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五色令人目盲, 오색영인목맹, |
갖가지 색깔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
五音令人耳聾, 오음영인이농, |
갖가지 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하고, |
五味令人口爽. 오미영인구상. |
갖가지 맛은 사람의 입을 버리게 한다. |
馳騁田獵令人心發狂, 치빙전렵영인심발광, |
말달리며 들사냥질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든다. |
難得之貨令人行妨. 난득지화영인행방. |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행동을 어지럽게 만든다. |
是以聖人爲腹不爲目. 시이성 인위복불위목. |
그러하므로 성인은 배가 되지 눈이 되질 않는다. |
故去彼取此. 고거피취차. |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
1.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통렬히 비판하다(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말초감각을 자극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에 대하여 이처럼 통렬한 비판의 소리는 듣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이 장의 언어를 대할 때, 쉽사리 이 장이 죽간(竹簡)에는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상정을 할 수 있다. 왠가? 오색(五色)ㆍ오음(五音)ㆍ오미(五味) 등의 벌써 정식화(스테레오 타입화)된 표현은 죽간시대의 표현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오행(五行)학파의 성립시기와도 관련되는 문제일 수도 있다. 즉 오색(五色)ㆍ오음(五音)ㆍ오미(五味) 등의 표현은 오행(五行)사상이 팽배해진 시대의 사고구조의 소산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죽간(竹簡)의 시대에 이미 ‘오행론(五行論)’이 성립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행론(五行論)은 음양론(陰陽論)보다도 성립시기가 늦은 전국말기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당대에 유행한 오행론의 신봉자였다.
오색(五色)은 문자 그대로 ‘다섯 색’으로 번역하면 아니 된다. 그것은 인간의 시각을 자극시키는 ‘모든 색깔’이다. 현란한 강남여자들의 옷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오음(五音)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한다! 실제로 요즈음의 젊은 아이들은 하루 종일 귀에 다 레시바를 꽂고 살고 있다. 무엇을 해도 그 오음(五音)의 자극을 떼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인체의 반응(response)은 점점 무디어져 감으로 자극(stimulus)은 날로 날로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뻔하다. 고막(ear drum)의 손상이나 파열이 초래되는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세태인 것이다.
오미(五味)! 맛도 요즈음의 세태는 ‘담백의 묘미’를 점점 상실해가고 있다. 그래서 마늘, 파, 생강, 고추, 과도하게 자극적인 양념은 날로 날로 강화되고, 게다가 온갖 화학조미료가 판을 치는가 하면, 음식점에서는 사람들의 맛을 길들이기 위해 짜게 하고 들큰하게 설탕을 치게 마련이다. 왜 우리나라 음식들은 그다지도 담백하고 깨끗하고 청초한 맛을 잃었는가? 왜 그렇게도 들척지근하고 니길니길하고 맵고 짜고, 화학조미료로 혓바닥을 도배질해서 뒷골이 쑤시게 하고, 자고 일어나면 머리가 쑤아하게 허화(虛火)가 뜨는가 하면, 입안에서는 오만가지 더러운 시궁창 냄새가 뱃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만들고 있는가? 우리나라 식품업계의 맹렬한 반성을 촉구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외식(外食)업소문화의 통렬한 반성을 촉구한다! 과연 그대들은 그대의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음식들을 손님들에게 팔고 있는가? 과연 그대들은 손님들의 건강을 나의 건강처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나라 음식점의 더러움이란 이루 다 형언 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 온갖 오미(五味)의 잔치를 연출하여 돈만 긁어 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2. 성인은 배가 되지 눈이 되지 않는다(馳騁田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 是以聖人爲腹不爲目)
치빙전렵영인심발광(馳騁田獵令人心發狂)! ‘치빙(馳騁)’은 말달리기다. ‘전렵(田獵=畋獵)’은 ‘사냥’이다. 고대사회에 있어서도 오늘날과 같은 스피드의 자극은 여전한 것이었다. 중국말로 ‘빨리오라’는 말은 ‘馬上來’라고 한다. 이때 ‘馬上’이란 ‘fast’라는 부사이지만, 그것은 직역하면 ‘말타고’ 라는 의미다. 말을 타고 달리는 기분!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전렵(사냥)의 취미 또한 사람을 끊임없이 미치게 만든다. 아마도 ‘치빙전렵(馳騁畋獵)’이라는 이 장의 표현은 요새말로는 오토바이 폭주족이나 스포츠카, 레이스카의 광란, 고스톱, 카지노, 경마, 증권 ……. 이 모든 자극과 스릴과 스피드와 도박의 광란을 총칭하는 말일 것이다.
난득지화(難得之貨, 얻기 어려운 재화) 역시 사람의 행동을 묘연하게[妙] 만든다. 라스포사의 비싼 옷이 이토록 한 나라의 정국을 뒤흔들 줄이야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평소 때는 연루된 당사자들도 건전한 상식을 가질 수 있는 인테리들이요, 교양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토록 그들의 행동이 어지러워질 수 있었겠는가? 끊임없이 난득지화(難得之貨,)를 산출하고, 그러한 가치 속으로 휘말리는 것을 조장시키고 있는 우리 문명의 가치에 대한 근원적 반성을 노자는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므로[是以] 성인은 배[腹]가 될지언정, 눈[目]이 되질 않는다. 이것은 또 뭔 말인가? 이미 우리는 3장의 ‘虛其心, 實其腹’에서 心(유위)과 腹(무위)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또다시 腹(배)이 目(눈)과 콘트라스트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내가 제2장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말하는 자리에서 우리의 시각 중심의 인식구조의 허망함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배[腹]과 콘트라스트를 이루는 눈[目]이란 불교의 용어로 말하자면 ‘제1식(the First Consciousness)’에 해당되는 것이다. 제1식은 인간의 8식 중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직접적이며 가장 또렷하고 가장 즉각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하기에 가장 에러의 가능성이 높고, 가장 이 세계를 왜곡되게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왜곡을 환(幻, māyā)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환유(幻有)요, 환화(幻化)요, 환작(幻作)이요, 환술(幻術)이요, 환영(幻影)이요, 허환(虛幻)이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서 인식하는 대표적인 작위(作爲)다. 지나가다 놓여있는 새끼줄이 뱀으로 꿈틀거리기도 하고, 세워놓은 때묻은 빗자루가 도깨비로 변하여 나와 씨름을 벌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제1식의 천박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한 눈의 인식에 비한다면 배의 인식은보다 근원적이요, 보다 막대하며, 보다 무차별적인 것이며, 보다 지속적인 것이다.
目(visual feeling) | 幻 | 차별적 |
腹(visceral feeling) | 常 | 무차별적 |
3. 성인이 배가 될 뿐 눈이 되지 않는 이유(故去彼取此)
노자의 최종적 결론은 이러하다. 거피취차(去彼取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 저것()이란 나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다. 이것[此]이란 나에게서 가까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저것이란 눈[目]이요, 이것이란 배[腹]다. 저것은 나에게서 멀리 있는 모든 것이요, 이것은 나에게서 가깝게 있는 모든 것이다. ‘저것’이란 플라톤(Platon: BC 427~347)적인 관념이요, 가도지도(可道之道)요, 피안적(彼岸的)인 모든 이상이다. ‘이것’이란 항상 변화하는 이 세계의 생성이요, 상도(常道) 세계며, 차안적(此岸的)인 모든 현실이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 이것은 동양인의 실천주의적 삶의 가치의 전범인 것이다. 그리고 노자적인 실용주의 가치관의 구호인 것이다.
나는 노자적인 실용주의를 미국의 프래그머티즘(pragmatism)과 구별하여 프랙티칼리즘(practicalism)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러한 노자적인 프랙티칼리즘의 구조 속에 이미 『금강경』의 대승적 지혜가 마련되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피안(彼岸)’이니 ‘차안(此岸)’이니 하는 불교용어도 바로 이 12장의 ‘거피취차(去彼取此)’의 ‘피차(彼ㆍ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피안(열반, nirvana) 그 자체를 부정하고 차안(윤회,
samsara)의 현실을 긍정하는 대승의 지혜도 이 12장의 노자철학의 구조 속에 이미 배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번뇌의 이(此) 현실이 바로 저(波) 보리의 깨달음인 것이다. 보리(菩提, bodhi)가 곧 번뇌(煩惱, klesa)요, 번뇌가 곧 보리인 것이다.
이 말은 곧 번뇌의 현실 속에 깨달음이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보리의 저 피안을 버리고[去], 번뇌의 이 차안을 취해야[取]하는 것이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고 하는 대승불교의 핵심적 사상이 이미 노자(老子)의 ‘거피취차(去彼取此)’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彼 | 目 | 彼岸 | 열반(nirvana) | 보리(bodhi) | 去하고 |
此 | 腹 | 此岸 | 윤회(samsara) | 번뇌(klesa) | 取하라 |
왕필은 말한다.
배가 된다고 하는 것은, 사물로써 자기 몸을 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눈이 된다고 하는 것은, 사물에 자기 몸이 부림을 당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눈이 되지 않는다.
爲腹者以物養己, 爲目者以物役己, 故聖人不爲目也.
그 얼마나 함축적인 통찰인가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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