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타인의 추억을 앓는 산책자를 위하여
1. 부랑자들, 혹은 비정한 도시의 산책자들
국가는 전당포와 복권으로 프롤레타리아를 농락한다. 오른손이 베푼 것을 왼손이 빼앗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이 소년들은 도시의 쓰레기와 찌꺼기와 잔해들을 먹고 산다. 사람들이 무심코 버린 모든 쓰레기들이 이 소년들에게는 ‘사업’의 대상이 된다. 이 소년들은 이 도시의 비밀을 신문이나 뉴스가 아닌 ‘온몸의 감촉’으로 속속들이 알고 있다. 만약 이 도시에서 오늘 일어난 살인, 절도, 방화 사건의 원인이 궁금하다면 경찰이나 교사나 공무원보다는 이 소년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 도시의 가장 맛있는 빵집을 알고 싶거나,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를 알고 싶을 때도, 웬만한 ‘공식적’ 정보통보다는 이 부랑자 소년들의 비공식 핫라인을 수소문해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모든 중요한 일들을, 소년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알 수 있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대공황시기 뉴욕의 뒷골목, 이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비상하기를 꿈꿨던 소년들의 사랑과 성공과 실패와 복수의 이야기다. 좀도둑, 소매치기, 문제아 등 이들을 규정하는 용어들은 다양하겠지만, 이 소년들의 주된 업무는 ‘어슬렁거리기(loitering)’다.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며 익숙한 거리에서 매번 새로운 작업 대상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소년들의 주특기다. 멀리서 보면 그들의 모습은 한가롭기 이를 데 없지만, 조금만 가까이서 보면 이 아이들의 눈빛은 먹이를 찾는 맹수만큼이나 날카롭게 빛난다. 소년들에게 어슬렁거리기는 이 도시의 비밀을 알아내기에 가장 적합한 창조적 퍼포먼스다. 거리를 잘 헤매야 ‘목표대상’을 잘 찾을 수 있고, 거리를 잘 헤매야 그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을(예를 들어 소매치기하기에 딱 좋은, 값비싼 시계를 찬 취객들)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소년들의 직업은 방황하고 두리번거리고 어슬렁거리는 것이다.
미국의 상점 입구에는 ‘어슬렁거리지 마시오(Do not loiter)’라고 적힌 메모가 발견되곤 한다. 분명한 목적도 없이 상점 주변을 배회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상점 주인들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로 보일 수 있다. 모범시민이 보기에 길거리를 쓸데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은 ‘범죄’로 가는 지름길이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인간의 총천연색 욕망과 도시의 장구한 역사를 탐색하는 소중한 ‘연구’의 방식일 수도 있다. 셀 수 없는 상점과 간판과 광고와 쇼윈도우와 인파 속을 하루 종일 헤매도 결코 지루해하지 않는 사람, 오직 잘 어슬렁거리는 것만으로도 하루 일과를 보람차게 보낼 수 있는 사람, 그들이야말로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도시의 산책자 혹은 만보객이었다.
벤야민은 1934년 저서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고통의 초상. 센 강 다리 밑인 듯. 집시 여자가 잠을 잔다. 고개를 숙이고 텅 빈 지갑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상의는 햇빛에 빛나는 핀으로 덮여 있고, 모든 가재도구와 사유재산 전부—솔빗 두 개, 칼집 없는 칼, 뚜껑 닫힌 그릇—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그녀의 주위에 실내의 느낌, 나아가 친밀감을 자아낸다.” (……) 물론 만보객은 거리를 거실로 삼고 살아간다. 그러나 거리를 침실이나 욕실이나 부엌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이와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이때는 자기 삶의 가장 내밀한 국면들이 낯선 타인에게 내보여지며 궁극적으로 경찰에게 내보여진다.
-수잔 벅 모스 지음, 김정아 옮김,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문학동네, 2005, 441쪽.
2. 어린 시절 그대로 남은 게 하나 없지만
아이의 책상 서랍은 무기이자 동물원, 범죄 박물관이자 납골당이다. (……) 아이의 삶에서는 끔찍하고 기괴하고 암울한 측면이 보인다. 교육자들은 아직 루소의 꿈에 매달려 있지만 링겔네츠 같은 작가나 클레 같은 작가는 아이들의 포악하고 비인간적인 측면을 포착했다.
-발터 벤야민, 『오래된 장난감들』 중에서
시궁창 밑바닥에서 인생을 시작한 주인공이 최고의 자리를 꿈꾸다가, 최고의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을 때, 혹은 최고가 되자마자 처절하게 몰락하는 스토리는 갱스터 무비의 전형이다. 실제로 미국 영화에서 갱스터 무비의 원형이 확립된 시기는 1930년대, 대공황의 광기가 휩쓸던 암흑기였다고 한다. 1930년대 하면 떠오르는 대공황과 금주법을 배경으로 하면서 갱스터 무비의 전형적 문법을 미묘하게 비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이제는 어느새 고전의 반열을 넘보는 이 영화는 단지 주인공 누들스(로버트 드니로)의 개인적 실패담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 혹은 아메리카니즘으로 대변되는 현대인의 ‘성공신화’를 해체하는 비극적 알레고리로 다가온다.
이 영화는 『대부』, 『칼리토』, 『스카페이스』, 『저수지의 개들』 등의 갱스터 무비들과 비슷한 혈통이면서도 또 다른 매력을 뿜어낸다. 저마다 마음속에 갱스터 무비의 서로 다른 원형이 존재하는데, 내 마음속에서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수많은 갱스터 무비의 심정적 원본으로 느껴진다. 무려 229분의 상영시간 동안, 이 영화는 한 인물과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인생을 뒤바꾼 결정적 순간들을 빼곡하게 담아낸다. 타인의 인생을 너무 속속들이 엿본 듯한 알 수 없는 죄책감을 유발할 정도로, 이 영화의 ‘묘사’는 가혹하리만치 생생하다.
그런데 수많은 갱스터 무비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어메리카』의 결정적 차이는 주인공이 어린 시절과 맺는 관계, 즉 ‘기억’과 ‘현실’ 사이의 관계 맺기 방식인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관객의 뇌리에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 장면들은 어른이 된 후의 누들스가 아니라 어린 시절 누들스가 보고 듣고 만졌던 기억의 편린들이다.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한 전형적인 비극의 주인공 누들스를 괴롭히는 것은 친구의 배신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의 뇌리를 시도 때도 없이 강타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다. 정말 아픈 것은 친구의 배신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친구가 어린 시절 속에서는 여전히 선량하고 아름답게 웃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아무 것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보상할 만한 대체제가 남아 있지 않은데, 고통스럽고 무자비했지만 여전히 아련한 아름다움의 잔상으로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은 틈날 때마다 주인공의 뒤통수를 가격한다.
어린 시절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되찾을 수 있는 아름다운 기억은 아무것도 없는데, 누들스는 바보처럼 어린 시절의 기억에 고착되어 있다. 아니, ‘기억’을 지배하는 주인공이 누들스가 아니라 오히려 누들스의 삶을 몸소 지휘하는 주체가 ‘기억’이 아닐까. 어린 시절의 누들스가 아직도 뉴욕의 뒷골목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을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된 것에 비해, 어른이 되어 여전히 이 도시의 폐허를 떠도는 누들스는 유령처럼 비현실적이다. 지금은 죽어버리거나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친구들, 성공했지만 본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친구들. 어른이 된 그들의 모습은 한없이 낯설고 삭막하지만, 한때는 ‘그들도 우리처럼’ 골목길을 후비며 까르르 웃던, 영락없는 개구쟁이 소년들이었다.
아이는 이미 집 안의 숨는 곳을 전부 알고 있으며 마치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라고 확신하고 있는 집으로 들어갈 때처럼 그곳에 몸을 숨긴다. 그러면 가슴이 쿵쾅거린다. 아이는 숨을 멈춘다. 거기서 아이는 사물의 세계 속에 둘러싸인다. (……) 출입문의 커튼 뒤에 서 있는 아이는 그 자체로 바람에 흔들리는 흰 것이, 유령이 된다. 식탁 밑에 웅크리면 아이는 조각이 새겨진 식탁 다리를 네 개의 기둥으로 한 신전의 목조 신상(神像)으로 바뀐다. 그리고 문 뒤에 숨으면 아이 자신이 문이 되며, 문 안에서 무거운 가면처럼 꾸민 채 마법사가 되어 아무것도 모르고 방에 들어오는 사람 모두에게 마법을 걸 것이다.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일방통행로』, 새물결, 2007, 91~92쪽.
3. 남루하고 비참한 어른이 되어서야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이미 사냥꾼이 되어 있다. 아이는 사물 속에서 영혼들의 흔적을 냄새 맡고 그것들을 추적한다. (……) 숲으로부터 아이는 전리품을 집으로 끌고 와 그것을 깨끗이 하고 딱딱하게 만들고, 그것들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버린다.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일방통행로』, 새물결, 2007, 90쪽.
어린 시절 누들스, 짝눈, 팻시, 뚱보는 함께 뒷골목을 어울려 다니며 좀도둑질을 일삼는다.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 인사불성이 된 주정뱅이의 시계를 훔치려던 누들스는 프랑스에서 이제 막 이민 온 낯선 소년 맥스에게 선수를 빼앗긴다. 이 인연으로 친구가 된 누들스와 맥스는 이후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절친’이 된다. 누들스 일당은 맥스와 함께 갱단의 밀수품을 운반하며 그렇게 번 돈을 모아 인근 기차역의 물품보관함에 차곡차곡 모아둔다. 아이들의 좀도둑질과 갱단 도우미(?) 작업은 때로는 악행처럼 보이고 때로는 그저 놀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누들스가 성장하여 직업적인 갱스터가 되지 않았다면, 놀이와 악행의 구분이 모호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저 ‘아련한 추억’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이 도시의 모든 건물과 소품들을 언제 어디서든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전쟁터로도 놀이터로도 이용할 수 있는 아이들의 상상력. ‘그건 좀 도둑질일 뿐이야!’라고 단죄할 수만은 없는, 그 어처구니없이 순수한 놀이의 상상력, 그리고 그 시절을 결코 되찾을 수 없음을 알고 있는 누들스의 회한이야말로 이 영화의 OST 『Childhood Memories』를 들을 때마다 우리가 느끼는 감동의 원천일 것이다. 빈곤과 폭력에 상습적으로 노출되어 있던 누들스에게도 그 모든 아픔을 깡그리 잊을 수 있는 행복의 출구가 있었다. 바로 뚱보의 여동생 데보라가 발레 연습을 하는 것을 몰래 훔쳐보는 일.
각종 잡동사니와 식료품이 가득한 창고에서 혼자 발레 연습을 하는 데보라의 모습을 바라보는 누들스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게 빛난다. 그저 평범한 창고에 불과한 이 장소는 데보라의 아름다운 춤사위로 인해 이 세상 하나뿐인 멋진 무대가 된다. 단 한 사람의 관객 누들스를 위한, 어린 소녀 데보라가 각본과 연출과 연기 모두를 거뜬히 혼자 해낸 멋진 공연 무대. 누들스가 자신을 엿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새치름한 표정으로 사뿐사뿐 춤을 추는 데보라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춤곡은 『Amapola(양귀비꽃)』다. 이 음악이 나올 때마다 누들스는 연어가 필사적으로 거대한 물살을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올 때나 지을 법한, 절박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데보라의 비밀 공연을 훔쳐보기 위해 뚱보네 집 화장실 뒤편으로 달려간다.
아마 어린 시절은 누들스가 기억하는 것처럼 그토록 아름답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누들스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폭력, 굶주림과 두려움 속에 살아야 했던 전형적인 빈민가의 아이였다. 그러나 기억은 누들스의 머릿속에서 철저히 재구성된다. 어린 누들스가 미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아직 해석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저장되어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어린 시절 그가 상상했던 미래보다 훨씬 남루하고 비참한 어른이 되어서야, 오랜 시간 억압된 기억의 창고 속에 보관된 그 사건들은 아름답고 애잔한 추억의 성좌를 그린다. 어른이 된 누들스가 아이였던 누들스의 눈으로 뉴욕의 밤거리를 다시 배회하자, 비로소 뉴욕의 뒷골목이 지닌 진정한 매혹이 완성된다. 지금은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이곳은 분명 그의 고향이지만, 누들스는 새삼 ‘어린이’의 눈과 ‘이방인’의 눈이 되어 이 거리를 다시 바라본다. 이때 그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된 스산하면서도 애잔한 거리 풍경이야말로, 그가 잃어버린 시간의 총체였다.
벤야민은 낯선 도시인 모스크바에서 ‘어린아이’가 된다. 그는 유년시절의 도시인 베를린에서 ‘외국인’이 된다. 그는 독자들이 도시 환경을 친숙함과 습관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첫인상’으로 지각하도록 변화시켜 표현한다. 어린 아이는 보는 사람과 본 것, 주체와 대상 사이에 거리를 만드는 렌즈가 된다. 어린 아이의 관점으로 도시를 관찰하는 것은 망원경을 거꾸로 하여 도시를 보는 것과 같다.
-그램 질로크, 노명우 옮김,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효형출판, 2005, 124~125쪽.
4. 단순한 회고가 아닌 기억의 끊임없는 다시 쓰기
나의 어머니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나의 반항심과 나의 얼뜬 거리 배회를 꾸짖었는데, 이때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도시의 거리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언젠가는 어머니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어렴풋하게 감지하였다. 아무튼 어머니와 어머니가 속한 계급, 그리고 나 자신이 속한 계급을 거부하고자 하는 감정 —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감정은 따지고 보면 그런 척하는 감정이었지만 — 은 어느 거리에서 창녀에게 말을 거는, 그 어떤 것에도 비견될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드는 원인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벤야민, 『거지와 창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1, 21쪽.
누들스에게 유년의 기억을 촉발하는 첫 번째 매개체는 ‘시체’다. 한때 그의 삶을 지배했던 친구들 3명의 시체. 가족보다 친밀하고 연인보다 편안했던 친구들, 다음 행동을 개시하기 위해 굳이 그들의 ‘의견’을 묻지 않아도 되는, 내 몸 같이 가까운 친구들의 시체. 그들의 시체는 지울 수 없는, 언제나 예고도 없이 불현듯 뒤통수를 가격하는 추억을 폭발시키는 첫 번째 매개체다. 친구들의 훼손된 시체는 마치 미래의 내 자신의 시체를 유체 이탈하여 나 스스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끔찍한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그 추악한 시체들은 역설적으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유년 시절을 상기시킨다.
그 유년의 추억이야말로, 사실상 어린 시절의 추억 이외에는 더욱 아름다운 무엇을 가지지 못한 누들스가 평생 유령처럼 죽은 기억들의 묘지 주변을 배회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리고 그 아픈 유년의 추억은 누들스를 더욱 매혹적인 갱스터 무비의 ‘안티 히어로’로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묘사하는 어린 시절은 소름끼치게 생생하고 가혹하게 아름답다. 그 처절한 아름다움에 감염된 관객들은 영화 속 캐릭터와 자신을 가르는 거대한 시공간의 거리감을 지운 채, 누들스와 그의 친구들이 겪은 일들을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생생한 고통으로 회상할 수 있게 된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어린 시절은 누구나 거쳐 갈 수밖에 없는 유년의 아픔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가정의 울타리 속에서 안전하고 평화롭게 자라난 관객들에게는 결핍된 ‘뒷골목의 추억’을 마치 자신이 직접 겪은 일처럼 공유하게 만든다. 이렇듯 관객에게 단지 ‘타인의 삶을 엿보는 쾌락’을 넘어 관객에게 ‘부재하는 추억’조차 창조하는 힘, 겪지 않은 사건마저 자신의 기억처럼 자유자재로 활용하게 만드는 힘이야말로 영화라는 장르의 매력이기도 하다. 스크린을 통해 경험한 추억을 마치 자신의 추억인 양 생생하게 아파하게 만드는 영화의 감응력.
누들스는 죽은 친구들의 끔찍한 시체를 통해 단지 유년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이미 와 있는 자신의 죽음’을 본다. 그는 침묵하는 시체를 통해 자신이 통과해온 고통의 시간들이 뿜어내는 아우성을 듣는다. 그래, 나도 너희들처럼 고독하고 초라하게 죽어가겠지. 너희들도 나처럼 그렇게 매일 쓸쓸하게 죽어가고 있었구나. 그는 친구들과 함께 걸어왔던 시간들, 그들과 함께 꿈꿨던 사랑과 우정으로부터 점점 멀어져온 과정이 자신의 삶이었음을 깨닫는다.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으로부터 매일매일 멀어지는 것, 그것이 삶이며, 그 끝에는 철저히 혼자 치러내야 할 죽음의 고통이 놓여 있다. 누들스는 친구들의 ‘시체’를 통해 그들의 ‘삶’을, 그들의 인생에 얽히고설킨 자신의 삶을,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 자신의 죽음을 본다. 가정과 학교의 보호와 통제가 아닌, 브룩클린 뒷골목의 떠들썩한 혼란이 곧 영혼의 안식처였던 그들. 누들스는 자신을 키워온 8할이 그 지저분하고 무질서한 뉴욕의 거리 한복판이었음을, 누들스와 친구들의 영혼의 태반은 가정이나 학교가 아니라 바로 그 뉴욕의 뒷골목이었음을 떠올린다.
돌아온 탕아 누들스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뉴욕의 뒷골목은 아이 ― 누들스가 어른 ― 누들스에게 송신하는 기억의 콜라주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왕복했던 저 닳고 닳은 뉴욕의 뒷골목은 이제 누들스에게 마치 잃어버린 첫인상처럼 다시 써진다. 그것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며 기억을 끊임없이 다시 쓰기 함으로써 삶 자체의 내러티브가 변형되는 체험이다.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외부적 사건의 연대기적 서술이 아니라, 무의식의 두터운 각질을 뚫고 기어이 솟아오르는 쓰라린 기억의 염증이 ‘현재의 나’를 매번 다시 규정하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유년 시절 기억의 복잡한 그물망과, 특히 ‘무의지적 기억(순간적인, 무의식적인 기억)’ 개념은 벤야민의 자전적 저작에 영감을 주었다. 그 기억들은 현재의 감각이 잊고 있던 과거의 경험을 갑작스러운 연상 작용과 인상을 통해 상기시켜주는 알기 어려운 깨달음의 순간에서 흘러나오며, 이 기억들은 또 다시 잊힌다.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홍차에 찍은 마들렌의 향과 맛, 다양한 꽃들의 향기와 같은 순간적인 자극들은 오랫동안 잠자던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깨워 사랑과 슬픔들을 만나게 한다. 벤야민의 베를린 에세이는 과거와 현재, 어른과 어린아이를 유사하게 섞어 엮는다. (……) 벤야민의 글들은 유년시절의 잃어버린 시간뿐 아니라 대도시의 감춰진 균열들까지 찾으려 한다.
-그램 질로크 지음, 노명우 옮김,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효형출판, 2005, 120~121쪽.
5. 가장 순수했을 때 사랑했던 단 한 사람과의 추억
나타나기만 하면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지는 요정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러나 자기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를 기억해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도 거의 없다.
-발터 벤야민, 『겨울날 아침』 중에서
이제는 그만 둔감해질 때도 되었는데. 누군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아주 사소한 자극이 다시금 옛 기억을 건드리기만 해도, 간신히 봉합해놓은 영혼의 상처는 불현듯 속절없이 파열되고 만다. 내가 가장 순수했을 때, 어떤 배신과 굴욕에도 영혼의 관통상을 입지 않았을 때. 바로 그때 사랑했던 단 한 사람과의 추억. 그 이후의 어떤 화려한 추억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이 세상 하나뿐인 맨 처음의 아름다움. 온몸 구석구석의 촉각이 유독 한 사람의 눈길과 한 사람의 손짓에만 반응하던 순간들.
어지러운 인파 속에 그 사람이 섞여 있을지라도 가위로 오려낸 듯 오직 그 사람의 실루엣만이 도드라져 보이던 순간들. 입김조차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그 사람이 서 있어도, 그 사람이 바로 옆에서 나를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한없이 먼 곳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듯한 안타까움. 아마 이런 지독한 사랑은 결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누들스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턱없이 늙어버린 누들스의 잠든 의식을 강타하는 두 번째 매개체는 낡은 벽 위에 붙은 포스터들이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의 공연 선전 포스터. 이제는 남의 여자, 아니 한때 가장 사랑했던 친구의 아내가 되어버린 데보라의 공연 포스터. 어수선한 잡동사니로 가득한 곡물창고에서 스스로 조명과 음악과 연기와 연출을 모두 담당한 멋진 발레 공연의 주인공으로 당차게 빛나던 소녀. 누들스의 첫사랑 데보라는 어느새 뉴욕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대스타가 되어 있다.
그러나 누들스에게만은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는 그녀만의 숨은 얼굴이, 그녀의 화려한 메이크업 속에 숨겨진 그녀의 그늘진 삶의 흔적이 보인다. 오직 둘만이 알고 있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은밀한 첫사랑의 추억들. 그녀의 살구 빛 입술이 내 입술에 처음 닿던 그날. 내 남루한 옷차림과 꾀죄죄한 몸뚱아리조차 천상의 아름다운 시구절로 예찬하던 그녀의 입술 모양을 낱낱이 기억하는 것은 이 세상에 오직 나 하나뿐이다.
삶이라는 책 속에서 추억은 마치 자외선처럼 본문의 난외에 예언으로서 적혀 있던 보이지 않는 글자를 각자에게 보여준다.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일방통행로』, 새물결, 2007
6. 방황의 기술을 연구하다
한때 파스칼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는 사람만큼 불쌍하게 죽는 사람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억의 경우에도 이 말은 그대로 해당될 것임에 틀림없다. 단지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기억은 상속자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 183쪽.
누들스의 기억을 촉발하는 세 번째 매개체는 ‘돈가방’이다. 도망 중이던 그가 기차역에서 찾아가기로 했던 돈가방. 그 안에는 그의 인생을 걸고 벌였던 커다란 도박판의 승리를 증명하는 돈다발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의 미래를 보장해줄 것으로 믿었던 그 돈가방에는 마치 그의 꿈을 조롱하듯 철 지난 신문뭉치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 돈다발을 가져가버린 것은 둘도 없는 친구 맥스였고, 그 돈가방을 통해 누들스가 쟁취하고 싶었던 것은 데보라였다.
누들스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누들스의 초라한 신세를 혐오했던 데보라에게, 누들스는 보여주고 싶었다. 멋지게 성공해서 너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된 바로 그 모습을. 텅 빈 돈가방을 발견하는 순간, 모든 비전은 산산이 박살난다. 도둑맞은 돈가방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처절했던 실패와 상실의 기억이다. 이제 누들스는 기억의 창고에 꼭꼭 숨겨놓았던 어린 시절의 비밀을 도저히 품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저 생생한 기억의 매개체들을 통해 그는 자신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기억의 사슬을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벤야민은 어수선하고 무질서하고 북적이는 거리 위에서, 버려지고 숨겨지고 지워져가는 모든 흔적들 속에서, 문명을 탄생시킨 생성의 힘을 보았다. 무엇이 쓸모 있고 무엇이 쓸모없는가를 구분하는 분별지가 없는 아이들처럼, 벤야민은 ‘쓸모’의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 사물을 바라보고자 했다. 그는 ‘길을 찾는 기술’이 아니라 ‘길을 잃는 기술’을 연구했다. 목적지를 향해 최단거리로 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친숙했던 모든 것조차 낯설게 만들 수 있는 ‘방황의 기술’을 연구했다.
진정 길을 잃어버린 산책자는 어린 아이의 눈으로, 마주치는 모든 사물을 향해 새롭게 말을 걸 수 있는 눈빛으로 거리를 바라본다. 사물의 쓸모를 ‘읽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는 사물에게서도 이 도시를 탄생시킨 욕망의 비밀을 해독해낸다. 이렇듯 ‘창조적으로’ 방황하는 산책자에게 길 잃기는 패배가 아닌 또 하나의 성취가 된다. 아마 벤야민이 길을 걷다가 자신의 고향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누들스를 만났다면, 그는 누들스의 눈동자에서 스며 나오는 방황하는 산책자 특유의 눈빛을 읽어내지 않았을까. 누들스는 이 도시가 제공하는 모든 ‘먹이들’에서 자유로워지자, 즉 이 도시에서 얻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영원한 이방인이 되자, 비로소 이 도시를 이끌어 온 생성의 에너지를, 나아가 이 도시의 부랑아들(누들스와 그의 친구들)을 관통해온 욕망의 비밀을 알 것만 같다.
벤야민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현대적 질서 형식이 조용히 보이지 않게 만들려는 이들의 경험들, 즉 ‘주변현상’들이 목소리를 내도록 하는 것이다.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조롱의 대상들은 구출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배회하는 산책자, 자의식에 넘치는 댄디(멋쟁이), 소리치는 거지, 고통받는 매춘부, 비참한 넝마주이 같은 주변적이고 천대받는 군상들이 벤야민의 도시 기록에 담겨 있다. ‘보이지 않았던 것’은 보이게 되며, 벙어리는 말을 하게 된다. 벤야민의 도시 현상학은 가장 기괴하고 멸시 받은 사례들의 연구를 통해 현대성의 경험을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그램 질로크, 노명우 옮김,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효형출판, 2005, 27쪽.
7. 기억의 별자리, 그릴수록 희미해지는……
이야기는 참으로 오래된 소통 형식이다. 이야기는 정보처럼 순수한 사건 자체를 전달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말하는 사람의 삶 속에 뿌리박혀 듣는 사람의 경험으로 전달된다.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 중에서
누들스는 이 도시가 버린 모든 것의 상징이다. 이 도시가 내동댕이친 모든 허접쓰레기들이 누들스를 키운 문화적 자양분이었다. 그는 거지와 매춘부와 소매치기와 넝마주이와 조직폭력배들 틈바구니에서 자라났고, 그들 모두의 버려진 삶이야말로 누들스가 매일 등교했던 ‘내면의 학교’였다. 이 내면의 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이라는 점에서 누들스와 맥스는 서로 통했지만, 둘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갔다.
누들스는 맥스에게 돈가방과 데보라와 친구들 모두를 빼앗김으로써 여전히 ‘세상 바깥’에 버려진 존재가 되었다. 반면 맥스는 자신의 존재를 구성한 저 버려진 삶들의 흔적을 깡그리 청산함으로써 그의 토양이었던 ‘뒷골목’의 삶을 버렸다. 그는 뒷골목 소매치기 소년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 누구보다도 먼저 도착했다. 누들스는 이 도시가 버린 모든 것들을 대변하는 존재였고, 맥스는 이 도시가 버린 존재들의 약점을 역으로 이용하여 이 도시의 화려한 중심이 되었다. 맥스는 마침내 ‘버려진 자’가 아니라 ‘버리는 자’로 등극한 것이다.
노인이 되어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온 누들스는 자신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친구도, 연인도, 재산도. 이 모든 것이 누들스의 어린 시절에 이미 결정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 절의 몇 가지 결정적인 기억들은 그의 성격과 그의 인생 전체를 집약하는 선명한 알레고리처럼 느껴진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누들스가 잔꾀를 부려 신사에게 훔친 시계를 맥스가 가로채버린 것. 그 후로 누들스는 번번이 맥스에게 자신이 이룬 것들을,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도둑맞는다. 친구도, 연인도, 재산도, 그리고 성공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까지도. 누들스는 평생 그의 인생 전체를 맥스에게 도둑맞은 느낌으로 살아가게 된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데보라와 누들스가 생애 첫 키스를 나누던 황홀한 순간, 맥스가 누들스를 불러내 ‘어둠의 세계’로 이끄는 장면이다. 아가서를 패러디하여 자신의 시로 만든 데보라의 사랑스런 고백이 끝나고 수줍은 키스가 시작되자, 맥스가 누들스를 불러내 갱단의 패싸움에 끌어들인다. 데보라는 쌀쌀맞은 표정으로 말한다. “가봐. 네 엄마가 부르잖니.” 패싸움에 끼어들어 피투성이가 된 누들스에게,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데보라의 마음은 굳게 닫혀버린다. 누들스는 맥스의 우정에서는 왠지 기분 나쁜 배신의 냄새가 느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맥스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다. 누들스가 데보라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가려 할 때마다 맥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발걸음을 저지하고, 누들스를 검은 유혹 속으로 초대한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안타깝게 재회한 누들스와 데보라의 로맨스를 방해한 것도 맥스였다. 어른이 된 데보라는 마치 익숙한 장면이라는 듯이 어린 시절 자신의 대사를 반복한다. “가봐, 네 엄마가 부르잖니.”
세 번째 에피소드는 곡물창고 속에서의 애절한 사랑 고백이다. 그날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사랑보다 더 큰 것을 원하는 데보라의 야망은 둘을 매번 갈라놓는다. 데보라와 누들스는 서로 사랑하지만, 성공을 향한 데보라의 열정과 누들스의 반복되는 불운은 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어린 시절 데보라는 이미 누들스에게 자신의 진심을 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너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너는 더럽고 초라하고 가망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사랑스럽다고. 하지만 너는 시시한 불량배가 될 것이 뻔하고, 그런 너는 결코 내 사랑이 될 수 없을 거라고.
평생 누들스는 데보라를 갈망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다. 널 사랑하지만, 난 너의 것이 될 수 없어. 데보라는 홀로 춤추는 자신의 자태를 훔쳐보는 소년의 빛나는 순수를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본다. 하지만 이 소녀에게는 누들스의 순수와 맥스의 야망이 공존한다. 데보라는 마음으로는 누들스에게 끌리지만 맥스가 약속하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아가서를 유머러스하게 패러디한 그녀의 사랑 고백은 순수와 허영이 공존하는 그녀의 내면을 담아내고 있다(괄호 안의 대사는 그녀가 아가서에 ‘변화를 준’ 부분이다.).
내 사랑 그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그의 살결은 순금처럼 빛나고
그의 뺨은 석류를 쪼개놓은 듯 불그스레하구나.
(비록 그는 작년 12월 이후로 목욕이라곤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은 비둘기의 눈처럼 빛나고
그의 몸은 상아처럼 보얗고
그의 다리는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처럼 탄탄하구나.
(물론 그의 바지는 너무 더러워서 난리가 났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랑스럽구나.
(그렇지만, 그는 별 볼일 없는 양아치일 뿐. 그는 내 사랑이 될 수 없으니 안타깝구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중에서
8. 멜랑콜리의 도시
바로 지금 삶을 구성하는 힘은 신념이 아니라 사실이다.
-발터 벤야민
아마도 누들스의 삶을 구성하는 ‘사실’만을 모아, 아무런 은유도 해석도 없이 건조한 다큐멘터리로 만든다면, 그의 삶은 ‘실패한 갱스터의 나쁜 예’에 불과할 것이다. 그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관객의 동경과 누들스 그 자신의 덧없는 기억에 대한 짙은 멜랑콜리(melancholy, 우울)다. 동경이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어려운 머나먼 존재에 대한 물증 없는 판타지라면, 멜랑콜리는 자신의 것일 수밖에 없는 슬픔에 대한 뼛속 깊은 자기연민이 아닐까.
누들스가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향한 깊은 멜랑콜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사회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기억에 포박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기억의 만유인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오직 기억의 힘으로 살아가고 기억의 공격으로 상처받고 기억의 동력으로 삶을 해석하는 인간. 그의 멜랑콜리는 화려했던 한 시대의 몰락, 자기가 창조한 한 세계의 붕괴, 자신이 속한 세계의 궁극적 몰락을 눈앞에서 바라보는 자의 뼈아픈 비애다.
누들스는 어린 시절 패거리의 막내를 죽인 자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갱단의 일원을 살해하고 감옥에 들어가 어른이 되어서야 출소한다. 사춘기 소년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의 기억을 오랜 감옥생활 동안 그대로 간직하고 어른이 되어버린 누들스. 그에게 시간은 멈춰 있었고, 어린 시절을 향한 그리움은 머나먼 과거를 향한 덧없는 열정이 아니라 바로 어제처럼 생생한 실체였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맥스와 데보라와 친구들이 겪었던 생의 결정적인 사건들, 그 사건의 의미들을 누들스는 알 수 없다. 누들스는 ‘아가서’를 패러디한 데보라의 사랑 고백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암흑가에서 잔뼈가 굵어가던 맥스와의 기억 또한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는 기억의 힘으로 고된 감옥생활을 간신히 버텼겠지만, 기억으로 꽉 찬 그의 영혼의 창고에는 다른 무엇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는 기억에 사로잡힌 인간, 기억의 블랙홀 속으로 현재와 미래 또한 모조리 흡입해버린 인간이 되어간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데보라 만을 생각했고, 데보라를 잃고 멀리 떠나 있을 동안에도 데보라만을 생각했다. 그가 실제로 경험한 사건들은 고향 밖에서 더 많이 일어나지만, 그의 삶을 지배하는 결정적인 기억들은 모두 고향에 있다. 그리하여 그의 일상과 그의 진심은 유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소중한 모든 것은 고향에 있는데, 그를 움직이는 실제 동력은 모두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향한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꽃’이라 불렀을 때 우리에게 오는 꽃은 블랑쇼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실제의 꽃’이 아니며, 꽃의 이미지도 아니며, 꽃에 대한 기억도 아니고 사실은 ‘꽃의 부재 그 자체’이다. 실제의 꽃이 ‘물질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만 꽃이라는 상징은 사용가능한 무엇이 된다. 말과 사물, 상징과 실체 그리고 문화와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간극이 발생시키는 정조가 바로 멜랑콜리이다. 인간은 사투르누스로부터 경작 배움으로써 자연으로부터 벗어나고 글자를 배움으로써(토성은 글쓰기를 관장한다) 기호를 통해 사물들을 배제시키는 문화인으로 탄생하는 것은 멜랑콜리라는 트라우마를 낳는다.
-김홍중, 『모더니티와 멜랑콜리』 , 《한국사회학》, 2006, 13쪽.
9. 매일 눈앞에서 볼 수 있는데 가질 수 없다니
세계를 완전히 분해해 다시 조립해보려고 했지만 고립무원 속에서 진행되다가 결국 우주론적 ‘실패’로 끝나고만 그(벤야민)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과 작업은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실패한’ 20세기를 정직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새로운 사유의 용광로가 되어줄 것이다.
-조형준, 『아케이드 프로젝트』, 한국어판 옮긴이 서문 중에서
보시오, 그러나 만지지 마시오! 이것이 벤야민의 ‘만보객’ 혹은 ‘산책자’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이었다. 마음껏 바라볼 수는 있지만 결코 만져서는 안 될 무엇. 마음껏 바라볼 수 있기에 만질 수 없는 고통이 더욱 커지는 대상. ‘화폐’로 구입하여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다면 쉽게 만져볼 수 없는 상품들. 누들스에게 더없이 소중했던 추억이 묻어 있는 고향, 브루클린의 거리 또한 그랬다. 이제는 이방인이 되어버린 그에게 고향의 추억이 묻어 있는 모든 것들은 그에게 접근금지를 요구한다. 한때 당신의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제는 다른 사람의 소유이니까. 거대한 쇼윈도의 화려한 상품처럼 변해버린 데보라야말로 누들스가 바라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는 대상이었다.
데보라는 평생에 걸쳐 세 번 누들스를 거절했다. 누들스가 맥스의 부름에 응해 패싸움에 휘말렸을 때, 누들스가 감옥에서 돌아와 큰 돈을 번 후 그녀에게 프러포즈했을 때, 그리고 초라한 노인이 된 누들스가 무대 뒤편 분장실로 찾아가 그녀를 만났을 때. 감옥에 다녀온 누들스가 ‘떳떳치 못한 방법’으로 큰 부자가 되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데보라는 누들스의 절절한 사랑 고백을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듣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싸늘한 표정으로 누들스의 프러포즈를 거절한다. “난 헐리웃으로 갈 거야. 건달 사모님으로 만족할 수는 없잖아. 너도 알잖아.” 세월이 흘러 그녀는 어느덧 브로드웨이의 스타가 되었지만 무대 뒤편의 그녀는 쓸쓸하고 초라하기만 하다. 언제 ‘퇴물’로 전락하지 몰라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늙어가는, 안쓰러운 여자.
아직도 데보라를 포기하지 못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누들스의 눈에는 그녀가 여전히 아름답다. 매일 브라운관을 통해 볼 수 있지만 좀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만질 수 없는 존재로 신비화되는 연예인처럼. 그녀는 누들스에게 평생 다가갈 수 없는 신비였다. 아케이드들을 통해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상품들의 스펙터클을 구경한 현대인의 마음 또한 그랬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매일 눈앞에서 볼 수 있는데 가질 수 없다니.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만져볼 수 없다니. 누들스에게 데보라 또한 그런 존재다. 그녀의 아름다운 춤은 언제나 누들스의 마음 속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지만,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데보라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대상이다.
아도르노는 라디오 청취자가 채널을 돌리는 행위가 일종의 청각적 만보임을 지적했다. 우리 시대에는 텔레비전이 시각적/비보행적 만보를 제공한다. 특히 미국에서 텔레비전 뉴스 프로그램의 포맷은 산만하고, 인상주의적이고, 관상적인 만보객의 구경과 비슷하다. 조달된 구경거리들이 시청자를 전 세계로 데려가는 것이다. 한편, 세계 여행과 관련하여 대중 관광 산업은 이제 만보를 2주나 4주로 묶어서 판매한다.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440쪽.
10. 자본의 찬란한 빛과 자본의 음습한 어둠의 대변자
산책자의 마지막 여행. 그것은 죽음으로의 여행이다.
-발터 벤야민
그에게는 ‘현재’가 없다. 그에게는 ‘미래’ 또한 없다. 그에게는 오직 되돌아오는 과거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과거야말로 그의 유일한 ‘현재’다. 문제는 ‘그의 과거’와 ‘사람들의 현재’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들스는 해묵은 과거의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지만, 사람들은 이미 각자의 생생한 현재 속에서 과거 따위는 잊고 살아간다. 그래서 노인이 된 누들스를 뜻하지 않게 재회한 옛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길을 걷다 유령과 마주친 듯 놀란 표정이다. 누들스는 그가 자라난 도시에서 사실 이제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철지난 유령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에게는 여전히 생생한 ‘과거=현재’가 사람들에게는 묻어버리고 싶은 과거일 뿐이다. 그리하여 누들스는 세상에서 가장 낯익은 ‘고향’을 세상에서 가장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는 산책자가 되었다.
누들스의 우울한 시대착오. 그에게 과거는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지금 앓고 있는 우울증’의 대상이다. 누들스의 안타까운 시대착오적 성격은 그의 연애를 통해 가장 잘 나타난다. 누들스와 데보라는 서로에게 아련한 첫사랑의 설렘으로 남아 있지만 이들의 사랑에는 항상 ‘현재’가 없었다. 누들스는 ‘데보라’라는 이름의 지칠 줄 모르는 환상의 필름을 마음속에서 매일 재생하지만, 데보라는 사랑보다 성공을, 과거보다는 미래를 선택한다. 그가 평생 동안 부여잡을 아름다운 기억은, 평생 동안 안타깝게 그리워할 한 여인은, 그의 앞에서 달콤한 사랑의 기미를 보여주자마자 뒤돌아서버린다. 그에게 사랑은 시작되자마자 끝나는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가 잃은 것은 단지 어린 시절의 데보라가 아니다.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기억에 매몰되지 않고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용기조차 그는 잃어버린다. 그는 오랜 시간 감옥이라 불리는 ‘세상 바깥’에 머물렀지만 데보라와 맥스는 언제나 ‘세상 속’에 있었다. 감옥에서도 오직 데보라가 패러디했던 『아가서』를 연구하며 어떻게 데보라에게 멋지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누들스. 그는 멈춰진 시간 속에서 자아가 대상을 삼켜버림으로써 대상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소위 자기애적 퇴행으로 치닫는다. 이런 식의 시대착오적 관계 맺기는 그의 절친한 벗이었던 맥스와의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가장 성공적인 인간형으로 성장한 맥스. 이제 그에게는 뒷골목 좀도둑 소년의 얼굴에서 풍겨 나오던 배고픔과 눈칫밥의 흔적이 사라졌다. 대신 친구를 배신하고 친구의 여자를 가로챈 자 특유의 비열한 눈빛, 자신의 누추한 과거를 모두 지우고 오직 화려한 현재만을 긍정하는 자의 뻔뻔한 눈빛이 남았다. 그런 맥스를 회한과 그리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는 누들스 또한 한때 ‘같은 꿈’의 소유자였다. 두 사람은 각자 자본의 찬란한 빛과 자본의 음습한 어둠을 대변하는 존재이지만 두 사람 모두 으슥한 뒷골목 자본의 부산물이라는 점에서 ‘승리자’ 맥스 또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누들스 또한 단지 맥스의 협잡이 만들어낸 ‘희생자’에 그치지 않는다. 누들스 또한 맥스의 불법 행위를 ‘밀고’하려는 적극적 주체였다는 점에서 누들스 또한 뒤틀린 운명의 공범이다. 누들스와 맥스는 브루클린 거리의 어둠이 낳은 형제들이었다.
스스로의 환상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 그것이 바로 현대성이다.
-발터 벤야민
11. 추악한 것을 도려내는 순간 아름다운 것도 사라진다
시간은 순간순간 나를 삼킨다. 마치 그치지 않고 내리는 눈이 굳은 몸을 덮듯이.
-발터 벤야민
이 사회는 동물처럼 우둔하지만 동시에 동물이 가진 희미한 직관은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들은 맹목적인 대중으로서 온갖 위험, 바로 코앞에 닥쳐온 위험에조차 희생당하게 되며, 개인들의 목표와 다양성은 개인들을 규정하는 힘들의 동일성 앞에서는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일방통행로』, 새물결, 2007, 43쪽.
가장 아름다운 것조차 가장 추악한 것 속에 고여 있다. 추악한 것을 도려내는 순간 아름다운 것도 함께 사라진다. 누들스의 삶 자체가 그렇다. 누들스에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은 그의 가장 추악한 기억, 즉 맥스와의 기억과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누들스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그 무엇도 맥스와 연관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누들스가 사랑한 모든 것이 곧 맥스가 누들스에게서 빼앗고 싶었던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삶의 끝자락에 와서야 자신의 비열한 만행을 속죄하려는 맥스. 그가 누들스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요구했을 때, 누들스에게 떠오른 것은 역설적으로 맥스와 함께 했던 가장 아름다운 추억들이었다. 맥스를 제거하는 것은 곧 자신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맥스: (백발이 성성해진 누들스를 바라보며, 이제 모든 마음의 준비를 끝낸 표정으로) 나는 네 삶 전체를 송두리째 빼앗았어.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항상 내가 있었던 거야. 나는 네 모든 걸 빼앗았지. 네 돈을 빼앗았고, 네 여자를 빼앗았지.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네가 나를 죽였다는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었어. 자, 이제 나를 쏴버려.
맥스가 누들스에게 ‘나를 죽여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하는 순간, 누들스에게 떠오른 것은 이제는 누들스의 아련한 기억의 창고 속에서조차 죽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어린 시절의 맥스’였다. 뒷골목을 누비며 온갖 나쁜 짓을 도맡아 저질렀던 어린 시절, 따스하게 울타리가 될 만한 가족도 본받을 만한 어른도 없었던 어린 시절. 맥스는 누들스의 ‘모든 첫 경험’을 함께 했던 친구였다. 여자와 처음 잔 것도, 갱단과의 첫 번째 밀수품 운반도, 첫 번째 감옥행도. 운명을 좌우하는 그 모든 결정적인 순간에는 맥스가 함께 있었다. 맥스는 누들스의 인생 전체의 증인이었고, 길 위의 스승이었고, 혈육보다 애틋한 타인이었다. 맥스를 부정하는 것은 곧 누들스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데보라와 맥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어린 시절의 맥스를 빼다 박았고, 데보라가 누들스에게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그 아들의 얼굴을 마주친 순간 누들스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 잃어버린 삶을 이제 와서 맥스와 데보라에게서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맥스는 누들스에 대한 죄책감으로 몸부림치며 자신을 죽음으로 ‘단죄’해주길 바라지만, 누들스는 맥스를 죽일 이유를 찾지 못한다. 이미 오래전에 그의 마음속에서 맥스는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신은 매순간 셀 수 없는 새로운 천사들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무(無)로 돌아가기 전에 신의 옥좌 앞에서 한 순간 신을 찬송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
-발터 벤야민
12. 꿈의 시체로 만든 별자리들
맥스: 언제까지 이 냄새나는 거리에서 살 거야?
누들스: 난, 이 거리가 좋아.
금주법의 감시망을 피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맥스의 서재는 값비싼 수집품으로 가득하다. 그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휘황찬란한 의자에 앉아 스스로를 암흑가의 제왕으로 임명하는 우스꽝스런 제스쳐도 서슴지 않는다. 오직 한 여자의 사랑을 얻을 정도만큼의 재산 이상은 바라지 않는 낭만주의자 누들스에 비해 맥스의 물욕은 퇴폐와 광기로 얼룩져 있다. 그는 강간이나 살인뿐 아니라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악행을 빠짐없이 저지르면서도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처럼 행동한다. 맥스의 데보라에 대한 마음 또한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값비싼 물건’을 손에 넣고자 하는 수집가의 집착과 다르지 않다.
언뜻 보기에 누들스와 맥스는 모두 척박한 뉴욕의 빈민가가 낳은 실패자의 전형처럼 보이지만, 빈털터리 노인네가 되어 고향땅을 유령처럼 서성이는 누들스보다도 오히려 맥스가 처절한 실패의 주인공이다. 누들스는 소년시절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애늙은이였지만 감옥에 다녀와서도 여전히 때가 묻지 않은 순애보의 주인공이었다. 누들스는 뉴욕의 뒷골목에서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여전히 그 남루한 뒷골목에 서린 추억들을 사랑한다. 누들스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평생 곱씹어도 매번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추억의 장면들이 상영되고 있다. 돌아온 탕아 누들스의 눈에 비친 고향의 새로운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초고층 빌딩으로 가득한 뉴욕의 뒷골목 풍경은 어린 시절 누들스가 소매치기의 무대로 삼았던, 마차와 행인으로 가득한 사람냄새 물씬 나는 거리 풍경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작은 기억의 파편만으로도 누들스는 어린 시절 전체를 손쉽게 복원해 낼 수 있다. 고향의 거리 풍경 모든 것이 터무니없이 변했지만 딱 한 곳 변하지 않은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데보라의 오빠 뚱보의 술집이었다. 뚱보네 술집은 여전히 외로운 사람들의 안식처였고, 시간의 광풍에도 훼손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추억의 장소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뚱보네 술집에 찾아온 누들스는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했던 운명의 장소, 뚱보네 술집의 화장실 뒤편으로 들어간다. 깨진 벽돌의 틈새로 보이던 데보라의 아름다운 몸짓. 그녀의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던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음악소리. 몰래 자신을 훔쳐보는 누들스의 시선을 분명히 느끼면서도 보란 듯이 옷을 후르륵 벗어 자신의 아름다운 몸을 보여주던 데보라의 도발적인 눈빛. 닳고 닳은 그 벽돌의 틈새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누들스는 언제든 추억의 한가운데로 순식간에 돌진하여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누들스에 비하면 맥스는 불행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다. 그는 그리워할 추억조차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엄연히 존재하던 아름다운 추억들조차 짓밟아 추억의 가치를 스스로 말소시켜버린 인간이다. 그는 추억조차 소유하려 했고 타인의 추억조차 수집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리하여 그 어떤 추억의 페이지에서도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그는 누들스의 추억을 욕보이고, 누들스의 꿈조차 영원히 짓밟아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도 꿋꿋이 살아남아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생의 끝자락에 와서야 누들스에게 공소시효조차 만료되어 버린 용서를 빈다.
맥스는 뉴욕의 기념비적인 골동품을 싹쓸이할 만한 재력을 가졌지만 그 휘황찬란한 수집품들 속에 스며있는 그 어떤 내밀한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그는 그토록 아름다운 여자와 그토록 소중한 친구와 그토록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꿈의 별자리도 그리지 못한다. 그에 비해 누들스는 빈털터리 노신사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향한 존엄을 잃지 않는다. 그는 데보라와의 추억이 스민 음악의 단 한 구절, 그녀를 엿보기 위해 들어올려야 했던 작은 벽돌 조각,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암송했던 성경 구절 단 몇 줄만으로도 충분히, 오래전에 부서져버린 꿈의 별자리를 재구성해낸다. 아주 작은 기억의 파편만으로도,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옛 도시의 끔찍한 ‘폐허’ 속에서조차 누들스는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꿈의 별자리를 그려낸다.
자신의 위대함에 저 혼자 반해 법석을 떠는 인류는 스스로를 우주라고 믿고, 끝없이 펼쳐진 곳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감옥 안에 살고 있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137쪽.
13. 모두 가졌지만 허한 이 느낌은
나는 성스러운 교향곡 속에
잘못 끼어든 불협화음이 아닌가.
(……) 나는 상처이며 칼!
나는 따귀 때리기이자 뺨!
나는 깔리는 팔다리이자 짓누르는 바퀴.
또 사형수이자 사형집행관!
나는 내 심장의 흡혈귀,
영원한 웃음의 선고를 받고도
미소 짓지도 못하는
버림받은 중죄인!
-보들레르, 「자신을 벌하는 사람」 중에서(윤영애 옮김, 『악의 꽃』, 문학과지성사, 2003)
가장 친한 친구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너무 일찍 삶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누들스. 그가 현실의 고통을 잊는 유일한 방책은 바로 마약이었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아편굴에서 환각에 빠져 있는 누들스는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함으로써 고통을 잊으려 한다. 맥스가 연방은행을 털자는 황당한 계획을 털어놓자, 광기 어린 맥스의 굳은 결심을 돌릴 수 없어 적어도 맥스의 죽음만은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금주법 위반 혐의로 맥스를 신고했던 그날 밤. 그날 예고 없이 갑자기 일어난 화재 사건 때문에 맥스가 죽었다고 믿으며 살아온 지난 삼십 년. 그 뼈아픈 죄책감이야말로 누들스의 끊임없는 자기학대의 원흉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맥스의 치밀한 계략이었음을 알게 된 30년 후에도, 누들스의 마음은 편치 않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 그것도 모자라 친구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안고 평생을 괴로워하게 만들었던 맥스가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맥스는 정신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었으며 자신이 죽인 자들의 망령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누들스에게, 고통으로 가득한 현실과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유일한 도피처는 마약이 약속하는 환각이었다. 그 달콤한 환각 속에서만은, 누들스는 초라한 패배자가 아닐 수 있었기에. ‘자신을 학대하는 고통’과 ‘현실을 망각하는 쾌락’의 이중주 속에서 누들스는 자기모순적 쾌감을 느낀 것일까.
벤야민이 쓴 글들 중에는 자기가 꾼 꿈의 기록이 많은데, 당시 그는 또한 각종 마약으로 실험을 시도했다. 공업적 생산의 압력 하에서 사유나 사유의 대상, 즉 주체나 객체가 모두 경직되는데, 꿈의 기록과 마약에 의한 실험 모두 이처럼 경직화되고 겉 딱지가 앉는 상태를 타파하기 위한 시도였다. 꿈속에서뿐만 아니라 약물에 의한 도취를 통해서도 벤야민은 ‘특히 은밀한 친밀성들로 가득 찬 세계’가 열리는 것을 보았는데, 이 세계 속에서 사물들은 ‘극히 모순적인 방식으로 상호 결합해’ ‘온갖 형태의 친화성들’을 보여준다. 꿈과 도취는 자아가 아직도 사물들과 미메시즉어로 생동감 있게 교류할 수 있는 경험의 영역을 열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롤프 티데만,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편집자 서문(벤야민 지음, 조형준 옮김, 『아케이드 프로젝트』, 새물결, 2005, 54~55쪽.)
그러나 누들스는 그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사랑과 이상을 마약을 통한 환각 속에서는 결코 찾지 못했다. 그의 꿈은 저 거짓말 같이 달콤한 약속, 아메리칸 드림보다도 훨씬 더 허황되다. 그가 꿈꾸던 세상 속에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약의 환각 속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내가 결코 가질 수 없었던 꿈과 사랑과 우정은 그 환각 속에서만 생생한 현재이니까. 내 꿈을 비웃는 이 모든 냉혹한 현실을 아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공간 아닌 공간, 환각. 망각만이 누들스의 유일한 도피처이지만, 환각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는 또 다시 제자리다. 그는 아무 것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평생 붙잡을 수 없는 꿈과 가질 수 없는 사랑과 이루어질 수 없는 우정만을 갈망했다.
종교적 계시를 진정으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마약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진정한 극복은 세속의 계시에 있다. 즉, 유물론적이고 인간학적인 영감 속에 있는데, 해시시나 아편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그와 비슷한 것들은 그저 그러한 영감의 예비단계를 이루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아케이드 프로젝트』, 새물결, 2005, 54쪽.
14. 욕망의 만화경적 파노라마
완전히 같으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감조차 잡지 못하고 지나쳐 가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을 줄이야!
-발터 벤야민
이 영화는 범죄 스릴러 특유의 퍼즐 맞추기식 긴장감을 조성하지도, 남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팜므 파탈을 미화하지도, 마초적 의리와 무책임한 순수를 강조하지도 않는다. 멀리서 바라본다면 그저 암흑가의 갱스터나 할리우드의 셀러브리티(celebrity, 유명인사)로서 확실한 성공가도를 달려온 사람들, 혹은 멀리서 본다면 그저 인생의 실패자이자 뒷골목 룸펜의 전형인 사람들의 삶을 ‘성공 신화’나 ‘피해자의 넋두리’로 그려내지도 않는다. 이 영화는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 남부러울 것 없는 인간이나 남에게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인간, 행복해 보이는 인간이나 불행해 보이는 인간, 그 모두의 삶을 공통적으로 꿰뚫고 있는 어떤 원초적 상실감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이 영화는 그들이 가진 것이나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버린 것들 때문에 겪는 맹렬한 허무를 그려낸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잔인하도록 노골적으로, 타인의 삶을 은밀하게 엿보는 관음증적 시선으로 주인공들의 과거-현재-미래를 재구성해낸다.
이룰 수는 없지만 한때 가졌던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꿈이 사라지고 난 후. 가질 순 없지만 한 때 사랑했던 것만으로도 내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사랑의 기억들.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폐허와 허무 위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시선은 영화 속 남성들의 노리개였던 거리의 창녀부터 그들이 가장 갈망했던 꿈의 여인 데보라까지, 안 해 본 범죄의 종류가 거의 없어 보이는 천하의 파렴치한 맥스부터 여인을 얻기 위해 범죄도 불사하는 파괴적 로맨티스트 누들스에 이르기까지, 그들 어느 누구의 기억도 우아하게 미화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차분해서 오히려 잔혹해 보이는 감독의 냉철한 시선은 가장 순수한 인간부터 가장 추악한 인간에 이르기까지, 이 더러운 욕망의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욕망의 피투성이 문턱을 최대한 ‘줌인(zoom in)’하여 가장 밝은 조명으로 비춘다. 그 눈부신 조명 앞에서는 그 어떤 소박한 욕망도 추악해져버린다.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기에 오히려 모두의 편일 수 있는 욕망의 시선. 그것은 자본주의를 선과 악의 관점이 아닌, 윤리와 욕망의 관점에서가 아닌, 모두를 향한 ‘유혹’ 그 자체로서 바라보려 했던 벤야민의 시선과 닮아 있다. 세계 최대의 갑부에서 갈 곳 잃은 홈리스까지, 거리를 쓸쓸히 배회하는 창녀부터 초호화 세단을 타고 하루종일 흙 한 톨 신발에 묻히지 않는 귀부인에 이르기까지, 아직 욕망과 자본에 대해 무지한 어린아이부터 모든 종류의 욕망을 이미 섭렵하여 욕망 자체를 달관해버린 노인까지. 감독은 그들 모두를 빠짐없이 어김없이 뒤흔들고 있는 상품과 유행과 죽음과 섹스의 도시, 그 욕망의 만화경적 파노라마를 그려낸다. 길가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껍질 하나만으로도 그 도시의 풍경을 재구성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벤야민처럼, 누들스 또한 뚱보네 술집의 간판이나 여배우의 공연을 선전하는 찢어진 포스터 한 장 만으로도 그가 잃어버린 시공간의 총체를 복원해낼 수 있다.
내겐 천 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추억이 있다.
계산서들, 시의 원고와 연애편지, 소송 서류, 연가들,
영수증에 돌돌 말린 무거운 머리타래로
가득 찬 서랍 달린 장롱도
내 서글픈 두뇌만큼 비밀을 감추지 못하리.
그것은 피라미드, 거대한 지하매장소,
공동묘지보다 더 많은 시체를 간직하고 있는 곳.
나는 달빛마저 싫어하는 공동묘지.
-보들레르, 「우울」 중에서(윤영애 옮김, 『악의 꽃』, 문학과 지성사, 2003, 160쪽.)
15. 길을 잃어야만 포착할 수 있는 풍경
나는 비 많이 내리는 나라의 왕 같아.
부자이지만 무력하고 아직 젊지만 늙어버려.
(……) 사냥가도, 매도, 아무것도 그에게 즐거움 되지 못한다.
발코니 앞에서 죽어가는 자기 백성마저도.
총애 받던 광대의 우스꽝스런 노랫가락도
이 견디기 어려운 병자의 이맛살을 펴지 못한다.
나리꽃으로 수놓은 그의 침상은 무덤으로 바뀌고,
왕이라면 아무나 반해버리는 치장 담당 시녀들이
제 아무리 음란한 치장술을 만들어내도
이 젊은 해골로부터 미소를 끌어내지는 못한다.
그에게 금을 만들어주는 학자마저도
그의 몸에서 썩은 독소를 뽑아내지 못한다.
권력자들이 말년에 갈망하는
로마인들이 전해준 피의 목욕도
그 속에 피 대신 푸른 ‘망각의 강’이 흐르는
이 마비된 송장을 데울 수 없다.
-보들레르, 「우울」중에서(162쪽)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 것에서도 안식을 찾지 못하는 자. 보들레르는 그런 사람을 일컬어 견딜 수 없이 비가 많이 내리는 나라의 왕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 어떤 아름다움도, 쾌락도, 지식도, 권력도, 그에게 미소를 끌어내지 못하기에 그는 살아 있어도 이미 ‘마비된 송장’ 같은 피폐한 영혼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맥스 또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친구의 삶까지 송두리째 빼앗아가며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의 왕국은 1년 365일 내내 비만 내리는 나라처럼 질척한 우울과 음습한 불안으로 가득하다.
가면무도회에서 한껏 떨쳐입고 저마다 최고의 모습으로 분장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마치 맨눈으로 엑스레이를 찍듯 끔찍한 ‘해골’의 모습을 투시했던 보들레르.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상품과 유행과 소비자가 넘쳐나는 새로운 도시 파리에서 생명의 몸짓을 가장한 죽음의 이미지들을 포착했다. 보들레르나 벤야민이라면 첫눈에 맥스 같은 불행한 인간의 몸 전체에서 뿜어 나오는 처연한 죽음의 냄새를 포착해낼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적 성공을 송두리째 거머쥔 맥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행복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한 후, 그 끊임없는 불안과 우울의 뿌리에 옛 친구 누들스가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맥스가 진정으로 소유한 것은 ‘우울’뿐이었다. 맥스는 이 거대한 도시가 허락하는 모든 재화를 소유해봤지만, 그가 생의 끝자락에서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은 오직 자신의 생 전체를 검은 휘장으로 감싸는 듯한 끔찍한 우울이었다. 맥스는 ‘나를 죽여 달라’는 자신의 요구를 누들스가 들어주지 않자, 모든 것을 잘디잘게 분해해버리는 거대한 쓰레기차에 자신의 몸을 던져버리고 만다. 스스로 쓰레기를 자처하며 흔적조차 식별해낼 수 없이 분해되어버린 맥스……. 이 충격을 가눌 수 있는 균형감각도, 이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친구도 이제는 없어진 누들스는 또다시 마약이 약속하는 덧없는 환각의 나락으로 추락한다.
영화는 그렇게 덧없이 끝나지만, 이 영화의 복잡다단한 욕망의 퍼즐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기묘한 활기를 띠며 관객의 마음속에서 새로 조립되기 시작한다. 누들스가 꿈꾸던 화려한 삶을 소유한 것은 맥스와 데보라였지만, 정작 그들의 삶을 ‘옛날 옛적 이야기’로 발화할 수 있는 사람은 누들스가 아닐까. 부르주아에도 노동자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이 도시의 ‘산책자’로 이 도시의 삶을 슬쩍 엿보되 결코 참여하지 못하는 누들스. 그야말로 그들의 삶이 그려내는 욕망의 별자리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읽어낼 수 있는 내면의 망원경을 지녔으므로.
모든 것이 내게는 알레고리가 되고.
-보들레르, 「백조」
우울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보들레르의 천재성은 알레고리의 천재성이다. 보들레르에게 와서 파리는 최초의 서정시의 대상이 된다. 이 시는 결코 고향 찬가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도시를 응시하는 알레고리 시인의 시선, 소외된 자의 시선이다. 그것은 또한 산책자의 시선으로, 그의 생활 형태는 마음을 달래는 어슴푸레한 빛 뒤로 대도시 주민에게 다가오고 있는 비참함을 감추고 있다. 산책자는 여전히 문턱 위에, 대도시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의 문턱 위에 서 있다. 아직 어느 쪽도 완전히 그를 수중에 넣지는 못하고 있다. 그는 어느 쪽에도 안주하지 못한다. 그는 군중 속에서 피신처를 찾는다. (……) 군중이란 베일로서, 그것을 통해 보면 산책자에게 익숙한 도시는 환(등)상으로 비쳐진다. 군중 속에서 도시는 때로는 풍경이, 때로는 거실이 된다. 곧 이 두 가지는 백화점의 요소가 되며, 백화점은 정처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조차 상품 판매에 이용한다. 백화점은 산책자가 마지막으로 다다르는 곳이다.
-『아케이드프로젝트』, 104~105쪽.
16. 되살이 하고 싶은 욕망, 오마주
내가 보고 있는 사물들은, 내가 그 사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폴 발레리
우리는 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 그리워하는 것일까. 뚜렷한 그리움의 대상이 없이도 무언가 아득히 멀리 있는 것을 향한 그리움이 강렬하게 솟구칠 때, 그 그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세상 어디에도 없지만 소설 속에서만은 생생하게 묘사된 도시, ‘무진’을 그리워하듯이, 우리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통해 각인된 머나먼 타인의 체험을 그리워할 수 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ome in America)』의 시대 또한 ‘체험하지 못했지만 얼마든지 그리워할 수 있는’, 현대인의 노스탤지어를 아프게 건드린다. 100년 후에도 1000년 후에도 변함없이 ‘머나먼 옛날 옛적 미국에서’ 일어난 것으로 상상된 어떤 삶. 우리는 그 삶의 흔적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얼마든지 ‘내 삶처럼’ 그리워할 수 있다. 마치 어딘가에 살아있지만 결코 만날 수 없는 첫사랑을 그리워하듯, 우리는 영화 속의 인물을, 사건을, 도시를, 그리워한다. 그것이 바로 영화의 힘이다. 그리움의 대상을 발명해내는 힘. 사라져간 삶, 지워져 간 삶을 향한 집단적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마력 말이다.
도시는 고향이 되기엔 너무 척박한 공간이 아닐까. 하지만 도시가 고향일 수밖에 없는 수많은 현대인들에게, 도시는 또 하나의 고향이 되었다. 어릴 적 뛰놀던 아파트 놀이터가 고향의 향수를 자아낼 수도 있고, 정들었던 건물이 철거된 후 뼈만 남은 철골과 콘크리트가 나뒹구는 폐허조차도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누군가의 폐허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향이 될 수도 있다. ‘재개발’은 현대인이 추억의 증거로 삼을 만한 모든 흔적들을 말살한다. ‘리뉴얼’이라는 명목으로, ‘리모델링’이라는 목적으로, 모든 것이 너무 쉽게 사라지는 세상에서 우리의 그리움은 손쉽게 억압된다.
그러나 어떤 사물의 아우라가 뒤늦게 발견되는 순간도 바로 그 사물이 사라질 위협에 처했을 때다. 철거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머릿속에라도 희미하게 남아 있는 아주 작은 흔적, 그 폐허의 흔적만으로도 우리는 과거를 향한 쾌속 타임머신을 탄다. 누들스가 데보라의 춤을 훔쳐보던, 옛날 옛적 뚱보네 집 화장실의 벽돌 하나를 들어내는 그 순간, 그 사소한 촉감만으로도 사라져 간 모든 세월을 되찾았듯이.
예술작품의 본래적 아우라를 앗아간 ‘주범’으로 복제예술의 대표주자인 사진과 영화가 지목되곤 했다. 그런데 그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들은 더욱 아우라 그 자체를 열망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아우라 파괴의 주범으로 내몰린 복제예술 속에서도 거침없이 아우라를 찾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의미 있는’ 존재들에게서 아우라를 찾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 같다. 우리는 이제 아우라 삭제의 원흉으로 불리던 영화에서조차 절실한 아우라를 느끼는 인간으로 진화해 간다. 영화가 뿜어내는 아우라의 존재는 ‘오마주’를 통해 증명된다. 어떤 영화만이 지닌 감동을 ‘되살이’하고 싶은 욕망이 오마주가 아닌가. 복제하고 싶지만 결코 100퍼센트 복제할 수 없는 감동의 원천, 즉 아우라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 오마주가 아닐까.
17. 타인의 추억을 앓는 산책자를 위하여
맥스는 누들스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이 냄새나는 거리에서 살아갈 거냐고. 이 더러운 거리의 넝마주이 같은 삶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믿었던 맥스는 뉴욕의 화려한 스카이뷰에 감춰진 뒷골목의 기억, 그 거리를 지나간 모든 사람들의 흔적을 담고 있는 더러운 땅바닥의 냄새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더럽고 시끄럽고 정신없는 뒷골목의 분위기야말로 누들스가 그 거리에서 느꼈던 소중한 아우라의 일부였다. 마약에 흠뻑 취해서라도, 그 허망한 환각과 도취 속에서라도 되찾고 싶은 세계의 아우라는 『섹스 앤 더 시티』식의 화려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거리에 단지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거나 소매치기 대상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거리의 부산스러움 자체를 사랑하고, 그 거리만이 지닌 아우라 속에서 아늑하게 기거할 수 있는 것은 누들스의 재능이기도 했다. 누들스에게는 있지만 맥스에게는 없는 것은, 그 잡다하고 번잡스러운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도 사랑을 보고 희망을 보고 미래를 볼 수 있었던 순수한 혜안이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라도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생생한 현재를 아득한 옛날이야기로 만드는 마법, 그것은 바로 영화의 힘이고 소설의 힘이고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1000년 쯤 지나면 누들스와 맥스의 고통스러운 복수와 회한의 이야기가 100살 쯤 먹은 총명한 할머니의 입술에서 이렇게 구술될지도 모른다. “옛날 옛적에, 미국이라 불리는 커다란 나라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 소년은 한 소녀를 짝사랑했어. 춤을 추는 소녀였지. 누구든 그 소녀가 춤추는 모습을 봤다면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방도가 없었단다…….”
우리가 아직도 이야기를 읽고 쓰고 말할 수 있다면, 누군가 이야기로 만들어 우리의 아픔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구원의 발걸음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소설이 의미를 갖는 것은, 소설이 이를테면 제 3자의 운명을 우리들에게 제시해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제 3자의 운명이, 그 운명을 불태우는 불꽃을 통해서 우리들 스스로의 운명으로부터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따뜻함을 우리들에게 안겨주기 때문이다. 독자가 소설에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은, 한기에 떨고 있는 삶을, 그가 읽고 있는 죽음을 통해 따뜻하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인 것이다
-벤야민, 반성완 옮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92, 185~6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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