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몽상의 스트레칭, 이성의 근육 이완법
우리가 어떤 사람을 바라보면,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그 사람의 시선은 자신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로 향하게 된다. 우리가 바라보는 어떤 대상에게 아우라를 느끼는 것은 결국 그 사물에 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벤야민, 『보들레르에 대한 몇 가지 주석』 중에서
몽상의 세계는 의식에 발 딛고 무의식의 세계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환상을 체현하면서도 의식의 감각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창조 작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화가가 자신의 몽상을 캔버스 위에 실현하는 순간, 그는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로 흔들린다. 환상과 의식 사이,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몽상을 특유의 손재주로 이 세상에 불러낸다.
우리가 예술 작품에 감동하는 것은 예술가의 몽상이 불러일으키는 영혼의 에너지에 교감하기 때문이다. 바슐라르가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도 이러한 예술가의 몽상을 닮아 있다. 원령공주가 숲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들개의 등허리 위에서, 들개의 눈높이와 들개의 숨결로 숲을 바라보며, 자음과 모음으로 날카롭게 분절되지 않는 숲의 웅얼거림을 듣고, 고요한 숲의 말없는 시선을 느낀다.
인류학자 로렌 아이슬리 또한 바슐라르처럼 자연의 언어로, 자연의 시점으로 움직이는 세계의 숨결을 생생히 느꼈다. 그것은 감히 인간의 힘으로 지구를 보호할 수 있다는 오만이 아니라, 우리 부족, 우리 인류를 지키기 위해 지구라는 삶의 ‘배경’을 보존하려는 정착민의 욕망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더 커다란 그림, 우주라는 무한한 소실점을 향해 멀어지는 생의 순간을 포착하려는 열망이었다.
로렌 아이슬리는 언젠가 인류가 사라진 도시에서도 새들이 고스란히 살아남아 ‘그들의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는 ‘인간 중심의 1인칭’이 아니라 ‘생명의 다인칭(多人稱)’을 사유했다. 인류의 1인칭이 아니라 생명의 무인칭(無人稱)을, 신의 관점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인류의 부감샷이 아니라 핸드 헬드 카메라를 들고 뛰며 자연이 숨 쉬는 속도에 자신을 동화시키는 미메시스(mimesis, 예술 창작의 기본 원리로서의 모방이나 재현)의 시점으로 세상을 보았던 것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중심적 시점을 스스로 내려놓은 지금, 아시타카의 속내도 이렇지 않았을까.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동안, 아니 바라보지 않는 순간에도, 자연은 인간을 응시한다. 인간이 등산로에서 쓰레기를 몰래 버릴 때, 하천에 폐수를 방류할 때, 각종 벌레를 ‘해충’이라는 명목으로 짓밟아죽이고, 고속도로 위에서 야생동물을 ‘로드킬’로 만들 때……. 아무도 보지 않아도 가슴 한편이 서늘해 오는 그 감각은, 자연이 인간을 말없이 응시하는 그 시선을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요 몇 년간 때때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은 최후의 인간이 산으로 도망을 친 후에 뉴욕을 접수하게 될 새들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물론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장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겠지만, 나의 거처가 줄곧 높은 곳이어서 나는 새들이 어떤 소리로 노래 부를지 알며, 또한 그들이 우리 인간을 어떻게 주시하는지 알고 있다. 아무도 자기들 소리를 엿듣고 있지 않다고 여겨질 때, 참새들이 에어컨 바깥쪽을 톡톡 치는 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이곤 했다. 또한 나는 다른 새들이 텔레비전 안테나를 통해 들어오는 진동을 어떻게 감지하는지 알고 있다.
“그가 갔나?” 하고 그들이 물으면, 아래에서 “아직 아니”라는 진동이 올라오는 것이다.
-로렌 아이슬리, 김현구 역, 『광대한 여행』, 강, 2005, 248쪽.
왜 우리는 지구의 석유 보유량으로 ‘인간이’ 몇 년이나 버틸 수 있는지, ‘우리나라’가 몇 년이나 지나면 ‘물 부족 국가’가 되는지, 매일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가는 원시림과 빙산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온도와 해수면’이 얼마나 상승할지에만 관심이 있을까. 인간은 자연을 자원으로만 바라봄으로써 자연에 무지하게 되었고, 자연에 무지해진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서조차 점점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자연은 ‘소중하다’는 인식도 자연에 대한 소유욕의 일종이다.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우리는 한 번도 자연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는 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연의 언어에 진정 귀 기울이고 싶다면, 바슐라르의 말처럼 지성과 상상력의 과감한 이혼을 선택해야 한다. 바슐라르의 철학을 몸으로 배우고 싶다면, 진정한 몽상의 세계에 빠져들어 행복해지고 싶다면, 먼저 지성의 경직된 근육부터 이완시켜야 할 것 같다. 합리적 이성과 인터넷 검색어 순위에 찌든 우리의 두뇌는, 감각의 모든 촉수를 해방시키는, 자유로운 두뇌의 스트레칭법부터 배워야 한다.
이것이 어렵다면 어린아이들이 ‘혼자 노는’ 모습을 10분만 관찰해도 좋다. 아이들은 주위의 모든 사물을 싱그러운 교감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반짝이는 형광등 불빛을 보고도 엄청 반가운 손님을 만난 듯 방싯방싯 미소를 짓고, 사소한 자극에도 호들갑을 떨며, 주변의 모든 자극을 ‘그것’이 아닌 ‘그대’로 대하는 아이들. 아이들은 사물 뒤에 내재된 힘, 마나(mana, 멜라네시아 일대의 원시 종교에서 생겨난 비인격적이며 초자연적인 힘, 영력, 주술력 따위의 관념)를 포착하는 비법을, 이 세상 모든 것이 우리의 삶과 ‘유관’하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한때 그 비밀을 알았지만 잠시 ‘깜빡’했을 뿐인데…….
모든 대상들은, 우리가 그것들로부터 상징적 의미를 끄집어낼 때, 강렬한 드라마의 기호들이 된다. 그것들은 감수성의 확장되는 거울들이 되는 것이다. 이 우주 속에서 우리가 그것들의 깊이를 모든 것에게 부여할 때, 우리와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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