 눈물을 흘리며 진심을 이야기한 첫 번째 여자였다. 그의 합리적 이성은 ‘가문의 품위 유지를 위해 엘렌의 이혼을 막아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의 육체는 체면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엘렌의 거리낌 없는 웃음과 눈물, 거짓 없는 몸짓과 사랑스런 표정에 이끌렸다. 이 취향과 욕망의 균열 속에서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엄청난 일탈을 기획한다. 맨슨 후작부인이 엘렌의 남편이 지닌 엄청난 재력을 부러워하며 그녀가 유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자, 뉴랜드는 엘렌에 대한 억눌린 감정이 한꺼번에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 애가 어떤 것들을 포기했는지 아시겠어요? 소파 위에 있는 저 장미, 저런 것이 니스에 있는 남편의 으리으리한 정원 온실 안에는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구요. 보석은 또 어떻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진주며 소비에스키 에메랄드, 검은 담비털 하며……. 그런 것들을 모조리 내팽개치다니! 그림이며 귀한 가구들, 음악, 지적인 대화……. 아, 아처 씨, 미안한 말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런 건 꿈도 못 꾸어 보았을 걸요! 그앤 그 모든 것을 맘껏 누렸다우. 모두 그 애를 여왕처럼 떠받들어주었지. 맙소사! 그애 초상화가 아홉 차례나 그려졌다고요. 유럽 최고의 화가들이 그애의 초상을 그리는 특권을 허락해달라고 애걸했지. 이런 게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애정이 넘치는 남편이 깊이 뉘우치고 있는데도?
-이디스 워튼, 송은주 역, 『순수의 시대』, 민음사, 2008, 203쪽.
이렇듯 뉴욕의 귀족들은 ‘도도하고 고집 센’ 엘렌이 버리고 온 탐스러운 문화자본에 침을 흘릴 뿐, 엘렌이 결혼생활 내내 감내한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뉴랜드의 눈에는 그제야 엘렌 올레스카가 이제 막 지옥의 불길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온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뉴랜드는 엘렌을 이해한 유일한 사람이 된 것이다. 뉴랜드는 엘렌이 남편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후작부인에게 격노하여 품위 따윈 잊어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다. “차라리 그녀가 죽는 꼴을 보는 게 낫겠어요!” 뉴랜드는 그제야 깨닫는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거부감과 매혹을 동시에 느꼈던 자신의 내면에 일어난 감정의 파문을. 처음으로, 몸의 속삭임에 마음이 굴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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