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얼굴 위에 새겨진 이야기의 우주
독자는 자신을 주연배우에게 감정이입하고, 주인공을 완결하는 모든 특징들(무엇보다도 주인공의 외양)을 무시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 삶의 주인공인 양 주인공의 삶을 체험한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길, 2007, 59쪽.
미술시간에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는 자화상 그리기였다. 거울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하루 종일 거울 앞에 붙어 있어도 내 생김새를 정확하게 포착해낼 수가 없었다. 그림 속에서나마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마구 내 모습을 ‘성형’해보고 싶기도 했고, 명랑만화 주인공처럼 내 모습의 코믹한 부분을 극대화시켜보고도 싶었지만, 온종일 결국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채 멀뚱하게 앉아 있었다. 애꿎은 스케치북에는 좀처럼 알아볼 수 없는 괴상한 점선 자국들만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꾸역꾸역 그린 자화상의 결과물은 여전히 미완성이었고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멀찌감치 치워놓아 결국에는 찾을 수도 없게 되었다. 자기 자신을 올바로 그리는 일의 어려움을 그때야 실감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거울 앞의 내 모습이 낯설어지는 순간, 그 순간은 바로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내 모습’과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사이의 미묘한(때로는 섬뜩한) 차이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 주인공의 삶에 자신을 감정이입 시키는 매혹의 기원은 무엇일까. 우리는 자기 자신과는 다르지만 자신과 조금은 닮아 있을지도 모를 타인의 삶에 매혹되는 것이 아닐까. 관객은 영화의 스크린과 사운드에 사로잡혀 있을 동안 자신을 향한 자신의 끈질긴 시선을 잠시 망각할 수 있다. 관객석의 조명이 꺼지는 순간, 우리는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잊은 채 스크린 속의 타인의 삶을 향해 집중하기 시작한다. 매력적인 등장인물은 아무리 외국인이어도, 성별이 달라도, 살아온 모든 환경이 달라도, 그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을 잊게 만든다. 영화의 스크린은 다른 사람의 사람을 살아보고 싶은 욕망과 등장인물이 지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시너지 효과로 관객을 유혹한다. 우리는 그렇게 스크린을 통해 ‘나’를 넘어선 ‘또 다른 나’의 잃어버린 가능성을 탐색한다.
『의형제』의 주인공 송지원은 자신과 같은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신과 전혀 다른 캐릭터를 지닌 인물 ‘그림자’와의 대비 효과를 통해 관객의 마음에 성큼 다가온다. 오랫동안 국정원의 주요 타깃이었으며 해묵은 골칫거리이기도 했던 그림자는 냉혹한 킬러의 전형을 보여준다. “국제적으로 암약하는 살인마”라는 평가를 받는 그림자가 송지원과 함께 ‘처리’할 대상은 김성학이라는 귀순자였다. “인민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자란 새끼가 장군님을 모략하는 책을 써? 밤마다 네 목을 따는 꿈을 꿨어.” 김성학 가족을 대하는 태도에서 관객은 송지원과 그림자의 차이를 감지한다. 송지원은 김성학의 가족까지 살해하라는 그림자의 지시를 차마 따르지 못한다. 김성학의 장모는 물론 아내까지 잔인하게 살해하는 그림자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송지원은 김성학의 아이만이라도 살려주기 위해 애쓰지만 그림자는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송지원을 노려본다. “강성대국의 아이들 중에 나약한 놈은 한 놈도 없어!”
자신의 임무와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일치시킬 수 없는 비극의 주인공. 카메라는 조심스럽게 송지원의 눈 밑에 가득 드리운 절망의 그림자를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한다. 그는 빨리 이 임무를 마치고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가족이 몰살된 상황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한 소년의 삶을 무시할 수 없다. 송지원은 그림자에게 김성학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아이의 눈을 황급히 가린다. 자신만 살아 돌아가기도 바쁜 이 상황에서 송지원은 아이를 구하기로 결심한다. 셀 수 없는 고뇌와 절망의 흔적이 가득한 송지원의 얼굴에는 그렇게 ‘마음 약한’ 그가 걸어왔을 신산한 삶의 이야기가, 보일 듯 말 듯 아련하게 깃들어 있다. 그가 ‘남파공작원’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생면부지의 아이를 구하는 순간. 관객은 불현듯 그의 얼굴에 숨겨진 이야기의 풍경을 읽어내고 싶어진다. 검푸른 우울과 섬뜩한 고독, 투명한 설렘을 동시에 간직한 송지원의 얼굴 뒤에 숨겨진 이야기의 풍경을.
물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외적인 형상을 상상 속에서 그려보고, 외부에서 자신을 느끼면서, 자기 자신을 내적인 자기 느낌의 언어에서 외적인 표현성의 언어로 옮기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느 정도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특별한 노력은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반쯤 잊힌 타인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가 체험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 나는 다소간 둘로 분열되는 듯하지만, 최종적으로 완전히 나누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두드러지게 제시하고 나의 내적 자기 지각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오기 위해서는 얼마간 새로운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에 성공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외적인 형상 속에 어떤 독특한 공허, 유령 같음, 그리고 조금은 섬뜩한 정도의 고독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된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길, 2007,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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